한번도 와본 적 없는
광주시 북구 우산초등학교 교정에서
접시만한 별들을 올려다 본다
풀벌레 소리도 자고 동네는 불켠 집이
몇 집뿐

왜 별들은 밤마다 불을 켜고
제 몸을 사르는 것일까
빈 운동장에서 나는
어떤 불을 켜고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일까
나는 한걸음도 걷지 못했다

낯선 운동장까지 온 것은 산책이 아니었다
실은 그것은 밤도 아니었고
별나라 장난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살아가자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사랑해야겠다는
연민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
내가 아는 별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나는 별이 되고자 했다

빈 운동장 같은 별은 비록 쓸쓸하겠지만
시원해서 좋을 것이다
모든 시야가 별처럼 총총거리고
이제부터라도 나는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대폿집을 찾아갈 것이다
첫 잔은 빈 운동장을 위하여 그러고는
이 낯선 서성거림을 위하여
목을 축일 것이다

다시 올려다보니
하늘에는 더 많은 별들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바람이 싸늘하게 등을 밀었다


         - 정철훈 시집 <살고 싶은 아침>, 詩 '말할 수 없는 그리움' 全文




12월 말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그동안은 아무리 가족여행이라 하더라도 1박 2~ 3만 원 정도의 민박만 고집하다가
이번에는 유명 펜션에서 두 밤을 내리 묵는 호화판 여행이었다.

참 좋았던 곳은 외돌개와 쇠소깍.
인상적이었던 곳은 울울창창한 비자림과 심야의 용머리해안이었다.
해가 슬슬 질 무렵 비자림은 혼자 걸어 들어갔다.
아이가 너무나 곤한 잠을 자는 바람에 남편이 주차장에 남은 것이다.
그날, 평일 저녁의 비자나무숲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점점 어둠이 밀려오는 비자나무숲에서 한 시간여
나는 느긋하게 노닐다 왔다.
혼자인 것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 없었고
한편으로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 저 바깥에 있다는 사실에 또 안도했다.

용머리해안은 돌아오는 날 비행기 시간이 남아 표지판을 보고 잠시 들른 곳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멈춘 곳에서 일생의 풍경을 만날 때가 있다.
눈바람 끝에 갑자기 찾아든 추위와 사나운 파도와
저멀리 인간들의 기척인 불빛이 자아내는 풍경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서귀포 항구 제주할망뚝배기집의 오분자기뚝배기 맛도 기가 막혔다.
가수 양희은이 들러 맛있게 식사를 하고 사인을 한 장 남길까요 했더니
그런 것 필요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다는 무뚝뚝한 주인 할머니다.
장염 때문에 여행 이틀 전 링거까지 맞은 아이의 사연을 말하고
맑은국이 없냐고 했더니 5분도 안되어 맑은 된장국을 끓여내 왔다.
주하는 오랜만에 정말 맛있게 밥 한 그릇을 국에 말아 뚝딱 비웠다.

바로 세 밑이었지만 어떻게 살아가자는 결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무엇무엇을 달라는 기도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살짝 치고 지나가는 생각은 더러 있었다.



(......)

세상을 다 바라볼 필요는 없으리
다만 그때 상처 하나 입을 열어
오늘을 오늘답게
오늘을 오늘로써 중얼거리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모두 썩은 얼굴을 하고서도
그것을 받아먹을 것이요
말귀 알아듣는 몇몇은
눈물이라도 글썽거릴 것이니
그런 날은 세상이
하나도 불쌍하지 않겠네(정철훈 詩 '오늘' 중)











댓글(31)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1-08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8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9-01-08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제주도 여행 참 좋으셨던 듯.
한 때 제주도에서 살아야겠다 오부지게 마음을 먹었는데, 5년 내 간다간다 해놓고 아직 이러구있어요.
양희은씨 , 계면쩍었겠는데요. 후후.

로드무비 2009-01-08 16:22   좋아요 0 | URL
양희은 씨가 계면쩍기나 했을라고요.
되려 (할머니의 그런 반응을) 좋아했겠죠.ㅎㅎ

제주도, 정말 좋더라고요. 말할 수 없이...^^

조선인 2009-01-08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자림이 제일 기억 나요. 그 앞 초등학교에서는 애들처럼 흙놀이하며 놀기도 했고.

로드무비 2009-01-08 16:13   좋아요 0 | URL
비자림 주변이 어땠는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성읍 민속마을을 지나다 우연히 발견하고 들렀는데...
알라딘 비자림 님이 생각나더라고요.

무해한모리군 2009-01-0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은 이런 느낌이군요. 저는 혼자 걷고 밥먹고 걷고 책보다 또걷고 숙소는 이장님민박이나, 카톨릭피안처 등등을 다녔는데요. 오분자뚝배기 정말 맛있지요 호호..

로드무비 2009-01-08 16:08   좋아요 0 | URL
그 '면형의 집' 표지판은 오며가며 유심히 봤습니다.
혼자만의 여행이나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아요.
그걸 깨달았습니다.^^



2009-01-08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8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1-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질 무렵 혼자 독차지하신 비자림,
비자림은 또 님을 독차지했겠죠.^^
전 5년전 여름 한낮이었죠. 엄마랑 옆지기랑 셋이서..
제주할망뚝배기집은 기억해둬야겠어요.

로드무비 2009-01-08 23:31   좋아요 0 | URL
몇 달 전 읽은 놀멍쉬멍 책을 가지고 갔는데
가본 곳은 저 식당과 이중섭미술관뿐이었습니다.
여름 한낮의 비자림도 환상일 것 같아요.^^

2009-01-08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8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1-0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돌개, 쇠소깍, 비자림... 너무나 좋은 곳 갔다오셨네요!!! 부러워요.

로드무비 2009-01-08 23:39   좋아요 0 | URL
사라진 님, 님의 서재 이미지 사진이 이 페이퍼와 님의 댓글과
잘 어울립니다.^^

바람돌이 2009-01-09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랑쉬오름.
바다도 좋지만 바다는 늘 보고 살아서 그런지 산쪽이나 오름쪽이 더 좋더라구요.
겨울 제주도 아 가고 싶어요. ^^

로드무비 2009-01-09 14:53   좋아요 0 | URL
- 가출하게 되면 제주도로 날라야지.
하는 생각을 몰래 했습니다.ㅎㅎ

오름을 중심으로 한 제주올레 코스도 터덜터덜 모두 걸어보고 싶더라고요.
그나저나 바다는 바단데 모두 왜 그렇게 다를까요?^^

인터라겐 2009-01-0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도는 모든게 쉬엄쉬엄가는 도시 같아요... 서울의 꽉막힌 도로도 없고.... 모든게 평화롭게 느리게 가는 도시요...

가족여행이 너무 즐거우셨겠어요..

로드무비 2009-01-09 14:49   좋아요 0 | URL
인터라겐 님, 그러니까요.
신호등도 있으나 마나 태연한 얼굴로 휙휙 다니는 차들, 사람들.

아픈 끝이라 주하가 골골거려서
실컷 못 마신 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ㅎㅎ

니르바나 2009-01-0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주도 다녀오셨군요.
결심과 기도가 없는 여행길, 무명무실무감한 무목여행이셨네요.
저도 붙잡는 사람만 없으면 또 가고 싶어요.

한라산은 잘 있던가요.
전철안 애물단지인 휴대폰으로 백록담이 주는 감동을
실시간으로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작년에 백록담에서 드린 전화 아직 못 받으셨죠. ㅎㅎ



로드무비 2009-01-09 14:55   좋아요 0 | URL
니르바나 님, 한라산이 포근한 눈이불을 덮고 있더군요.
극세사라나 뭐라나. 새로 장만했다고요.ㅎㅎ
친구 니르바나 님께 꼭 안부 전해달라고 했는데
제가 그만 깜빡했습니다.

작년에 백록담에서 주신 전화는 받아서 잘 저장해 뒀습니다.
핸드폰치고 화질이 얼마나 좋던지...
백만 년 동안 간직할게요.^,.~


니르바나 2009-01-0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托宿
못 보던 한자가 택호앞에 붙어 있네요.
뭔 말씀인가요?

로드무비 2009-01-09 14:56   좋아요 0 | URL
<술몽쇄언>을 옆구리에 끼고 자기 전 몇 장씩 읽었습니다.
어제 결국 다 읽었는데요.

가설라무네 '托宿'은 알라딘 방에 잠시 몸을 의탁한다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3=3=3


rainy 2009-01-09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끈한 점심 잘 먹고
지인과 한바탕 전화수다 잘 떨고
맛있는 커피까지 앞에 놓고 있는데
문득 눈물이 주루룩 (왜) 흐르게 만들어버린 로드무비님 글..

로드무비 2009-01-09 14:36   좋아요 0 | URL
rainy 님, 저도 친구가 편지에 옮겨 적어준 '오늘'을 읽고
울컥했습니다.
그 당장 시집 두 권을 주문했었지요.
'말귀 알아듣는 몇몇은 눈물이라도 글썽거릴 것이니'에
바로 우리 둘이 포함되는 걸까요.=3=3=3

oldhand 2009-01-0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시죠?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광주 우산 초등학교는 예전 부모님 사시던 동네 바로 옆에 있는 학교라서 시의 첫머리가 아주반갑네요. 자주 보던 그 운동장의 풍경이 시인의 눈에는 달리 보였을까요.
게다가 저도 지난 10월에 뒤늦게 얻은 휴가에 가족여행을 제주도로 다녀왔답니다. 이번에 처음 가본 쇠소깍이랑 비자림 저도 정말 좋았어요. 오후에 찾았던 비자림은 어찌나 한적한지, 우리 가족들 밖에 없었답니다. 아, 지금까지 사무실에서 궁싯거리고 있자니 그때 그 시간이 너무나 그리워 질라고 하네요.

로드무비 2009-01-10 12:26   좋아요 0 | URL
oldhand 님, 좀 전 님 방에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가슴은 진정시키고.ㅎㅎ
맞아요. 그쪽이 고향이라 하셨죠.
몇 년 전 제주도 여행길에는 우도 마라도 테디베어박물관
뭐 이런 식으로 들렀는데
올해는 얼핏 들은 풍월로만 갔는데 되려 아주 풍성했습니다.
비자림은 혼자라서 더욱 좋았던 것 같아요.
가끔 정말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거등요.

돈 많이 벌고 여유있게 일하셔서
어여쁜 콩주 자매와 함께 더 좋은 시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2009-01-11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1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6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