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전 어느 분과 댓글로 이야길 나누다가 '봉지쌀과 자존심'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간에 대필이든 윤문이든 그날그날의 봉지쌀에 목을 매다보면
아무런 감각이 없어지는 때가 있다고 썼다.
살다보니 어이하여 일생을 두고 이루어야 할 큰 꿈도 희미해지고(아예 없는 이도 있고!)
봉지쌀을 팔아 그날그날 연명하는 사람이 한둘일까?
봉지쌀 하니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다.
몇 년 전 다섯 권짜리 xxx영웅전 전집(역서)의 윤문을 맡은 적이 있다.
역자는 베테랑이라고 알려진 중년의 여성.
내는 책마다 공전의 히트를 치는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는 내일모레 결혼을 앞둔 총각이었다.
꽤 큰 프로젝트의 일이라 담당 편집자가 집으로 와 정식으로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서너 달 걸려 세 권을 마치고 제4권의 작업을 시작했는데,
뒤늦게 참고로 하라며 담당자가 오래 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동명의 전집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며칠 뒤 참고할 것이 있어 그 전집을 펼쳤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문장의 순서가 교묘하게 바뀌고 조사만 좀 달라졌을 뿐, 그 전집과 현재의 번역이 똑같은 게 아닌가!
아무리 내가 윤문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부분 뜯어고치고 손을 대긴 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놀라서 확인해 봤더니 나머지 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번역자는 끝까지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
내가 일일이 대조한 원문과 그녀의 번역문을 정리하여 넘겨주니 그제서야 입을 다물더라고 했다.
옛날 옛날에 나온 책이고 번역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감쪽같이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때까지 내가 작업한 분량만큼의 수고비를 받고, 그 작업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아마 그 번역자는 소문이 나서 다시는 일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일감도 끊겼다.
담당편집자는 사전관리를 철저히 하지 못한 책임을 진 것인지 몰라도
한 달 뒤 직장을 그만두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가슴 뜨끔했다.
내가 만약 모른척 그냥 지나갔더라면......
(그때 나는 한푼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물론 명백한 잘못은 짚고 넘어가야 하겠지만, 다른 이의 작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한마디 하는 건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남의 봉지쌀을 빼앗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