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옛날에 로드무비라는 아이가 살았어.
여동생이랑 남동생이 있었는데 셋 중 공부를 제일 못했지.
엄마는 학교에 올 일이 있어도 여동생과 남동생의 교실에만 갔지.
로드무비는 그런 이유로  6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뺨을 맞은 일도 있단다.

"네 엄마는 왜 학교에 오셔도 우리 교실엔 들르지 않고 그냥 가시지?"

운동장이나 복도, 교무실에서 몇 번 부딪힌 엄마가 동생들 담임선생님과만 인사하고
얘기를 나누니 서운하셨던 가봐.
선생님이라도 가끔 보면 아주 어리고 외로운 영혼이 있단다.

-- 가만 있자, 아직 어린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막 해도 되나?(자기검열)

이사를 온 후 학교에 다니기 싫다고, 예전 동네로 돌아가자고 울부짖는 아이를
달래며 재우다 보니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나하나 끄집어 내게 되었다.
인생에서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시절이 없으니 내용도 하나같이 구슬프다.
심지어는 내가 나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눈물을 글썽일 정도.
(기가 막혀서 '빵구'도 안 나온다!)

재밌는 건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일화가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것이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검열의 과정을 반드시 밟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아이가 선생님이나 어른 들에 대해 가지고 있을 나름의 기대와 환상이 있을 텐데
깨트리면 안 되지 않나!' 하는 문제.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가 인생을 더욱 회색빛으로 느끼면 어쩌지 하는 우려.
이런 염려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누구 딸 아니랄까봐 아홉 살에 지나치게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는 딸.

예를 들어보자.
어제가 결혼기념일이라고 단단히 착각한 나, 딸아이를 졸랐다.

"생각해 보니 오늘이 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이네. 작년에는 쌍둥이 문구점에서
예쁜 크리스털(사실은 플라스틱) 장식품을 사서 선물했잖아. 올해는 뭐 없어?"

"생각 못했는데!  엄마 뭐 먹고 싶어?"

"돼지갈비!"

"그럼 7000원 줄게 가서 돼지갈비 사먹어!"

"나 혼자?"

"응. 지갑에 돈이 8000원밖에 없어!"

"그럼 주하야,  아빠에게 전화해서 엄마 근사한 선물 사오라고 하면 어때?"

"아빠 선물은 준비했어? 결혼은 엄마아빠 둘이 한 거잖아."

"......"(할 말이 있을 리 없음!)

밤마다 다시 이사 가자고 울부짖는 주제에 한편으로는 이렇게 똑 부러지는 마이 도러다.
이런 아이에게 엄마의 신통할 것 없는 옛날 이야기를 밤마다 계속 들려주어야 할까?





딸아이의 작년 선물 크리스털(!) 장식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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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12-0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따님은 너무 똑똑해서, 아마도 로드무비님이 따님께 얘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

그나저나

'인생에서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시절이 없으니 내용도 하나같이 구슬프다.
심지어는 내가 나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눈물을 글썽일 정도.'

흑흑 저도 그래요.

저는 자의반 타의반--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관심 얻으려고 해도 눈에 안 띄는 아이였다는 것 -_-

해리포터7 2006-12-0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주하양 말솜씨에 넋이 나갔다가 왔네요..한방 먹었어요..ㅋㅋㅋ
저도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다보면 항상 말문이 막힐때가 있더군요..아들이 엄마는 그럴때 어떻게 했어요? 하면 우물쭈물.주섬주섬 구렁이 담넘어가듯 올바르게 끼워맞추려고 노력했던 지난날이 떠오르네요.ㅎㅎㅎ
로드무비님.12월에 결혼하셨어요? 저도 이달에 결혼했어욤..아주 추울때 눈도 흩날렸었지요..

로드무비 2006-12-06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 7님, 반갑습니다.
결혼식 마치고 후련해서 만세삼창을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ㅎㅎ
어린 시절 이야기를 건너뛰어 소녀 시절 이야기를 해줄까도 했으나
그 역시 신통치가 않네요.
엄마의 길은 멀고도 험해요.^^

딸기 님, 리얼리?
안 믿겨서요.( '')
저 위로해 주려고 하시는 말씀이죠?
그게 아니라면, 아이고, 반갑습니다!^^

Mephistopheles 2006-12-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천하의 로드무비님을 제압하는 주하의 모습..^^

마냐 2006-12-0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에서 늘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착각하면서, 욕구불만으로 사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 그리고 주하의 어록은 예전에도 야무졌지만 갈수록 일신우일신.

플레져 2006-12-0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크리스탈 장식품 생각나요^^
주하의 저 무심한듯 쿨하게 톡 쏘는 한마디, 오랜만에 듣습니다.
주하 말대로 책장수님 선물 준비는 하셨어요? =3=3

로렌초의시종 2006-12-06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억지로 엄마에게 떠받들려서 주인공 노릇을 해본 경험에 의하면, 세상 모든 건 한때의 꽃날일 뿐이라는 진리가 남죠. 단지 나를 떠받들어주는 사람이 내 눈에 보이느냐 안보이느냐의 차이만 있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주하는 정말 최고에요!!!ㅋㅋㅋ

mong 2006-12-06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어느새 일년~
안부 못 전해 죄송스럽습니다
잘 지내시죠? ^^

sooninara 2006-12-06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슬픈 이야기네요. 주하도 전학가서 힘들겠어요.
저흰 다행히 새학기 시작과 맞추어 전확 와서 그나마 덜 뻘쭘했는데..
친하던 친구들..특히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얼마나 외로울까요?

저도 인생에서 주인공인 적이 없어서...그래도 로드무비님은 주인공으로 보이시는데..아니라고 하시니 놀랐습니다.

7,000원 돼지갈비의 뒷이야기도 올려주세요^^ (이쁜 주하~~~엄마가 못당하시네요)

2006-12-06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6-12-06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얘기가 이런건가요? ^^ 정말 극적인 반전입니다. 엄마의 옛날 눈물은 딸의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딸이 보기엔 우리 엄마가 벌써부터 늙은건가 싶고... 하지만 엄마의 과거보다는 자신의 현재가 훨씬 더 소중한, 아마도 우리 모두처럼 (감히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으나.... 헤...) 따님도 벌써 사람인게지요. 그리고 주하 마음 쓰임도 참 넓네요. 8000원 중에서 7000원이나 엄마한테 줄 생각을 하다니.... ^^

2006-12-06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6-12-0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1학년 따님과 이런 대화가 가능한 님이 부러워요. 가끔 저도 이런 대화를 꿈꿔요. ^^;

마노아 2006-12-07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 발언에 놀라는 중이에요. 순수하면서 날카로운 질문이었어요.^^ 헌데 로드무비님은 그 선생님이 용서가 되셨나요? 전 읽으면서도 부르르였는데..ㅡ.ㅜ

니르바나 2006-12-0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따님 자랑하시려고 쓰신 페이퍼지요.^^
그런데 6학년때 담임선생님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군요.
엄마가 찾아오시지 않은 일이 뺨맞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로드무비 2006-12-0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 님, 뭐 다 아시면서 그러셔요.ㅎㅎ
그 선생님은 존함과 얼굴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좀 비뚤어진 형태의 관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어리고 외로운 영혼'이라고 썼고요.
제가 아직 어린데도 분하다기보다 그걸 느꼈어요.^^

마노아 님, 그 선생님이 그 전에 제 성적을 확 올렸어요.
제가 머리도 노력도 별로인데 이상하게 높은 점수를 부여해 주면서
시험 쳐서 그 점수가 안 나오면 혼난다고 다그쳤거든요.
아마 자신의 공을 몰라준 부분에 대한 섭섭함이 포함되었겠죠?
딸아이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많은 이야기가 생략되어서.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되긴 해요.^^;;

하루 님, 제가 좀 모자라는 역할을 맡았죠.
아니 참, 진짜 모자라는 거지.ㅋㅋ
어딜 빠져나가려고!
이런 대화가 저도 즐겁습니다.^^

어린 딸과 도란도란 님,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순간이
아이가 제 품에 쏙 들어오는 그때라고요?
저도 그걸 느낍니다.
아이가 더 안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무심코 하다가
놀랄 때가 있어요.
영화에서 보면 어린 시절에 주인공이 뛰어놀던 모습
회상 장면으로 보여주잖아요.
볼 때마다 뭉클합니다.
저도 어여 빨리 카메라 고칠래요.
한 장이라도 어린 딸아이 모습 더 찍어놔야지.
전 따님의 얼굴이 무지 궁금합니다.^^

에로이카 님, 이런 페이퍼를 위해서 이런 제목의
카테고리를 만들었는지 몰라요.ㅋ
어떤 이야기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냥 넘어가고 싶어요.
중요한 문제를 일단 발설은 했으니 되얐고, 하는 심리.
딸아이는 엄마가 불우했을수록 열광합니다.
아주 못됐어요.
8000원 중 7000원은 그리 감격할 것도 없는 게,
중국요리값 몇만 원도 척 낸 아인걸요.
어른처럼 돈을 지갑에서 꺼내 지불하는 그 기쁨을 맛보고 싶어서.^^



로드무비 2006-12-0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기념일 착각에 선물 강요 님, 그래요, 전 그런 인간입니다. 버럭=3
처음엔 좀 망가져 줄까 하는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되얐어요.
태권도장은 바로 등록해 동주랑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으로 매진할 듯합니다.
좀전 님의 사연 읽고 왔어요.^^


수니나라 님, 아이가 울고불고해서 지난주 일요일
남자친구와 엄마를 초대했어요.
가고 난 밤에는 통곡을 하더군요.
단칸방이라도 옛 동네에서 살고 싶다고.
돈이 없어서 이사 못 간다 했더니......
다행히 어제오늘은 좀 나아졌습니다.
어제가 결혼기념일이었는데 회초밥과 족발(메뉴가 좀 웃기죠?),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먹었습니다.
주하는 제게 선물이라며 3000원을 내밀더군요. 받았습니다.^^


mong 님, 별 말씀을!
그럭저럭입니다.
님도 잘 지내시죠?^^

로렌초의 시종 님, 그러셨군요. 어린 시절에......
어쩐지 귀티가 나더라니.ㅎㅎ
주하의 냉철한 대답에 움찔했답니다.
그러면서도 전 박박 말도 안되는 제 의견을 우깁니다.
존경받는 어머니상은 이미 글렀다고 봅니다.
아무튼 주하 대답 멋지죠?=3=3=3

플레져 님, 선물은 무슨.
제 존재 자체가 선물인데!=3=3=3
주하는 평소에는 맹하다가 가끔 생각도 못한 대답으로
나를 놀래킵니다.
주하의 결혼기념일 선물 기억하시는군요.^^

마냐 님, 헤헤, 오랜만에 한마디 건진 거랍니다.
전 기다렸다는 듯 페이퍼로 기록해 올리고.
그리고 어딜 가나 항상 주인공이었을 것 같은 마냐 님인데
인생의 모든 형편과 사정에 대한 통찰이 눈부십니다.^^


메피스토 님, 천하의, 뭐, 뭐라고요?
큰소리로 말씀해 주세요. 잘 안 들려요.=3=3=3










2006-12-07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07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07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2-07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심의 괴로움 님, 헤헤, 그런 건 아니고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
일없이 들어와 한두 시간이니 버르장머리를 좀 고치고 싶었죠.
과격한 방법으로.

그런데 그 멋진 분을 왜 고까워들 할까요?
깎아놓은 밤송이 같은 마스크여서?

카메라 고쳐 오지 않으면 한 대 사려고요.
사는 게 더 낫다고 군시렁대며 당췌 움직이덜 않네요.;;

어리고 외로운 영혼 님, 내일 아침 님 방에 갈게요.
댓글 쓰려니 환경이 안 받쳐 주네요.^^

'제가 보기에도 존경받는 어머니 상은 글렀다'는 분,
뭐시라요?
이리 좀 와보시요.=3
ㅎㅎㅎ 우스워 죽겠네요.



건우와 연우 2006-12-1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한 주하가 이제는 좀 새동네에 적응이 되었을까요?
중국에서 돌아온후로 며칠을 게으름을 부리다가 오늘에서야 택배를 부칩니다.
일찍 돌려드렸어야하는데 이래저래 늦어졌어요. 죄송...
주하에게 늦게나마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응원이 필요없이 이미 기운을 차렸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요...^^

산사춘 2006-12-12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런 선생님들 덕분에(?) 어른들에 대한 환상이 깨져서 넘 고생했었어요. 으... 그 차별과 폭력이란... 부모님한테 말하면 더 혼나고... 로드무비님이 계시니 주하는 걱정없어요!

로드무비 2006-12-17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 님, 아이고 그리 말씀해 주시니......
이상한 어른이 안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훌륭한 사람은커녕!!!)

건우와 연우 님, 조금 나아졌습니다.
겨울방학 때 남자친구와 교환숙식을 며칠씩 하기로 했거든요.
서로의 집에서.
그 기대로 삽니다.
택배상자는 잘 받았습니다.^^

2006-12-16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예진 2006-12-2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간 뒤 길어도 일주일?? 정도면 친구 잘~~~사귈거예요.
그때까지만 조금 수고하시면 ^^ 금방 잘 지낼거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