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유럽 출장간다 - 글로벌 마켓을 누비는 해외영업 실전 매뉴얼
성수선 지음 / 부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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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상자를 열고 책 표지를 봤을 때 당황했었다. 사진 잘못 찍었다. 실물이 훨씬 예쁘시다. 작년 여름, 딱 한번 그녀를 봤었다. 영화<화려한 휴가>가 상영 중이었을 때 종로의 한 영화관 앞에서 뵈었다. 노랗게 염색한 긴 머리를 하셨는데, 밝은 머리색만큼이나 밝게 웃는 분이셨다. 처음 뵈었을 때 군살 없는 몸매에 뽀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는데, 같이 모였던 사람들이 먼저칭찬 하시는 통에 직접 말해 볼 기회가 없었다. 아쉬웠었다. 책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일찍 리뷰를 써보려 했건만 또 늦었다. 재빠른 서재이웃들이 리뷰를 먼저 써버린 거다.

책 띠지에는 ‘해외영업 토탈 프레젠테이션’이라고 쓰여 있다. 난 해외영업보다 토탈에 방점을 찍으련다. 일상의 솔직한 이야기들이 많고, 군더더기는 없으며 청량감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단숨에 읽힌다. 서재를 통해 접해 왔던 글도 있었고 평소 어투를 손대지 않은 점이, 더 편히 읽게 했다. 처음 접하는 분도 빨리 읽을 듯싶다.

책을 덮고 나니 해외영업이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자기 이야기를 타인도 가깝게 느끼게 하는 건 쉽지가 않은데 대견하다. 해외영업이라는 낯선 이야기를 어찌 그리 재미있게 풀어주는지, 진즉에 나오지 않은 게 섭할 정도다. 진로 상담 책이나, 경력 좀 있는 분들을 보면 자기 분야에선 다들 말 잘했다. 그리나 글로 풀어주는 것까지는 기대하기 힘들다. 자기만족이나 성취감 표출만 표 나게 쓴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은 흥미도 사라지게 하고, 그 분야사람들은 정작 콧방귀만 나오게 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그녀가 멋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키운 게 8할의 출장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밝고 겸손한 태도냐. 오랜 시간 같은 일하다 보면 지겹기도 할 텐데, 그걸 책으로 써볼 생각을 만큼 긍정적이다.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과 늘 촉촉한 호기심 때문인 것 같다. 그 수분 유지의 비결은 뭘까. 아마 외국인도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친화력을 포함해 인문사회과학, 예술 등 그녀의 방대한 지식과 그것을 절묘하게 아우르는 유쾌한 글쓰기 덕인 것 같다. 그녀는 출장 중에도 일기를 쓴다고 했다. 나도 매일 쓰면 저렇게 될 수 있는 걸까.

너무 칭찬만 한 것 같다. 혹 내 리뷰를 보고 오해하실 분들이 생길 가 걱정된다. 친밀한 사이거나 홍보세력으로 오인 받지 않을 까 싶다. 실은 못 쓴 리뷰지만 홍보세력 되고 싶다. 그녀와 자매처럼 친하다고 말해보고 싶다. 그러나 일개 독자의 희망사항 뿐, 같이 한 적은 작년 서재 off 모임이 마지막이었다. 내 맘대로 리뷰 쓰고 희희낙락하는 리뷰어 주제에 저자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건 처음이다. 그녀에게 반해서 힘들다. 책에서 말하던 커뮤니케인션 화살에 찔리고 영업철학에 매료됐다. 서재를 통해서 그녀의 행적들을 늘 훔쳐보고 있어서 그런지 꼭 내 언니 책 같다.

<몰입>을 쓴 황농문 교수가 말했다. 행복한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내 눈에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 트렁크의 바퀴가 닳도록 출장을 떠나는 것 같다. 일이 재미있고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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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7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7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사이코 테라피스트의 심리여행
권문수 지음 / 글항아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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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는 분들마다 내가 웃는 상이라고 해줬다. 하지만 그건 날 몰라서 하는 소리다. 위장된 가면일 뿐, 속은 울상이다. 겉으론 걱정 따윈 내 알바 아니라는 듯 헤프게 웃고 있지만 속사정은 나도 헤아려 주기가 버겁다. 여럿이 있을 땐 코빼기도 비추지 않지만 혼자 있을 땐 숭한 것들이 마구 뛰쳐나온다. 무의식의 속된 것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할 때, 많이 무서워했다. 옛날에는 괴리감에 죄책감, 우울증까지 찾아왔었다. 속된 것들은 지금도 기회만 닿으면 뛰쳐나온다. 하지만 이젠 그것을 보듬는 방법을 알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실수하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희노애락을 느끼지 못하면 그는 분열성 성격자임을 의심해 봐야 된다. 희노애락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감정 순환 같은 거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노련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게 됐을 뿐, 희노애락은 죽을 때까지 순환한다. 그리고 평생을 외로워하게끔 되어있다. 절대자도 극복하지 못할 외로움을 인간이 극복할리 만무하다.

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책을 들춰봤는지 모른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정신과 전문의 수가 현장에서 만난 정신과 전문의보다 많다. 심리학자가 저술한 책까지 포함하면 참으로 많이 읽었다. 범죄 심리에서부터 심리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쓴 그저 그런 책까지 읽었었다. 종교가 없는 통에 위로 받아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책이었다. 위로를 받던가, 억지 합리화가 필요 할 때도 책을 잡았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의 안젤라가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듯이 말이다.

최근에 <샘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 읽었다. 책을 덮자마자 좋은 책이라고 침 튀기고 다녔다. 저자는 임상심리학자 대니얼 고틀립이었다. 책의 추천사에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이런 글을 써줬었다. “외과의사의 치료도구가 수술용 메스라면 정신과의사의 치료도구는 자기 인격이다.”라고. 오늘 좋은 인격자한 분을 뵈었다. 의사는 아니지만 확실한 치료도구를 가지고 있던 분, 정신건강 테라피스트 권문수씨다. 이 책을 극찬하기에 앞서 미국이 테라피스트에 대해 소개 좀 해야겠다. 미국은 정신과 치료에 있어, 정신과 의사와 테라피스트가 따로 있다. 이들 간에 업무분담은 철저히 다르고 영화에서 보게 되는 정신과 전문의의 긴 상담은 테라피스트 역이란다. 의사는 약 처방만 해도 바쁘단다. 고로 자신이 환자와 직접 대면을 하는데 이 것이 책 내용의 주다. 끝나는 장마다 정신질환에 대한 부가설명이 있는데, 이해가 잘 되도록 쉽게 씌어 있다.

책에는 온통 아프고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뿐이었는데 들으면서 많이 위로 받았다. 저자가 자신의 실수도 고백하고, 환자들을 위해 힘쓰고 속상해 했던 이야기를 글로 잘 썼다. 다 읽고 나니, 테라피스트란 직업이 어렵지만 보람도 크겠구나 싶었다. 나도 그 바닥으로 옮겨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해봤다. 그러나 현실은 마뜩치가 않다. 이러니 또다시 책을 펼칠 수밖에.

책에선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바꿔놓는 것을 정신분석학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환자의 트라우마를 직면시키고, 행동안정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한다. 첫째는 경청이고, 둘째는 전공을 통해 배운 진단과 행동수정 도구였고, 마지막은 저자의 넉넉하고 겸손한 자세였다. 권문수씨는 상대의 마음 진심으로 위로해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음 책이 기대된다. 웃을 일도 없는데 웃고는 있는 웃기는 애독자는 오늘도 기다린다.


ps. 정신과 전문의인 프랑수아 를로르의 <정신과 의사의 콩트>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을 듯 하다. <정신과 의사의 콩트>는 임상적 내용이 많다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는 성격장애 쪽의 이야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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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링, 천국을 바라보다 - 시즌 3 엘링(Elling) 3
잉바르 암비에른센 지음, 한희진 옮김 / 푸른숲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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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아. 안녕하니? 네 편지 잘 받았다. 네게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니, 우편함에 군사편지가 꽂혀 있더구나. 봉투를 뜯어보고 나서야 서로 엇갈린 내용으로 써 보냈음을 알았다. 나는 세상의 따뜻함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너는 세상의 냉담함에 대해 썼더구나. 몰라서 전화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그 편지를 읽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이 못난 놈아. 인터넷 광장에 내보낼 듯한 그 것을 읽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했다. 화냄을 겁내지 않는 게 다행스럽고, 얼마나 외로웠으면 저리 됐나를 생각했다. 네 성급한 결론은 우려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웃게도 되더구나.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실은 나도 외로움 잘 타고, 낯선 체제엔 적응 잘 못하는 사람이거든. 그러면서 같이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오래 전에 읽은 <엘링, 천국을 바라보다>의 주인공 엘링이다. 엘링은 30년간 어머니와 단 둘이서만 지내다가 무척 폐쇄적으로 성장한다.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또렷한 나머지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인물. 어머니를 여읜 후 그는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바깥 세계와는 철저히 단절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책을 많이 읽는 아주 철학적인 인물이다. 그는 멍청하지도, 남보다 뒤처지지도 않았다. 단지 그의 지적인 능력이 거의 완벽하게 고립된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 (p.6)

그는 바보가 아니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해 바보처럼 느릴 뿐이지. 그는 호기심을 잃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사회적응을 시작해. 그 에피소드들이 신묘하게 우습고 기묘하게 슬프고 영묘하게 감탄스럽다. 두려워하면서도 도전하는 모습도 좋지. 지금의 너처럼 말이다. 낯선 곳도 한계선 긋지 않고 도전하는 너처럼.

책 속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을 처음 봤을 때는 고개가 약간 기울 수밖에 없었다. 미혼모인 레이둔과 욕정을 다 보여주는 키엘의 만남이 그랬지. 알고 보니 유명시인 알폰스와 엘링의 만남도 그랬고. 책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다 읽은 후엔 고개 끄덕이게 된다. 그들의 엉뚱한 행동들은 일반적인 사회약속들을 지키지 않아. 엘링의 상상도 과대망상적인 면이 많아. 그걸 풀어내는 저자가 대단한 거지. 노르웨이 문학작품은 처음 접해 보는데, 알고 보니 저자가 꽤 유명한 사람이더라. 서문 말미쯤에 밑의 내용이 있었어. 그 걸 보니 책장 넘기기도 전에 저자가 왜 유명한지 알겠더라고.

독일의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엘링을 주제로 삼아 다방면으로 토론을 벌여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다. 우리가 좀더 안전한 지면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제외햐면 그는 우리들과 여러 변에 닮아 있다. 한 개인의 삶은 다양한 진단과 판정이 가능하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엘링이라는 인물을 창조한 지 십오년째가 되는 지금, 엘링에 대한 팔백 페이지의 기록이 방향을 잃은 서구사회 인간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이야기로 읽혀질 수 있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p.8)

이 책이 원래 시즌1부터 4까지 있는 연작소설인데 내가 읽은 것은 시즌 3편이었어.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매끄럽고 다른 시즌은 어떨까 더 궁금하게 만들지. 그래서 기회가 되면 다른 시즌들도 더 읽고 싶어. 아마 내가 돌아올 때쯤이면 읽고 있지 않을까 싶다. 편지 못 받았다고 너무 괘념치 말고, 엘링처럼 씩씩히 웃으며 돌아와. 마중 나갈 테니. 그럼 몸 건강히 안녕히.


2008년 2월 어느날
누나가.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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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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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아. 안녕. 잘 지내고 있지? 추위로 몸은 고단하겠지만 출소할 날을 기다리며 잘 견디리라 생각한다. 아버지한테 네 소식을 들으니 눈물이 앞을 가리더구나. 곧 돌아올 거면서 무슨 편지 타령이냐? 내 너를 어여삐 여겨 한 통 더 보내주마. 하지만 펜을 들려니 이 말을 먼저 해야 할 말을 할 것 같다. 네가 가고 난 다음, 집구석을 둘러보니 화가 나더구나. 누나가 정리정돈에 대해 유난떠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너도 알거다. 하지만 너랑 지내보니 깔끔함과 까칠함을 동시에 가져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면 각오해라. 네가 지낸 훈련소보다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그렇고 너에게 무슨 내용을 써 보낼까 생각하니, 난감하더구나. 네가 가고 난후 달라진 건, 약간의 자유 말고는 없었다. 원래부터 해오던 걸 되찾은 것뿐이니 아무 감흥도 없었다. 직장 가서 일하고 휴일엔 책 읽는, 그야말로 일상 반복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권, 감동받은 책이 있긴 했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대니얼이라는 정신상담 전문가가 외손자 샘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뤄진 책이다.

저자 대니얼은 자동차사고로 전신마비환자가 된다. 사고 후 삶을 보는 눈이 변하는 건 당연했다. 우울증과 몸의 불편함이 그를 옭아매지. 전신마비로 누워있던 어느 날, 그를 향해 어떤 여성분이 통고성 상담을 해버린다. 대니얼은 그 상담을 통해 자신의 역할과 희망을 알게 된다.

내가 걸을 수 있는지, 춤을 출 수 있는지,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 따위는 그녀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바로 앞에서 자기 고통을 듣고 있는 사람의 끔직한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고통이 전부였고, 오직 고통받는 자신을 내가 도와주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말이다. 샘. 그녀의 얘기에 귀기울이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거였다. 비관적인 내 처지도 잊을 수 있었다. 사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오로지 그녀의 고통에 집중했고, 그녀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p.90)

그는 서로를 살렸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이미 생의 의지를 내재한 사람이었다. 상담을 통해 밖으로 표현하게 될 줄 안거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욕창에 대해 표현하는 대목에서도 볼 수 있거든.

“상처가 아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 몸속에 다 있습니다. 필요한 영양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스스로 알아서 상처를 치유하죠.” (p.53)

똑같은 시련에도 누구는 무너지고 누구는 주저앉는다. 어린 생각 때문에 뒷날이 티끌이 좀 묻고 더디게 움직일 수밖에 없더라도 나는 때타고 느린 움직임도 멋지더라. 동생아. 이건 내게 하는 말이자 너에게 하는 말이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71쪽에 쓰인 인생의 지도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다. 많은 책에서 보았던 내용인데, 또다시 보게 되니 부끄럽더구나. 편지로 전하는 것 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직 열흘이나 남았구나. 경험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아직은 자신 없다.

샘은 세상과 소통하는데 장애를 가진 자폐아다. 대니얼은, 그 손자를 위해 세상사는 방법을 서두르지 않고 따뜻하게 말한다. 아무래도 자기를 계속 돌아봐야하는 직업을 가지다 보니 더 다져진 것일 지도 모르지. 책의 추천사 중에 정혜신씨가 쓴 글이 그렇더구나. 

외과의사의 치료도구가 수술용 메스라면 정신과의사의 치료도구는 자기 인격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요체는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다. (p.242)

책을 다 읽고 보니, 누군가에게 글을 남겨 주는 것도 참 의미있단 생각이 들었다. 일이 바빠 편지 못해줘서 미안하다. 건강히 잘 지내서, 열흘 뒤에 보자꾸나.


2008년 2월 어느 날.
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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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빵빵, 파리
양진숙 지음 / 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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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직장을 나가기 시작했을 때, 건강하던 위장과는 굿바이 해야 했다. 불규칙한 수면에 절제 없는 야식습관은 소화불량을 불러왔다. 요리에 대한 무관심과 궁상스러움도 위장 버리는 데 한 몫 했다. 그렇다고 밥 챙겨먹기는 더 귀찮은 일. 빵으로 끼니 해결 하는 날이 많았다. 그 다음 순서는 후회다. 입 속에 구겨 넣고는 이딴 빵 쪼가리 먹으려고 돈 버냐 싶어 우울해한다. 그렇다고 뱉기는 뭣해 다 삼키는데, 삼켜보면 배부르다. 그 후엔 이대로도 살만하지 않더냐하며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배부른 돼지의 무념무상, 소화불량, 게으름의 반복과 반성. 그래서 내게 빵이라 하면 게으름과 우울함이 먼저 떠오른다. 달콤한 중독을 숨긴 우아한 케이크, 생존권을 부르짖던 프랑스 혁명의 빵, 인생을 논는 눈물 젖은 빵과는 많이 다르다.

해서 한 동안 빵집 근처는 가지도 않았다. 빵 관련 책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 이 책을 사고 말았다. 이유는 북 콘서트라는 걸가기 위해서. 단지 그뿐이었다. 안 읽고 가도 그만이지만, 읽고 가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다 읽었다. 결론은 만족이다.

빵 좀 굽고, 쿠키 맛보러 다니고, 파리 좀 싸돌아다닌 얘기가 다였더라면 중간에 집어 던졌다. 하지만 저자의 얘기엔 끝까지 다 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마카롱을 훔쳐 먹던 이야기, 조교로 일하던 어려움, 인생의 후회 같은 거 말이다. 글에서 착하게만 보이는 빵순이의 악바리 근성을 읽었다. 순진한척, 못 본 척 해도 같은 가면을 쓴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그래서 더 애정 가는 책이 돼버렸다.

30년 이상 서민들을 위해 케이크를 굽는 것이 행복이었지만, 이젠 틈틈이 쉬면서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쉐프는 대뜸 자신이 불행해보이냐고 물었다. 감히 나의 잣대로 행복을 가늠하고 저울질할 수 있겠냐고 대답했지만, 그가 아무리 선한 의도로 케이크를 굽는다고 해도 손님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래도 행복할까? 그래도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는 것들을 눈앞에 놓고도 절대로 손을 뻗지 않는 그를 만나고 그곳을 나서는데 갑자기 눈이 매워지는 것은 왜일까. (p.65)

제과점에 대한 소개 글은 잘 모르겠다. 유럽여행은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라서 말이다. 파리공항이나 찾아가게 될지 모르겠다. 제과점 주인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녀의 인생 배움도 함께 할 수 있다. 게 중엔 너무 잘 아는 척 하는 통에 반은 픽션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픽션이면 뭐 어떠랴. 픽션이라도 믿음을 가지고 그려 가면 논픽션이 되는 거지.

책 중간 중간에 나오는 파리를 닮은 사랑 편이 읽을 만했다. 양진숙이라는 사람 빵 만들기만 잘 하는 게 아니라 글도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같은 빵순이란 소리를 듣는데 난 이런 달콤 고소한 글을 쓸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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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theme 2008-02-1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이라면 저도 사죽을 못습니다. 요즘도 매일 아침은 회사식당에서 빵으로 해결하죠. 만들지도 못하고 글도 잘 못쓰지만 빵은 잘 먹고 살아요. ^^;

모과양 2008-02-17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티테마님은 빵돌이(?) ㅎㅎ 주식이 빵이 아니시니까, 맛있으신 거죠. 저처럼 매끼가 서양화되면 위가 황폐화되요 ㅠ.,ㅠ 글을 잘 못쓰신다는 말씀은 겸손이라고 봐요^^

antitheme 2008-02-18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제별명을 알아내시다니...전 독일 출장가서 거기 사람들한테 체질이란 소리들을 정도로 빵을 좋아하죠.

모과양 2008-02-20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안티테마님 좋아하시는 걸 모르시는군요.ㅋㅋ 그 분의 모든 걸 알아두는 건 팬으로써 당연한 것 아닌지요? 실은 그냥 때려 맞췄어요ㅎㅎ 어디서든 둥글둥글하고 따뜻한 이미지에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