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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에게 보내는 편지
대니얼 고틀립 지음, 이문재.김명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동생아. 안녕. 잘 지내고 있지? 추위로 몸은 고단하겠지만 출소할 날을 기다리며 잘 견디리라 생각한다. 아버지한테 네 소식을 들으니 눈물이 앞을 가리더구나. 곧 돌아올 거면서 무슨 편지 타령이냐? 내 너를 어여삐 여겨 한 통 더 보내주마. 하지만 펜을 들려니 이 말을 먼저 해야 할 말을 할 것 같다. 네가 가고 난 다음, 집구석을 둘러보니 화가 나더구나. 누나가 정리정돈에 대해 유난떠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너도 알거다. 하지만 너랑 지내보니 깔끔함과 까칠함을 동시에 가져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면 각오해라. 네가 지낸 훈련소보다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그렇고 너에게 무슨 내용을 써 보낼까 생각하니, 난감하더구나. 네가 가고 난후 달라진 건, 약간의 자유 말고는 없었다. 원래부터 해오던 걸 되찾은 것뿐이니 아무 감흥도 없었다. 직장 가서 일하고 휴일엔 책 읽는, 그야말로 일상 반복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권, 감동받은 책이 있긴 했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대니얼이라는 정신상담 전문가가 외손자 샘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뤄진 책이다.
저자 대니얼은 자동차사고로 전신마비환자가 된다. 사고 후 삶을 보는 눈이 변하는 건 당연했다. 우울증과 몸의 불편함이 그를 옭아매지. 전신마비로 누워있던 어느 날, 그를 향해 어떤 여성분이 통고성 상담을 해버린다. 대니얼은 그 상담을 통해 자신의 역할과 희망을 알게 된다.
내가 걸을 수 있는지, 춤을 출 수 있는지,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 따위는 그녀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바로 앞에서 자기 고통을 듣고 있는 사람의 끔직한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고통이 전부였고, 오직 고통받는 자신을 내가 도와주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말이다. 샘. 그녀의 얘기에 귀기울이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거였다. 비관적인 내 처지도 잊을 수 있었다. 사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오로지 그녀의 고통에 집중했고, 그녀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p.90)
그는 서로를 살렸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이미 생의 의지를 내재한 사람이었다. 상담을 통해 밖으로 표현하게 될 줄 안거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가 욕창에 대해 표현하는 대목에서도 볼 수 있거든.
“상처가 아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 몸속에 다 있습니다. 필요한 영양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스스로 알아서 상처를 치유하죠.” (p.53)
똑같은 시련에도 누구는 무너지고 누구는 주저앉는다. 어린 생각 때문에 뒷날이 티끌이 좀 묻고 더디게 움직일 수밖에 없더라도 나는 때타고 느린 움직임도 멋지더라. 동생아. 이건 내게 하는 말이자 너에게 하는 말이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71쪽에 쓰인 인생의 지도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다. 많은 책에서 보았던 내용인데, 또다시 보게 되니 부끄럽더구나. 편지로 전하는 것 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직 열흘이나 남았구나. 경험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아직은 자신 없다.
샘은 세상과 소통하는데 장애를 가진 자폐아다. 대니얼은, 그 손자를 위해 세상사는 방법을 서두르지 않고 따뜻하게 말한다. 아무래도 자기를 계속 돌아봐야하는 직업을 가지다 보니 더 다져진 것일 지도 모르지. 책의 추천사 중에 정혜신씨가 쓴 글이 그렇더구나.
외과의사의 치료도구가 수술용 메스라면 정신과의사의 치료도구는 자기 인격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요체는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다. (p.242)
책을 다 읽고 보니, 누군가에게 글을 남겨 주는 것도 참 의미있단 생각이 들었다. 일이 바빠 편지 못해줘서 미안하다. 건강히 잘 지내서, 열흘 뒤에 보자꾸나.
2008년 2월 어느 날.
누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