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멀지 않은 곳에 청소년 문화센터가 개관했다. 구청에서 나름 공을 많이 들였는데 매주 토요일마다 유명 강사들의 강연일정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만난 나의 곰아저씨, 정재승 교수님의 강의였다.
그의 존재를 알게된 건, 고1때 paper라는 잡지에서 였다. KAIST 물리학과 대학생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소설과 영화를 좋아하는 문학소년이었는데, 앞으로 어떤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인터뷰였다. 벽에 기댄 포즈 사진로 찍혀있었는데, 큰 키에 동글동글한 인상이 22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남아있다.
고3때 야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습관적으로 TV리모컨을 눌렀었다. YTN 10시 뉴스 마지막 부분에서 그 주의 이슈와 과학을 섞어 설명하는 코너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그가 나와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큰 덩치에 비해 가려린 목소리로 조근조근 설명을 해서, 매주 목요일마다 챙겨봤었다.
그의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를 도서관에서 찾아 읽고, 신간 나올때 마다 사서봤었다. 컬럼에서 그의 이름 옆에 기재된 대학소속이 바뀔때 마다 나의 성장인양 흐뭇했다. 결혼도 하고, 딸가진 아빠가 되었다는 소식까지 알고 있었다. (저런 아빠를 둔 세 딸들은 본인이 얼마나 행운아인지 알지 모르겠다)
대전에서 막 올라왔다며 강연장에 들어섰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방에 계속 살고 있었더라면, 이분을 만날 수 있을까? 지방 상관없이 강연장을 쫒아갈 체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상관없겠다. 하지만 게으른 나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 못하다. 사는 곳이 중요한 이유다. 인터넷방송으로 시간적, 물리적 제약이 없어진지 오래지만 현장에서 듣는 강의는 또 다르다.
4차 산업시대의 의미와 앞으로의 인재상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귀에 너무나 잘 들어왔다. 인공지능이 발전해온 역사, 막연히 알고 있던 사물인터넷에 대해, 아톰과 비트의 세계에 대해 쉽게 이해가 되었다. 언어와 수리영역으로 아이들을 평가하고, 줄세우기 공부를 강요했다가는 실업자가 될 거라고 했다. 입력과 연산을 통해 결과를 도출하는 일은 AI가 제일 잘하는 일이며, 인간은 인공지능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질문과 해답을 찾는 즐거움을 가지라고 했다. 컴퓨터는 호기심과 질문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개, 고양이를 비롯한 고등동물들은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하고, 자기만의 답을 찾았을 때 강력한 희열(=도파민)을 느끼며 진화해왔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구겨넣으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만 분비된다. 성인도 본인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답을 찾으면 꾸준히 공부하면서 더 행복하게 산단다. 스트레스와 숙면의 여부가 치매와 관련 깊다고 경고했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 응답 시간이 있었는데, 강의 내용보다 여기서 연사의 역량 차이를 봤다.
첫번째 질문이 초등학교 3학년생의 "그런데 교수님이 연구한 건 없어요?"였다. 강연의 대부분이 외국사례를 들었기에, 본인이 좋아하는 교수님은 뭘 연구는지 궁금했을 거다. 어른은 실례가 될지 몰라 묻지 못하는 질문을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어투로 말했다. 그 질문에 교수님은 노트북전원을 다시켜고, 본인의 연구동영상을 찾아서 조근조근 이야기 해주셨다.
두번째 질문은 어디 독서토론협회장이라는 50대 여성분이셨다. 이번에 자기 책을 들어보이며 오늘 출간했다는 자랑과 자녀가 독서록을 쓰고 사교육 없이 왔다는 얘기, 다음에도 이 곳으로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순간 뻥졌다. 현장 강의는 Youtube로 생방송되고 있었는데, 자기 책 홍보를 왜 여기서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듯 책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양보해서 자아실현 자랑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교수님께 왜 또 와달라고 강요를 하냔 말이지. 이 난감한 상황을 정재승교수님은 독서모임을 띄워주면서, 독서의 중요성, 사교육 시장과 연결된 이야기로 마무리 하셨다. 질문자의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에도 여유있고 유연하게 대처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국악중학교 1학년생이 KAIST에 입학하고 싶은 데 어떻게 해야하냐는 질문도 있었다. 우리나라 영재교육의 현실을 당신의 경험과 엮어서 설명해주었다. 결론은 KAIST 대학원에 입학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현실적인 조언을 줬다.
토론을 어떻게 하면 잘하냐는 남학생에게, 토론할 책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준비하라고 했다. 그래야 미쳐 알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하게 하고, 논리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했다. 문학소년이 논객이 되어, 토론하는 방법을 조언하다니 쿵후판다가 생각났다.
주최측에서 제공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맛있다며 배려의 말을 흘리고, 개관한 센터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왜 강의 문의 메일을 1000통씩 받는지 이해가 갔다.
교수님은 강연문의 메일만 한달에 1000통을 넘게 받는다고 하셨다. 1000통씩 받으면, 강연료와 상관없이 내가 가고 싶은 곳만 갈 수있다고 한다. 그 중 8개만 선택한다고 하셨는데, 오늘이 그 행운의 날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든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