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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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는 발을 들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직감한다. 사랑이라는 세계가 그러하다. 입구만 있을 뿐 출구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사랑은 그렇게 우리는 그 닫힌 세계에 살게 만든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도 그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을 기억하는 한, 감각을 잊지 않는 한 존재한다. 어쩌면 지독히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저마다 간직한 그 세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 하루키가 그 세계를 철옹성처럼 지키려 노력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상 같기도 한 이 소설을 읽으면 각자의 세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애틋하고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불가능한 일이라도 아예 잊고 있었던 작은 마음 같은 것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원하고 바랐던 삶을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이 열여섯, 열일곱의 십 대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을 감정이 피어오르던 시절,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소녀에 대한 기억을 소년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주고받았던 편지, 서로를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눴던 장소, 모든 건 그대로인데 소녀만 사라졌으니까. 소년은 멈춰있을 수밖에 없다. 그 소녀가 들려준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는 잊을 수 없다. 대학에 가고 직장에 다니고 다른 연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동안에도 어른이 된 소년이 살아가는 세계는 그 소녀와 그 도시가 지배적이다.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 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들.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15쪽)


그래서 소녀를 잊을 수 없었던 그가 그 도시를 발견하고 그곳의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사람이 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그림자를 버리고 두 눈에 상처를 내면서 소년이 바랐던 건 소녀를 다시 만나는 일이었으니까. 자신을 알지 못하는 소녀가 그를 위해 차를 끓이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소녀를 바래다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은 살아가는 일은 소설 밖 독자에게는 불가해 보이지만 소설 속 그에게는 설렘과 행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을 위해 버려야 했던 그림자를 향한 마음은 복잡하다. 그래서였을까? 도시 밖으로 함께 가자고 말하는 그림자를 혼자 돌려보내고 남은 그 앞에 펼쳐진 세계는 이전의 삶이었다. 다시 소녀가 사라진 세계였다. 그의 간절함이 부족했던 것일까. 독자인 나는 혼란스럽다. 왜 하루키는 그를 도시 밖으로 되돌려 놓은 것일까? 그토록 원했던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여서 그랬던 것일까?


궁금증은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시골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이전 도서관장 고야쓰 씨, 매일 학교 대신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의 만남으로 풀린다. 그들은 그림자를 아는, 그 도시를 믿고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분명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원하는 것을 향해 나가는 사람들. 누구의 이해도 원하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두 개의 세계를 오가며 묻는다.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말이다. 도시에 있는 그림자인지, 도시 밖에 있는 이가 그림자인지. 그러나 사실상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자신이 믿는 대로 자신의 세계를 살면 그만이다.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잃어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 그게 어렵다는 걸 알기에 하루키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의 말을 통해 위로를 전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738쪽)


오랜만에 읽은 하루키의 소설은 여전히 그의 매력을 충분히 발산한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그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꿈꾸게 만들고 독자를 이끈다.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문지기가 지키는 도시, 그 안의 도서관, 최소한의 것들로 이루어진 삶. 소설에서 빠져나와 머릿속에 도시를 그려본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분리되는 그림자, 바늘 없는 시계탑과 그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소설 속 도시는 아니더라도 내가 사는 세계에서도 중요한 건 현재뿐이라는 사실이다.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과 순간순간 나타나는 벽을 뚫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 나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랑과 긍정으로 구축된 세계는 그지없이 아름답고 단단하게 존재하여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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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12-28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랑 깔맞춤 컵 귀여워요^^

자목련 2023-12-29 09:46   좋아요 1 | URL
의도적인 깔맞춤입니다 ㅋㅋ

희선 2023-12-31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 사는 게 자신인가... 어쩌면 소설에만 두 세계가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아쉬워 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걸 자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자신이 가기로 한 길 갈 것 같기도 합니다 자꾸 아쉬우면 다른 길로 가 보는 것도... 이건 그렇게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자목련 님 2023년 마지막 날 잘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4-01-02 11:24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두 개의 세계를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어요.
항상 소중한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희선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시간 이어가세요^^

루피닷 2024-01-0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4-01-02 11:23   좋아요 1 | URL
루피닷 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한 주 시작하세요!!
 
간밤의 꿈 이야기
안주영 지음 / 기린과숲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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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의식의 연장이라고 했던가. 걱정과 고민이 가득한 날,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꾸는 꿈에는 그 일의 당사자가 나온다. 아니, 그런 일이 있을 때에만 꿈을 꾸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꿈 없을 잠을 원한다. 새벽녘 깨어 잠들지 못했거나 일어나야지 하다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종종 꿈을 꾼다. 어김없이 내 마음의 불안과 걱정이 꿈에서 표출된다. 이를테면 특정 인물이 등장하거나 특정 장소가 나오는 것이다. 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그런 꿈은 꾸고 싶지 않다. 도대체 꿈이란 무엇일까. 여기 매일 밤 꿈을 꾸고 기록하는 이가 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사라진 꿈을 어떻게 기록할까. 그만큼 그에게 꿈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안주영의 『간밤의 꿈 이야기』에서 만난 그의 꿈은 이상하고 신비롭다. 흔히 말하는 복권을 사야 할 꿈, 키가 크느라 꾸는 꿈, 말 그대로 개꿈인 그런 꿈이 아니라 짧은 소설이나 영화 같고 거대한 시 같다. 읽으면서 정녕 이게 꿈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어떤 꿈은 끝나는 게 아쉬워서 끝이 아니라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까지 든다. 그가 들려주는 간밤의 꿈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그의 불안과 두려움을 엿본다. 꿈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의 관계를 추측한다. 꿈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되어 소중한 이의 죽음을 느끼고 애도하며 아파한다. 저자의 상황을 모르고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나와 동생은 아직 키가 작고 어린데, 아빠는 어느새 머리가 세서 계속 누워만 있다. 우리 가족과 친척, 그리고 아빠의 지인들은 모두 아빠를 내려다본다. 아빠가 눈을 뜨지 않자 엄마가 아빠를 흔든다. 엄마, 아빠가 함께 찍었던 사진 여러 장이 떨어진다. 고모가 아빠를 흔든다. 아빠의 한쪽 귀가 떨어진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빠의 친구가 아빠를 흔든다. (「아빠의 선물」 중에서)


가족이 등장하는 꿈을 읽으며 내 꿈에도 엄마와 아빠가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엄마와 아빠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든다. 동시에 그토록 바라는 게 아니었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꿈이라는 게 참 묘하구나 싶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꿈이 아닌 꿈이 나를 알고 찾아오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저자의 꿈이 마냥 몽환적 이미지라는 건 아니다. 절규, 공포, 혼란, 혼돈으로 이끄는 꿈도 많다.


지독한 두통을 뽑아내어 버렸더니 다른 이들이 두통이 달라붙어 괴롭히는 「두통」, 첫 수업에 늦었는데 바로 수업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자랑만 늘어놓고 정신을 차리니 강의실은 텅 비어있는 「첫 수업」, 어린 시절 먹지 않고 버린 약들을 어른이 되어 다 먹어야 한다는 「약국」, 1가정 1반려동물이라는 정책으로 집으로 커다란 상자가 배달되지만 누구도 열어볼 용기를 내지 못하는 「반려동물」, 기묘하지 않은가. 일상의 고통과 걱정이 고스란히 꿈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세세하게 담아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할밖에.


검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우리가 탄 배는 크게 흔들렸다. 나는 배의 나무 기둥을 꼭 붙잡았다. 우지끈. 반대편 나무 기둥이 부러졌다. 이미 축축해져 버린 나무 기둥들은 점점 검게 물들었다. 그렇게 나무들은 썩어갔다. (「검은 파도 속에서」 중에서)


꿈이 이끄는 세계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다. 만질 수 있다면 꿈을 만지고 싶게 한다. 허상과도 같은 꿈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꿈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꿈이 검고 어두운 빛이 아닌 환한 빛으로 물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면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묘사한 문장이 조금 유연하고 안온하기를. 나의 꿈을 향한 바람이기도 하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산뜻하고 맑은 기운은 안겨주는 그런 꿈을 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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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2-2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작가의 소설을 읽으시는군요.
꿈하니까, 지금 읽고 있는 무지 재미없는 소설이 떠오릅니다^^

자목련 2023-12-27 11:10   좋아요 1 | URL
꿈을 기록한 저자가 놀라웠어요.
페넬로페 님이 읽는 재미없는 소설이 궁금해지네요!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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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16쪽)


말로 전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써 전달하면 조금 나아진다. 그러나 상대는 다를 수 있다. 말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글은 오히려 이상하게 곡해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심정은 말이든 글이든 전할 수 없다. 내 마음에만 깊이 박혀 스스로를 상처 주고 갉아먹기만 한다. 그럴 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치유하기 위해 추천하는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다.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화자도 그랬다.


남편의 잘못된 행동으로 하던 일을 접고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고 딸과도 멀어졌다. 혼자의 삶은 피페해졌고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먹었지만 우울, 불안, 불면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화자가 기대 없이 글쓰기, 정확하게는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


각자의 일기를 쓰고 나누는 모임에서 화자는 '시옷'의 시점으로 쓴 일기를 들려준다. 80년대, 열 살 여자아이의 일상을 통해 그 시대상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할머니, 아빠, 엄마와 함께 유복하고 평온했던 날들을 시작으로 조금씩 균열되고 무너지는 가정 안에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항상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하던 아빠의 부재, 그 빈자리를 꿋꿋하게 채우는 할머니와 엄마.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아이의 모습은 안쓰럽다.


소설은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알 수 있듯 사회적으로 혼란한 모습과 그것을 직접 경험한 개인적인 기록이자 역사의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마주하는 건 화자인 '시옷'의 일기다. 짧은 머리와 옷차림으로 인해 남자아이로 인식해 합창단원이 된 아이. 노래 부르는 게 좋았던 아이는 자신이 여자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상한 건 엄마와 할머니의 태도다. 그에 관해 정정하지 않는다. 시옷이 여자아이로 알려졌을 때에도 시옷을 달래주거나 하지 않는다. 합창단 촬영이 있던 날, 시옷은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니 여자 아이든 남자 아이든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휘자는 노래 잘 하는 미성의 소년을 원했기에 여자 단복을 입고 나타난 '시옷'을 외면할 뿐이다.





아마도 엄마와 할머니는 빚에 쫓겨 집에 오지 못하는 아빠 걱정에 시옷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엄마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시옷은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아이는 몰라도 된다고, 나중에 알려준다며 무책임하게 회피한다. 시옷이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기죽지 말라고 합창단복도 제일 먼저 준비했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시옷의 담담한 일기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서 다가온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옷의 마음을 들려준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그곳에서 남동생 '수호'가 태어나고 '윤수'라는 아이와 보낸 시간. 뭉쳐진 기억이 하나씩 펼쳐지고 그때는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 어른의 모습을 생각한다.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딸 해준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점점 멀어진다. 시옷과 엄마의 사이와 다르지 않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은 일기를 통해 시옷 자신을 들러싼 것들과 화해하는 소설이자 열 살 여자아이 시옷의 성장소설이다. 이주혜는 일기 쓰기가 삶을 돌아보는 것이고, 거부하고 외면하던 기억을 꺼내는 일이고, 상처와 직시하는 것이라 말한다. 일기 쓰기 교실의 강사 림자의 말처럼 말이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23쪽) 온전히 이별하고 온전히 극복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조금 나아진다. 기록하는 순간, 그전의 나에게서 멀어지게 되니까. 시옷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 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324쪽)


올해의 겨울은 폭설과 한파로 기록하고 기억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 올겨울을 떠올리고 내가 쓴 글을 검색한다면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읽던 날들도 따라올 것이다. '시옷'이었던 여자아이와 '수윤'이란 어른 여자와 함께. 그때의 내가 쓰고 있기를 소망한다. 그게 무엇이든 진심을 다해 계속 쓰는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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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마지막 주문으로 구매한 책은 이렇다. 그러니까 정녕 마지막이다.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크리스마스라고, 이런저런 이유를 붙이다 결국, 그냥 사고 싶어서, 읽고 싶어서, 궁금해서 산 책이다. 아무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오랜만인 것 같다. 주문한 책이 하루키의 소설을 직접 보니 묵직하다. 한 손에 꽉 들어찬 소설의 내용도 묵직할 것 같다. 어제부터 읽고 있는데 기시감이라고 할까. 우선 든 느낌은 그렇다.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마냥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그의 고유성에 대해서는 조금 알 것 같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사춘기적 느낌, 풋풋하고 미완의 것들, 상징적 이미지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것이 곧 하루키를 대하는 나의 태도니까. 누군가 거대한 새로운 세계를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의 독서는 그렇다. 독서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니까.


나를 위한 선물 목록에 하루키의 소설만 있는 건 아니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사게 된 엘리자베스 하드윅의 소설 『잠 못 드는 밤』은 왠지 올해의 마지막 소설로 좋을 것 같다. 분량도 많지 않으니까 적당하지 않을까. 아, 올해가 가기 전에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을 읽기로 했는데. 올해의 마지막에 내가 어떤 책을 읽게 될지, 아무것도 읽지 않을지 마지막이 되어야 알 수 있겠다. 이 소설은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란 노래가 생각나는 제목이다.


마지막 한 권은 로베르트 발저의 에세이 『연필로 쓴 작은 글씨』다. 양장본으로 책 만듦새도 고급스럽고 예쁘다. '희미해져가는 사람, 발저의 마지막 나날'이란 부제까지. 이런 책은 그냥 지날 칠 수 없지 않은가. 마지막은 언제나 아련함을 불러오고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니 2023년의 마지막 주문으로 완벽하지 않은가.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다 먹지도 못하는 케이크 대신, 미리 산 책들. 나를 위한 선물로 충분하다.




주말부터 내린 눈은 아직 녹지 않았다. 곳곳에 보이는 빙판이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조심조심 걷는 마음으로 이 연말을 보내고 싶다. 올해 연락을 전하지 못한 이들에게 짧은 안부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건강하게 지내라는 연말 인사를 보내고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한다. 가까운 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보낼 수 있기를. 하루키의 소설 속 '너'처럼 아무 연락 없이 사라지지 말고. (아직 다 읽지 못해서 너의 재등장 여부를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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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1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인데 셀프 선물은 당근 아닙니까! ㅎ
알라딘 서재 분들은 늘 책 선물 셀프로 준다는 게 문제지만; ㅋㅋ
책들이 다 예쁩니다.
하루키 저도 어제부터인가 읽고 있는데... ˝기시감˝에 격하게 공감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자꾸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 말자고 채찍질 중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12-19 16:17   좋아요 1 | URL
자고로, 책 선물은 셀프!
요즘은 책들이 다 예쁜 것 같아요. 특히 이번 세 권은 더욱 예쁘고요!
잠자냥 님의 삐딱함, 알 것 같아요 ㅋㅋㅋㅋ

망고 2023-12-1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나에게 선물 했어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양장본이요ㅋㅋㅋㅋㅋ근데 결제하고 나서 너무 과했나 하고 약간 후회중 입니다ㅜㅜ

자목련 2023-12-19 16:15   좋아요 1 | URL
절대 과하지 않아요! 망고 님은 소중하니까요^^

새파랑 2023-12-19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시감 ㅋ 하루키 후기 작품들에는 기시감이 확실히 있긴 한데

그런 기시감이 저는 절대 싫지는 않더라구요~!!

자목련 2023-12-19 16:15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은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주 많이!!

레삭매냐 2023-12-19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춘수샘 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이
나오면 꾸역꾸역 읽는답니다. 그것 참.

책이 생각보다 댑따 두꺼워 보이네요 ㅠ

눈이 다 녹지도 않았는데 오늘밤에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합니다. 언능 집에 가야 하
는데...

자목련 2023-12-20 09:08   좋아요 1 | URL
네, 분량에 제법 많아요.
이곳은 계속 눈이 내립니다. 안전한 출퇴근을 기원합니다^^

은오 2023-12-20 1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크리스마스에도 케잌보단 책입니다 >.< ❤️ 케잌은 먹어봐야 똥된다...
오늘도 자목련님 향기가 물씬 나는 픽들! <연필로 쓴 작은 글씨>는 제게도 오고 있습니다 히히

자목련 2023-12-22 17:59   좋아요 1 | URL
은오 님, 방학이에요?
넘 추워요. 누워서 신나는 책 읽어요!!
 
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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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지금의 현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때 말이다. 오래전 침잠하던 시절 모든 게 아득했다. 잠이 들고 아침을 맞는 반복된 일상이 무의미했고 진짜는 달아난 가짜의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무기력한 숨어들기 위한 변명이었던 것 같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을 읽으면서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작은 섬의 두 그루 나무로부터 시작되는 신비로운 설화 같은 이 소설은 좀 묘하다.


묘하다는 느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인간의 존재 이전 태초의 나무가 서로를 바라보며 성장하여 숲을 이루는지, 나무가 인간과 어떻게 이어져 인간의 죽음과 생명에 개입하는 과정을 들려준다고 할까. 아니, 그 모든 걸 상상하게 만든다고 하는 게 맞을까. 어쩌면 인간의 생과 사를 지켜보는 한 나무(신이자 자연)를 통해 전하는 계시인지도 모른다.


나무에 이어 소설은 장미수가 신복일과 낳은 다섯 남매로 시작한다. 세 딸 일화, 월화, 금화와 쌍둥이 목화와 목수는 자란다. 아들인 막내 목수는 누나가 아닌 언니라 부르며 지낸다. 금화는 쌍둥이를 데리고 숲으로 간다. 그리고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커다란 나무가 금화를 덮쳤다. 목화가 어른들을 부르러 간 사이 금화는 사라졌고 목수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목수는 그날의 기억을 잃었고 금화는 찾을 수 없었다.


목화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열여섯 봄 목화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죽고 있었고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받으라고 했다. 단 한 사람만.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단 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 한 사람도 목화가 정할 수 없었다. 꿈이었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엄마 장미수, 할머니 임천자로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숙명이었다. 엄마 장미수가 늘 피곤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할머니 임천자는 그냥 받아들였다. 누군가를 구하는 것 그것만으로 족했다. 하지만 엄마 장미수는 달랐다. 거부하고 경멸했다. 목화는 의미를 찾으려 했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능력이라고 할까.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임천자는 묵묵히 장미수의 아이들을 돌보고 장미수는 자신이 끝이기를 바랐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 부활한 나무. 시간을 초월한 생명. 무성한 생에서 나뭇잎 한 장만큼의 시간을 떼어 죽어가는 인간을 되살리는 존재. 그 모든 것을 목화는 첫 소환에서 깨달았다. (92쪽)


목화가 단 한 사람을 구하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무자비한 죽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안타까운 사고에서 가해자를 살려야 할 때 따르고 싶지 않았다. 비관했던 목화는 점차 알고 싶었다. 왜 자신인지. 꿈이라 여겼지만 자신이 누군가 구한 일은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기사를 검색하면 알 수 있었다. 목하는 자신이 구한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구한 단 한 사람. 그들은 목화의 존재를 모르지만. 그리고 목하는 그 일을 중개라고 부르고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을 받아들인다. 다행인 건 목화 곁을 지키는 목수가 있었다. 소환되어 사람을 구하는 동안 목수는 목화 곁을 지킨다.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104쪽)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 (148쪽)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모두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누군가. 예외 없이 그를 향해 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 작가가 나무를 통해 전하고 싶었건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는 능력, 대를 이어진 숙명. 목화 같은 사람이 어딘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 목화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각자가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구할 수 있으니까. 놓치는 일은 절대도 없을 테니까.


오직 사람만이 다른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신을 필요로 한다. 기적을 바란다. 먼저 떠난 존재가 너무 그리워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208쪽)


아름다운 소설이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한다. 상처, 비관, 슬픔, 상실, 죽음의 소용돌이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며 전부를 내어주는 나무처럼. 어쩌면 나는 목화 같은 존재가 살려낸 단 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살아있음에 대해 감사하고 소중한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나의 몫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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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12-1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커피잔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이 책 칭찬이 자자하여 기대되네요^^

자목련 2023-12-17 15:25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 님의 첫 문장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ㅎㅎ
이 소설, 괜찮았어요^^

공쟝쟝 2023-12-1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얼마전에 본 영화 <너와 나>도 비슷한 맘을 먹게했는 데… 지금을 사는 뛰어난 작가와 연출가들은 그런 질문을 던지나봅니다.. 🥲

자목련 2023-12-17 15:25   좋아요 0 | URL
조현철 배우가 감독한 영화죠? 저도 한 번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