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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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16쪽)


말로 전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써 전달하면 조금 나아진다. 그러나 상대는 다를 수 있다. 말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글은 오히려 이상하게 곡해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심정은 말이든 글이든 전할 수 없다. 내 마음에만 깊이 박혀 스스로를 상처 주고 갉아먹기만 한다. 그럴 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치유하기 위해 추천하는 방법 중 하나가 글쓰기다.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화자도 그랬다.


남편의 잘못된 행동으로 하던 일을 접고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고 딸과도 멀어졌다. 혼자의 삶은 피페해졌고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먹었지만 우울, 불안, 불면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화자가 기대 없이 글쓰기, 정확하게는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


각자의 일기를 쓰고 나누는 모임에서 화자는 '시옷'의 시점으로 쓴 일기를 들려준다. 80년대, 열 살 여자아이의 일상을 통해 그 시대상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할머니, 아빠, 엄마와 함께 유복하고 평온했던 날들을 시작으로 조금씩 균열되고 무너지는 가정 안에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항상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하던 아빠의 부재, 그 빈자리를 꿋꿋하게 채우는 할머니와 엄마.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었던 아이의 모습은 안쓰럽다.


소설은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알 수 있듯 사회적으로 혼란한 모습과 그것을 직접 경험한 개인적인 기록이자 역사의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자가 마주하는 건 화자인 '시옷'의 일기다. 짧은 머리와 옷차림으로 인해 남자아이로 인식해 합창단원이 된 아이. 노래 부르는 게 좋았던 아이는 자신이 여자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상한 건 엄마와 할머니의 태도다. 그에 관해 정정하지 않는다. 시옷이 여자아이로 알려졌을 때에도 시옷을 달래주거나 하지 않는다. 합창단 촬영이 있던 날, 시옷은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니 여자 아이든 남자 아이든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휘자는 노래 잘 하는 미성의 소년을 원했기에 여자 단복을 입고 나타난 '시옷'을 외면할 뿐이다.





아마도 엄마와 할머니는 빚에 쫓겨 집에 오지 못하는 아빠 걱정에 시옷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엄마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시옷은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아이는 몰라도 된다고, 나중에 알려준다며 무책임하게 회피한다. 시옷이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기죽지 말라고 합창단복도 제일 먼저 준비했을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시옷의 담담한 일기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서 다가온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옷의 마음을 들려준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그곳에서 남동생 '수호'가 태어나고 '윤수'라는 아이와 보낸 시간. 뭉쳐진 기억이 하나씩 펼쳐지고 그때는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 어른의 모습을 생각한다. 정작 어른이 되어서는 딸 해준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점점 멀어진다. 시옷과 엄마의 사이와 다르지 않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은 일기를 통해 시옷 자신을 들러싼 것들과 화해하는 소설이자 열 살 여자아이 시옷의 성장소설이다. 이주혜는 일기 쓰기가 삶을 돌아보는 것이고, 거부하고 외면하던 기억을 꺼내는 일이고, 상처와 직시하는 것이라 말한다. 일기 쓰기 교실의 강사 림자의 말처럼 말이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23쪽) 온전히 이별하고 온전히 극복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조금 나아진다. 기록하는 순간, 그전의 나에게서 멀어지게 되니까. 시옷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 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324쪽)


올해의 겨울은 폭설과 한파로 기록하고 기억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 올겨울을 떠올리고 내가 쓴 글을 검색한다면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읽던 날들도 따라올 것이다. '시옷'이었던 여자아이와 '수윤'이란 어른 여자와 함께. 그때의 내가 쓰고 있기를 소망한다. 그게 무엇이든 진심을 다해 계속 쓰는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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