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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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지금의 현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때 말이다. 오래전 침잠하던 시절 모든 게 아득했다. 잠이 들고 아침을 맞는 반복된 일상이 무의미했고 진짜는 달아난 가짜의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무기력한 숨어들기 위한 변명이었던 것 같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을 읽으면서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작은 섬의 두 그루 나무로부터 시작되는 신비로운 설화 같은 이 소설은 좀 묘하다.


묘하다는 느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인간의 존재 이전 태초의 나무가 서로를 바라보며 성장하여 숲을 이루는지, 나무가 인간과 어떻게 이어져 인간의 죽음과 생명에 개입하는 과정을 들려준다고 할까. 아니, 그 모든 걸 상상하게 만든다고 하는 게 맞을까. 어쩌면 인간의 생과 사를 지켜보는 한 나무(신이자 자연)를 통해 전하는 계시인지도 모른다.


나무에 이어 소설은 장미수가 신복일과 낳은 다섯 남매로 시작한다. 세 딸 일화, 월화, 금화와 쌍둥이 목화와 목수는 자란다. 아들인 막내 목수는 누나가 아닌 언니라 부르며 지낸다. 금화는 쌍둥이를 데리고 숲으로 간다. 그리고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커다란 나무가 금화를 덮쳤다. 목화가 어른들을 부르러 간 사이 금화는 사라졌고 목수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목수는 그날의 기억을 잃었고 금화는 찾을 수 없었다.


목화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열여섯 봄 목화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이 죽고 있었고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을 받으라고 했다. 단 한 사람만.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단 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 한 사람도 목화가 정할 수 없었다. 꿈이었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엄마 장미수, 할머니 임천자로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숙명이었다. 엄마 장미수가 늘 피곤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할머니 임천자는 그냥 받아들였다. 누군가를 구하는 것 그것만으로 족했다. 하지만 엄마 장미수는 달랐다. 거부하고 경멸했다. 목화는 의미를 찾으려 했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능력이라고 할까.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임천자는 묵묵히 장미수의 아이들을 돌보고 장미수는 자신이 끝이기를 바랐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나무. 부활한 나무. 시간을 초월한 생명. 무성한 생에서 나뭇잎 한 장만큼의 시간을 떼어 죽어가는 인간을 되살리는 존재. 그 모든 것을 목화는 첫 소환에서 깨달았다. (92쪽)


목화가 단 한 사람을 구하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무자비한 죽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안타까운 사고에서 가해자를 살려야 할 때 따르고 싶지 않았다. 비관했던 목화는 점차 알고 싶었다. 왜 자신인지. 꿈이라 여겼지만 자신이 누군가 구한 일은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기사를 검색하면 알 수 있었다. 목하는 자신이 구한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구한 단 한 사람. 그들은 목화의 존재를 모르지만. 그리고 목하는 그 일을 중개라고 부르고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을 받아들인다. 다행인 건 목화 곁을 지키는 목수가 있었다. 소환되어 사람을 구하는 동안 목수는 목화 곁을 지킨다.


중개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목수는 짐작하여 대답했다. 글쎄, 살려달라는 말? 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날 목수는 그 말을 기록했다. (104쪽)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 (148쪽)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모두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누군가. 예외 없이 그를 향해 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 작가가 나무를 통해 전하고 싶었건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는 능력, 대를 이어진 숙명. 목화 같은 사람이 어딘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 목화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각자가 단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를 구할 수 있으니까. 놓치는 일은 절대도 없을 테니까.


오직 사람만이 다른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신을 필요로 한다. 기적을 바란다. 먼저 떠난 존재가 너무 그리워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208쪽)


아름다운 소설이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한다. 상처, 비관, 슬픔, 상실, 죽음의 소용돌이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며 전부를 내어주는 나무처럼. 어쩌면 나는 목화 같은 존재가 살려낸 단 한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살아있음에 대해 감사하고 소중한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나의 몫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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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12-1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커피잔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이 책 칭찬이 자자하여 기대되네요^^

자목련 2023-12-17 15:25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 님의 첫 문장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ㅎㅎ
이 소설, 괜찮았어요^^

공쟝쟝 2023-12-1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얼마전에 본 영화 <너와 나>도 비슷한 맘을 먹게했는 데… 지금을 사는 뛰어난 작가와 연출가들은 그런 질문을 던지나봅니다.. 🥲

자목련 2023-12-17 15:25   좋아요 0 | URL
조현철 배우가 감독한 영화죠? 저도 한 번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