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잠들기 전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열리지 않아 당황했다. 사용하지 않을 때 그곳은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 마지막 이용한 사람이 실수한 것이다. 물론 잠깐의 수고로움으로 문은 열렸고 화장실을 이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상황이 정리되고 침대에 누워 잠깐 생각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행동들. 나는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열쇠가 있다는 걸 알았기에. 열쇠 뭉치를 찾느라 서랍을 뒤적였다. 가족 중 하나는 열쇠가 있냐고 물었고 다른 누군가는 열쇠가 아닌 도구를 사용하여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 문을 열어주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더라면 그 밤에 열쇠 수리공을 찾았을까? 늦은 시각에 관리사무소에 사정하며 직원의 도움을 받았을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자꾸만 그 상황이 생각난다. 하나의 에피소드, 하나의 장면에서 확장되는 생각들. 소설도 이렇게 시작되는 걸까. 뜬금없다는 걸 잘 안다. 아마도 소설을 읽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고 있다. 아니, 책에 수록된 단편은 다 읽었고 에세이를 읽는 중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짧은 단편을 읽으면서 그녀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시작했을까, 궁금해졌다. 생각을 정리해서 쓴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단순하면서도 어렵다. 좋은 글은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런 문장들이 그러하다. 연필에 대한 글을 보면서는 김지승의 『아무튼, 연필 을 떠올렸다. 


거리를 거닐고 싶은 욕구가 일 때는 연필이 좋은 핑계가 된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우리는 “연필을 사야겠어.”라고 말한다. 이런 구실을 대면 겨울에 런던에서 생활하며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런던 거리를 헤매는 기쁨을 탐닉해도 무방하다는 듯이. 시간은 저녁 무렵, 계절은 겨울이어야 한다. 겨울에 샴페인 색으로 빛나는 공기와 거리의 친화력이 상쾌하기 때문이다. 여름날처럼 그늘과 고독을 바라고 풀밭의 달콤한 공기를 갈망하며 시달리지 않는다. 저녁이 되면 어둠이 깔리고 가로등 불이 커지면서 제멋대로 굴어도 좋다는 기분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평소와 다르다. 맑은 저녁나절 4시에서 6시 사이에 집을 나서면 우리는 친구들이 아는 우리의 자아를 떨치고 익명의 도보여행자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공화국 군대에 속하게 된다. 홀로 자기 방에 있다가 나와서 그들과 어울리면 아주 유쾌하다. (「런던 거리 헤매기」, 중에서 )







버지니아 울프가 감탄했다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집도 매력적이다. 여자만의 고유한 감각과 감성, 그리고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독자인 나 역시 여성이라서 그럴 것이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만 기억이 나는데 이 소설집을 통해 다양한 소설을 만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캐서린 맨스필드의 이력을 보니 같은 시대에 활동한 소설가들이다. 그동안 두 소설가의 제대로 이력을 살펴본 적이 없었다. 닮은 듯 다른 두 소설가의 소설.


나를 모르는 삶, 내가 살 수 없는 삶을 읽는다. 어떤 삶을 상상하고 미지의 공간을 그려본다. 소설이라 가능할 거라 여겼던 삶과 현실의 간격이 어느 순간 좁혀지고 하나가 되기도 한다. 연필을 핑계로 거리를 헤매는 버지니아 울프의 일행은 나와 우리로 치환된다. 글을 읽는다는 것과 글을 쓴다는 다른 행위가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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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있는 독서를 원한다. 욕심을 내지 않고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원한다. 그런데 막상 온라인 서점의 앱을 클릭하면 달라진다. 당장 읽지 않더라도 바로 책을 사야 할 것 같은 마음. 과거에 읽은 책인데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기어이 다시 구매하는 책. 그런 책들은 나를 자책한다. 다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혹은 그런 충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최근에는 인생의 책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 프로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잘 알려진 이가 선택한 책, 평소 그의 활동을 좋아했거나 눈여겨봤더라면 더욱 그렇다. 방송 시간을 놓치지 않고 시청하는 프로가 되었다. 조여정이 언급한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송은이가 추천한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 가장 최근에 정소민이 소개한 정현종 시인의 『섬』의 등장은 정말 반가웠다. 읽었던 책이라서, 좋았던 책이라서, 진짜 애정 하는 책이라서. 이유는 다양하다.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이들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발 빠르게 방송에 등장한 책을 광고한다. 그리고 내게도 좋은 자극이 된다. 이번 주말에는 어떤 책을 만날까. 기대하는 시청자가 되었다. 익숙했지만 그냥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펼치지 않았던 책을 꺼내게 만든다. 이를테면 『노인과 바다』, 『어린 왕자』같은 책이다. 정리하지 않는 책들 중 하나다. 그런데 막상 재독은 쉽지 않다. 이 기회에 다시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고전의 경우는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그와는 별개로 나의 1월의 책은 이렇다. 이주혜의 장편소설 『자두』, 서유미의 『우리가 잃어버린 것』, 7인 작가의 연작 에세이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갑자기 생각난 프레드 울만의『동급생』,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읽고 리뷰를 쓴 책도 있고 읽었지만 정리하지 못한 책도 있고, 읽기 시작한 책도 있다. 이주혜가 번역가라는 사실을 소설을 읽으면서 알았다. 그리고 최근에 번역한 작품을 내가 읽었다는 것. 자두를 너무 좋아하고 이웃 님의 추천으로 읽어야지 했던 소설이었는데, 이 소설과 만날 인연이었을까. 서유미는 초기와는 다른 결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문학을 더 많이 읽고 싶은데 마음뿐이다.





1월의 절반이 지나고 있다. 내렸던 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존재는 여전히 강하다. 아파트 출입구는 미끄럽고 인도 부분은 다니기가 불편해서 엉금엉금 거북이가 된다. 대한이 지나면 바람도 달라질까. 겨울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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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1-1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추워지고 눈이 또 온다고 합니다 낮에는 덜 추웠는데 저녁에는 좀 춥더군요 벌써 추워지는 듯합니다 읽고 싶은 책이 보이는 건 좋은 거지요 2021년에도 만나고 싶은 책 즐겁게 만나시고 주말 따듯하게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1-01-16 17:05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점점 바람소리가 강해요. 눈 소식이 있어 걱정입니다. 희선 님도 건강하고 포근한 주말 보내세요^^
 


어렸을 때 글씨를 제법 잘 썼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특히 조카는 설마? 하는 표정을 한다. 심지어 그 당시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탔다고 해도 말이다. 연필로 쓰는 글씨였다. 그랬던 나인데 이제는 연필을 쓰지 않는다. 손글씨를 쓰더라도 연필이 아니라 알록달록 사인펜을 겨우 쓸 뿐이다. 아마도 아무튼 시리즈에서 『아무튼, 연필』이 궁금했던 건 아련한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읽기도 전에 나는 연필 수집광이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연필 이야기, 혹은 연필의 역사 정도로만 이 책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정도 그런 이야기도 있다. 연필이니까. 연필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연필의 디자인, 연필의 색상, 연필의 관련한 에피소드 말이다.

연필이라니. 초등학생들도 연필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연필보다는 샤프, 숙제도 컴퓨터로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연필은 애틋하다. 이상하게 그렇다. 연필을 쓰지 않아도 내겐 연필이 있다. 필통도 있다. 버리지 못하는 물건 중의 하나가 연필이다. 모아두었던 불펜은 한 번씩 선 긋기를 해서 상태를 확인하고 버린다. 연필은 쓰지 않으면, 연필심이 존재하는 한 버릴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연필을 찾아보았다. 필통 속 연필, 컵 속 연필, 연필이 꽤 많았다.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연필은 취향을 떠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처음 내 이름을 쓴 연필, 소중한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쓰고 시험지에 답을 쓰고. 누군가는 연필로 쉽게 지울 수 있고 고칠 수 있어 나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연필이 더 좋은 건 아닐까.


김지승의 작가가 연필로 바라본 여자들의 이야기는 아프면서도 근사하다. 연필심처럼 견고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좋았다. 뭔가 다른 말로 쓰고 싶다. 그냥 연필처럼 좋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흑연 심 연필을 처음 만든 사람이 여학생이었다는 글로 시작하지만 우리는 그 여학생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어디 그뿐인가, 역사 속에서 발명가, 사업가, 전문가의 이름이 여성으로 기록된 게 언제인가. 여성의 삶은 그렇게 흐릿하며 쉽게 지워졌다. 여성이었던 비서가 연필로 쓴 건 임시였고, 중요한 결재는 상사인 남자가 만년필로 했던 과거의 일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튼, 다시 연필로 돌아가면 저자는 자신과 연필을 연결해 준 이들을 하나씩 호명하며 그들과의 사연을 들려준다. 다른 지방에서 이사를 온 저자가 만난 신부님이 선물한 오셀로 연필, 양배추가 말을 걸아 상담을 하면서 만나 상담사의 연필, 연필을 선물 받기 위해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듣는 코끼리 소동, 같은 건물 지하에 살았던 마녀로 불리던 이웃 할머니의 지우개가 달린 노란색 연필. 단종된 연필을 구하기 위해 웹서핑으로 연락이 닿은 스페인 프리힐리아의 실비아 할머니, 연필로 이어지는 여성작가들. 처음에 의아하게 여겼던 표지 속 코끼리와 긴 머리칼의 여성과 연필이 등장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연필로 시작해 연필로 끝나는 이야기들. 나는 한 자루의 연필을 사기 위해 거리로 선 버지니아 울프에게 듣고 싶은 연필의 의미를 생각하고 “연필은 어딘가에서 어디로 가는 다리다”란 최윤의 문장 속 연필을 상상하며,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나라도 연필이 필요하다는 <작은 아씨들> 속 막내 에이미에게 연필을 사 주겠노라 다짐하게 만든 메이 올컷의 연필을 응원한다.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114쪽)


인간이 자기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과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치는 순간의 교차는 우연이 아니다. 연필을 쓰다 보면 인간과 연필이 만나 아주 드문 풍경을 만든다는 걸 알 수 있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연필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145쪽)


특정한 물건을 좋아하는 일, 그건 특별하거나 위대한 건 아니다. 그저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저자에게는 연필이고, 누군가에는 그런 글을 엮은 책이고, 수많은 무엇일 수 있다. 아무튼, 연필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풍부했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연필을 더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연필을 쓰지 않더라도 연필을 쥐는 순간, 나는 이런 문장을 떠올리고 연약하면서도 단단한 존재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당신도 그러기를 바란다.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46쪽)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그 말이 여전히 내 옆에 있다. 그럼 나는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들 곁에 있기로 한다. 강함과 약함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그걸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 각각의 의미와 위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를 자문하면서. 사람이 어떤 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무너짐이 어떤 죄책감을 만드는지에 예민할 수 있는 건 내가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이어서다. 모를 수가 없다. 모른 척은 해도.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 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4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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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제목 그대로 잊고 있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들고 아련한 추억을 선물한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구멍가게, 그곳에서만 펼쳐지는 풍경과 오가는 정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얼핏 누군가에게는 그저 전국을 다니며 현존하는 구멍가게를 스케치한 책이 무슨 대단한 감동을 안겨주는 거냐고 묻을 수 있다. 그러나 감히 말한다. 가만히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보고 듣는 순간, 그들의 삶에 동화되고 그곳이 궁금해질 거라 말이다.

책 속에 수록된 80여 점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낀다. 책 밖에 있던 모든 감정들, 속상했던 마음이나 화가 사라지고 책 안으로 들어온 평온한 기분이 남는다. 작고 낡은 오래된 구멍가게의 그림의 힘을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그 구멍가게를 통해 마주하는 보통의 삶, 서민의 삶이 아닐까 싶다. 작가가 그 가게를 찾아가는 동안 품었던 생각과 그곳을 지키는 이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우리네 이웃을 닮았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 중심이 아닌 변두리의 삶이 책에 있었다.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누군가 기억하고 찾아왔을 때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곳을 지키는 이들은 통해 사회 어딘가의 고단한 이들을 떠올린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너진 골목, 낡은 주택, 정든 곳을 떠나야 하는 원주민의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짐작할 수 없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고 도시에서 공부하고 일하다 다시 시골로 돌아왔기에 월세, 이주민, 재개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므로 작가의 구멍가게는 힘겨웠던 과거의 삶인 동시에 외로운 현대인에게 지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전국의 구멍가게를 찾아가 그곳의 어르신과 작가가 나누는 이야기는 평범한 것이다. 구멍가게의 이력과 주변의 변화, 어떻게 지금껏 유지하고 있는지 사연을 들려준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을 통해 자신의 유년시절을 꺼내고 과거를 반추한다. 가게 앞에 놓였던 아이스크림 통, 평상, 그리고 나무들. 사진을 찍고 세밀하고 정교하게 펜화를 그리면서 작가는 항상 나무를 그리고 평상을 그린다고 했다.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의 풍경처럼 평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꽃의 풍경도 다채롭다. 혼자가 아닌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바로 구멍가게는 그런 공간이었다.

‘내 그림엔 평상이 단골로 등장한다. 평상은 함께 앉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자리다. 나눠 앉을 수도 있고 둘러앉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다. 누군가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제 내가 앉았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다고 뭐라 할 수도 없다. 또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유연하게 쓸 수도 있는 자리다. 낯선 이들과 어우러져 앉아도 어색하지 않다. 평상은 나눔의 자리다. 가게 앞에는 평상이 하나씩 있다.’ (본문 중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건 동전 하나로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나날만이 아닐 것이다. 잃어버린 이웃과 잃어버린 정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딘가 구멍가게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작가에게 알리는 기자의 마음도 그것을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한 공간과 그 공간에 숨 쉬는 삶을 마주할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가. 뭔가 대단한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책을 읽는 이라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드라마를 통해 삶의 고난과 역경을 나누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과 같다고 하면 어떨까? 뉴스나 정보 프로그램만 보는 이 역시 알 수 없는 감정이다. 책이 주는 기쁨은 그런 것이다.

작가의 그림 속 시간은 멈춰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온 이들과 그곳을 아는 이들에게 그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이 책은 살아 숨 쉬는 삶이고 누군가에게는 애틋한 그리움이며 누군가에는 궁금한 시간이다. 영원의 시간 속에서 유한의 존재인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책은 묻는다. 간직하면 잊히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 힘으로 우리는 삶을 지탱하고 이어간다고 말이다. 그러한 힘을 알기에 작가는 묵묵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리라. 오래도록 그림을 그려주길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왜 작고 오래된 쇠락하는 가게 풍경을 그리느냐고. 인류의 가치관을 대변할 좀 더 근사하고 웅장한 상징물을 그리라고 한다. 기억의 향수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더 높이 수직을 보라 한다. 그렇지만 왕조의 유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상징물보다 나를 더 강렬히 잡아끄는 것은 보통의 삶에 깃듯 소소한 이야기다. 사람 냄새다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나는 낯설다. 그저 동시대의 소박한 일상이나 사람과 희망에 의지하여 오늘도 작업에 임할 뿐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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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1-17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작은 가게가 거의 없겠지요 시골에나 가야 있을 듯합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갔을 텐데, 지금은 커다란 마트가 생기고 그런 곳은 거의 문을 닫아야 했겠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가까운 가게가 없어서 멀리까지 물건 사러 가야 하다니... 세상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게 있다면 좋을 텐데, 어쩐지 그런 건 형태가 없는 것뿐일 듯합니다


희선

자목련 2020-11-18 07:3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제가 사는 곳도 시골이지만 마트가 많아요. 책 속에서 만나는 구멍가게는 찾기 힘든 것 같아요. 비가 오네요. 희선 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우리는 부주의하고 망각하는 인간들이다. 사실 실제 현실에서 우리는 수 세기 전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끝날지 안 끝날지 알 수 없는 우주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다. 우리는 핏빛으로 물든 달과 불길과 강풍 속에서, 10월에 지는 얼어붙은 나뭇잎에서, 나비의 초조한 날갯짓에서, 밤을 무한대로 길게 늘리거나, 매일 정오 갑자기 멈추는 불규칙한 시간의 맥박 속에서 어떤 존재의 반영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낮의 집, 밤의 집』, 116쪽)

소설을 읽으면서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한 발을 내디디면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다고 하면 적절할까. 어떤 이야기가 계속될지, 어떤 문장을 발견할까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이해했다거나 인물이 또렷하게 그려지는 게 아니어도 괜찮다. 그게 올가 토카르추크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거대한 꿈을 꾸는 듯, 알 수 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 『낮의 집, 밤의 집』을 읽으면서도 모호한 존재들을 상상한다.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는 인간의 생과 존재들 말이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놓치지 않는다.


세 번째 만나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소설이라는 거다.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인물이 등장하며 짧고도 긴 사유의 글들이 조각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가 되고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돌고 돈다. 『방랑자들』보다 10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방랑자’들이 이 소설의 후속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화자인 ‘나’의 꿈으로 시작해 그녀가 들려주는 ‘마르타’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축을 이룬다. 1990년대 폴란드의 작은 마을 피에토느에서 가발을 만드는 마르타와 교류한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화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는 이는 노인인 마르타다. 그러나 마르타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니다. 다만 화자가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할 뿐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들, 때로 환상처럼 때로 꿈속처럼 다가온다. 마르타 외의 마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폭력을 쓰는 아버지로 힘든 가족의 상처를 대물림되고, 아이가 없는 부부의 일상에서 허전함이 전해지고,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인물, 아니 괴물처럼 여겨지는 인물도 있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만 타인의 이야기, 서로 다른 꿈들, 곳곳에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사유를 듣다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삶의 조각들이란 걸 알게 된다. 전설처럼, 신화처럼 성녀 쿰메르니스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평범했던 한 여자가 성녀가 되는 과정과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 수녀원, 동굴, 지하실, 다락방, 숲, 소설 속 장소와 공간은 모두 집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마르타에게 우리는 각자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실체가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 설계도로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곳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21쪽)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과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생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그려낸 세상에 감탄하지만 소설 속 모든 관계와 사건들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했을까. 액자소설처럼 이야기는 이야기를 불러온다. 성녀 쿰메르니스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야기는 경계를 허물고 확장되어 넓은 세계로 향한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분명한 사유를 전한다.

인생이 갈망이 될 때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종이처럼 보이고,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져 떨어진다. 모든 동작들과 모든 생각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각각의 감정은 시작되긴 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그리움의 대상조차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오직 그리움만 진짜이고, 중독성이 있다. 있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소유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져야 한다. (『낮의 집, 밤의 집』,430~431쪽)


맨 처음 그녀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도무지 따가갈 수가 없았다. 외국 소설의 경우 주요인물의 이름도 기억하기 힘들다. 『태고의 시간들』에서도 많은 인물이 등장해 신화처럼 폴란드의 역사를 말한다. 그녀에게 시간과 공간은 무척 중요한 의미인 것 같다. 그 소설에서도 보리수, 버섯 균, 과수원, 죽은 자, 신의 시간이 등장한다. 저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산다고 할까. 그라인더의 시간이라니.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태고의 시간들』, 54쪽)


작품 순서를 보면 『낮의 집, 밤의 집』이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보다 먼저 출판되었지만 번역으로 출판된 순서는 다르다. 어쩌면 순차적으로 읽었더라면 더욱 그녀가 지향하는 세계와 가까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나하나 조각으로 이어진 소설, 서로 다른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다가온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저 좋은 문장이라고 여겼던 부분에서 멈칫한다. 모든 소설의 인물은 방랑자이며 올가 토카르추크 그녀 자신이구나 알게 된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그녀가 이동하는 공간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 그리고 구축하고 만들어지는 세상.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이 세 개뿐인 눈금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놀라운 통찰력.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한다. 박물관의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놓은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 『방랑자들』, 35쪽)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방랑자들』, 280쪽)


다시 『낮의 집, 밤의 집』로 돌아와서 생각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안내하는 독특하고 다양한 세계가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을 한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내가 이동하는 만큼 볼 수 있고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만큼만 가능할 것이다. 그녀와 소설이 방랑자인 것처럼. 그런 이유로 이 굉장한 소설 속에서 이런 문장을 오래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다. 우리 생은 순간의 연속이라는 명징한 사실을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할 수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는 나 자신에게서 생기고, 공간과 시간의 한 지점을 흘러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장소와 시간의 속성의 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은 다른 지점에서만 바라본 세계들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많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80쪽)


마르타의 집은 그녀와 닮았다. 그녀처럼 하느님도, 그의 피조물도, 심지어 그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오직 한순간, 지금만 존재할 뿐이지만, 그것은 거대하고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사람에게는 압도적이다. (『낮의 집, 밤의 집』,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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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와파롤 2020-11-0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고의 시간들 읽으면서 너무 신비한 새로운 세계를 보았는데.... 이 책도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목련 2020-11-05 11:1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랑그와파롤 님의 말씀처럼 신비하고 새로운 세계.
이 책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