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속절없이 무너져내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조심해야 한다. 남김없이 다 쏟아낼지도 모르니까. 아무나 붙잡고 보기 흉한 흉터로 남은 상처에 대한 사연을 하소연할 수도 있다.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 소설 『레티파크』 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일곱 편의 짧은 이야기가 왠지 하소연 같기도 하고 넋두리 같기도 한 느낌. 처음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던 분위기와 감정은 소설의 것이 아닌 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몇 개의 짧은 이야기를 읽노라니 그 흥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소설 속 인물은 자신의 히스토리를 전부 보여줄 생각이 없다. 물론 인물과 인물의 관계, 과거의 이력을 일부러 숨긴 건 아니다. 내밀한 감정을 비밀스럽게 보일 듯 말 듯 감춘다고 할까.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어떤 슬픔이나 상실에 대해 적극적인 설명이나 표현을 하는 순간 삶이 구차해진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래서 어떤 이는 그 허탈함과 절망을 말이나 행동으로 끊임없이 보여주고 어떤 이는 그저 듣거나 보고만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면할 수 없어서다. 어찌할 바 모르는 그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기에.


떠난 남자를 기다리는 이에게, 그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듯 서성이는 여자에게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말하지 못하는 마음. 과감하게 떠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이별과 상실의 경험이 없는 이라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페티시」 속 엘라에게 아이만이 “우린 출발해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별과 상실을 확인하는 게 두려운 엘라와 다르게 「어떤 기억들」 속 여든두 살의 그레타는 그 모든 일을 다 경험한 할머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세입자 모드와 단둘이 산다. 과거에는 가족과 살았고 다른 세입자도 많았다. 그레타는 새 세입자를 찾지 않는다. 모드는 이주 동안 떠나있다 돌아와야 하는데 혼자 남을 그레타를 걱정한다. 그런 모드에게 그레타는 이렇게 말한다.


살다 보면 정말이지 몹시 기묘한 일들이 다시 떠오르곤 해요. 순간순간 나의 꿈들이 깨어났던 만. 분명 나는 잘 있을 것예요. 혼자서도, 걱정할 것 없어요. 잘 다녀와요. (143쪽)


소설 곳곳에는 그레타가 살아냈을 삶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세입자 모드를 면접할 때 했던 질문들(책을 읽나요, 노인과 관계를 맺어본 적 있나요. 마약을 하나요, 인생을 즐기나요, 등등)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레타는 두려울 게 없어 보인다. 설령 모드가 떠난 사이 자신이 죽더라도 말이다. 이상한 건 그레타의 말에 괜히 독자인 내가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앞으로 다가올 삶의 기운이나 감각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온다는 걸 믿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런 믿음이 생긴다면, 확신을 갖는다면 삶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을까. 그게 가능할까. 면접은 다가오는데 한 아이는 아프고 다른 아이의 볼도 뜨겁다. 친구 닉에게 두 아이를 부탁하고 테스는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 테스가 면접을 보러 간 사이 닉은 두 아이와 종이비행기를 만든다. 돌아온 테스에게 닉은 종이비행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테스는 닉에게 자신이 면접해서 한 말을 들려준다. 어떤 기대도 절망도 없이, 그러나 단호한 테스의 의지가 느껴진다.


진실. 나는 사람들한테 진실을 말했어. 달리 뭘 말하겠어? 나는 아이가 둘 있다고, 싱글맘이라고, 정신 병동 경험이 있다고 말했어. 나는 이렇게 표현했어. 나는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이제 다시 나가고 싶다고. 일을 하고 싶다고. 나는 말했어. 저는 씩씩해요, 저는 투지가 있어요, 저는 낙관적이에요. 저는 안정적인 사람이고 평정심을 가졌어요. (「종이비행기」, 97쪽)


그녀가 면접에 합격하고 출근에 대한 안내를 전할 전화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희망할 뿐이다. 테스가 걱정되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소설 밖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해버리면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살면 살수록 배우고 깨닫는다. 그래서 「교차로」속 패트리샤는 집을 비운 사이 침입해 난동을 피운 옆집 세입자의 십 대 아들을 선뜻 고발할 수 없다. 끊임없이 고민한 후에야 결정을 내리면서도 번복하게 되고 후회하는 일,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심연이라고. 이렇게 말할까, 아니면 다르게 말할까, 아니면 아예 그냥 말하지 않는 게 상책일까. (「교차로」, 216쪽)


하나의 답이 정해진 게 아니고 구체적이고 정확하지 않아서 신경을 끊을 수 없게 만든다. 자꾸 생각한다. 이미 지난 사랑에 대해, 지난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버릴 수 있다고 다짐해다가 한순간 생각에 빠져드는 걸 반복한다. 미련할 정도로. 그렇다. 유디트 헤르만은 삶의 대부분이 그러지 않냐고 말한다. 삶에는 모호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자 2024-04-0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 리뷰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4-04-08 19:59   좋아요 1 | URL
달자 님, 많이 아쉬운 리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디트 헤르만의 다른 소설을 이어서 읽고 싶어졌어요.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넷 윈터슨의 장편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얀 마텔의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넷 윈터슨이란 작가의 이름조차 몰랐다. 얀 마텔은 “어떤 책이든 우리에게 다른 삶을 살게 해주며, 다른 이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가르쳐 줍니다.”라고 말했다.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말인데 왜 이리 마음을 울렸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란 소설을 기억하고 있었고 덕분에 읽게 되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란 제목에서 이미 오렌지만을 과일이라 주장하는 이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가 등장할 거란 걸 알 수 있다. 뻔한 예상하다. 그러나 스스로 오렌지만이 과일이라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오렌지가 얼마나 좋은 과일인데, 왜 오렌지가 아닌 다른 과일을 선택하느냐고 강요 섞인 조언과 권유를 계속할 것이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 내가 좋은 걸 다른 이가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전부라 믿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에는 오렌지 말고도 다양한 과일이 있다는걸. 설령 세상에 과일이 오렌지 하나만 존재한다고 해도 그 오렌지를 거부할 수 있다고.


소설의 주인공 ‘지넷’의 어머니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최선을 다해 지키려 하고 그 안에 입양한 딸 지넷을 가두려 한다. 아니, 자신이 세계를 완성하려고 지넷을 입양한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넷과의 충돌은 당연한 일이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구약 성서 「신명기」부터 읽도록 가르쳤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규정해 놓은 삶, 그것이 선이고 정의였다. 그게 무엇이든 모든 걸 다 흡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아이 지넷에게 세상은 얼마나 좁고 답답했을까. 귀가 안 들리는 지넷에게 성령 충만한 거라고 말하는 어머니라니.


지넷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품었던 기대는 무너졌다. 학교에서 지넷은 별종인 학생이자 왕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지넷 탓이 아니다. 존재와 동시에 어머니에게 세뇌당한 세계가 지넷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단 숨에 그것과 결별하고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지넷은 여전히 교회에 나가고 어머니를 돕고 신을 위해 일한다. 그러나 지넷은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고 어머니가 항상 건네준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깨우친다. 열여섯 살의 지넷의 눈앞에 나타난 소녀 멜라니를 향한 마음은 사랑이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서로를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지넷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비롯한 교회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여자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죄이고 악이었다.


집을 나온 지넷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트럭을 운전하고, 장례식 일을 돕고,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생활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병원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다. 시간이 흐르고 지넷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철학적으로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니까.”(285쪽)라고 말하지만 너무 늦었다.


소설은 지넷이 자신의 내면에 다다르고 완성하는 자전소설이며 성장소설이자 여성 소설이다. 창세기에서 시작해 롯기로 끝나는 목차를 보면 성경 소설이라 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지넷이 스물다섯 살에 출간한 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놀랍고 대단하다. 그러니 십 대 소녀의 반항기, 세상을 향한 당돌한 몸짓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소설이다. 지넷이란 이름이 만들어갈 세계의 시작이라고 할까.


세상엔 수많은 형태의 사랑과 애정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함께 지내기도 한다. 이름은 주는 것은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이는 본질과 관련된 것이며 힘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사나운 밤에 누가 당신을 집으로 부르겠는가? 당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뿐이다. 낭만적 사랑은 싸구려 소설로 희석되어 수천 권 수만 권의 책으로 팔린다. 어딘가에서는 낭만적 사랑이 여전히 원서와 같은 석판에 적혀 있다. 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바라다고 건너고 뙤약볕 아래에서의 고생도 마다 않고 내가 가진 전부를 줄 것이다. 그러나 남자를 위해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은 파괴자가 되려고만 하지 결코 파괴되지는 않으려 하니까. 그래서 남자들은 낭만적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리고 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282~ 283쪽)


나는 당연히 지넷을 응원했지만 엘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엘시는 교회의 다른 어른과 달랐다. 귀가 아파 병원에 있을 때도 멜라니와의 사건으로 지넷이 비난받을 때도 엘시는 일방적인 무리들과 달랐다. 어린 소녀 지넷에게 유일한 어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병원이 아니라 지넷 곁 가까이 있었더라면, 그녀의 죽음이 조금 더 늦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크고 아쉬움이 남는다.


“A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B일 수도 있는 거야.”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는 거야.” (61쪽)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진리, 그 아름다운 가치를 오직 엘시만이 지넷에게 알려주었다. 엘시가 지넷에게 들려준 말들이 분명 지넷을 든든히 지켜주었을 거라 믿고 싶다. 엘시의 말은 여전히 힘이 된다. 지금을 살아가는 수많은 지넷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4-04-0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구절은 다시 읽어도 좋네요. 저도 엘시가 안타까웠어요.... 지넷 윈터슨은 그래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 좀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자목련 2024-04-04 11:39   좋아요 0 | URL
제목만 기억하고 있던 소설인데 잠자냥 님의 리뷰 덕분에 읽게 되었어요.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고 싶고요^^

독서괭 2024-04-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령 세상에 과일이 오렌지 하나만 있더라도 거부할 수 있다!! 👍👍👍

자목련 2024-04-04 11:41   좋아요 1 | URL
당당하고 독립적인 삶을 생각해요! 이 소설 흥미롭고 좋았어요^^
 
데미안 -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날 이야기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봄이다. 기운을 차리고 힘을 내야 할 것 같다. 봄이니까. 봄은 청춘의 계절이다. 성장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다. 새롭게 도전하는 이들을 향한 응원이 넘친다. 나도 뭔가 거들고 싶다. 봄이니까, 방황해도 괜찮다고 그 방황도 끝이 있다고. 뭐든 시작해도 되고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이유로 잔소리가 늘어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을 다시 읽으면서 싱클레어였던 시절을 떠올린다. 불안으로 가득했던 날들, 내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질문이 많았던 날들. 지금도 여전히 모르지만 그때보다는 여유로움이 있다고 할까.


인생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주는 상대를 만나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다. 좋은 영향을 주든 나쁜 영향을 주든 이전의 나와는 달라지니까.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면서 자신과 세상을 향한 시선이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데미안』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란 유명한 구절로 잘 알려졌다. 더 나은 존재,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변화와 성장을 위해 무엇과 투쟁해야 할까. 그것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 같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길이고, 하나의 길을 가는 시도이며 하나의 작은 여정을 암시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8~9쪽)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으로 이끄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64쪽)


사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단순한 성장소설로만 여겼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은 복잡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할 것 없는 가정에서 자란 싱클레어가 처음으로 두 개의 세계를 인지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외부의 영향으로 평탄했던 내면이 움직이는 과정은 누구나 경험하는 사춘기, 막스 데미안이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그에게 동요된다. 데미안이란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비롭고 때로는 성스럽기까지 한 존재. 한편으로는 데미안이 아닌 다른 이를 만났더라면 싱클레어의 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규칙과 정도를 따르는 삶,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정해진 길을 가는 삶이 무탈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삶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삶도 있는 것이다. 싱클레어가 대학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스스로가 어두운 세계에, 악마에게 속하는 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랬던 그에게 나타난 소녀.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라 이름 짓고 그를 추앙한다. 한 마디로 짝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싱클레어는 아니었다.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하다. 그런데 그 얼굴은 소녀의 얼굴이 아니고 누군가 닮은 듯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데미안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진정 추앙한 이는 데미안이라는 말이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지배할 정도로 깊게 스며드는 관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는 우정을 넘어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싱클레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데미안은 절대적 존재였고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데미안을 통해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더 가까이 나갈 수 있었다. 선과 악에 대해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심연에 닿고자 애섰을 것이다. 문득 생각한다. 나에게 데미안은 누구였을까? 선생님, 친구, 아니면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나는 누군가의 데미안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어려울 것 같다.


깨달은 인간에게는 오직 한 가지 의무밖에는 어떤,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기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그리고 어디로 인도하든 간에 줄곧 자기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이었다. (178쪽)


누구에게나 진정한 사명은 오직 한 가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178쪽)


그러니 이 소설은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데미안을 위한 소설이자 애도의 마음이다. 전쟁이라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싱클레어에게 미소를 짓던 사람. 온전히 닮고 싶었던 사람,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고 확장시킬 수 있도록 안내한 사람, 영원한 친구를 생각하면 이 얼마나 애틋한 소설인가.


나는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 완전히 나 자신 속으로,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영상들이 어른거리는 그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굽혀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바로 나의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완전히 닮은 나 자신의 모습을. (232쪽)


시대가 흐르고 모든 것들이 변해도 전쟁은 일어나고 다툼과 갈등은 여전하다. 소설 밖 현재를 살아가는 싱클레어와 데미안도 방황과 고뇌의 시기를 보낸다. 그들에게 헤세의 데미안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진다. 읽을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나의 내면은 얼마나 단단한가 묻는 것 같다. 나에게로 가고 있는 건 맞는지, 그렇다면 어디쯤 가고 있는지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24-04-0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데미안을 다시 읽으셨군요! 저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다시 읽어볼까 합니다.

자목련 2024-04-03 10:25   좋아요 0 | URL
싱클레어보다 <수레바퀴 아래서>속 한스가 더 현실적인 인물로 더 깊게 와 닿았던 기억이 나네요.
즐겁게 읽으세요!!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을 기록하는 일은 귀중하다.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은 물론이고 단순한 일상의 기록은 더욱 그렇다. 보잘것없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하루를 돌아보는 일기는 그 하루 전체가 되고 훗날 마주했을 때 한 시절의 한 조각이 된다. 그러니 기록은 일부이자 전체가 된다. 누군가 남긴 기록을 읽으며 우리는 기록 너머의 삶을 상상한다. 소소한 일상의 나열에 웃음 짓기도 하고 상처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 차마 설명할 수 없는 감춰진 감정들이 글 속에서 뛰쳐나오고 단어를 통해 어떤 결의나 다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배리 로페즈의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그것들과 화해하려 애쓰고 노력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나가가려는 그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가 아니었다. 내게는 그랬다. 삶의 기록이 분명했지만 그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캘리포니아를 그리며’나 ‘하늘 한 조각’이란 제목처럼 아련한 추억이나 그리움이 아니었다. 나 같으면서 떼어내거나 잘라버리고 싶은 기억의 한 덩어리였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인한 폭행,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되고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움이 간절한 이들에게 의사라는 지위의 선한 천사 인양 가면을 쓰고 접근한 악마의 행태를 읽는 동안 모든 욕이 쏟아져 나왔다. 그랬다. 그의 기록은 어린 로페즈가 지소적으로 당한 성폭행이었다. 어린 소년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혼한 엄마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참는 게 어린 남동생을 보호하는 거라 믿었을 소년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자신을 지켜주고 편이 되어줄 어른인 새아버지에게 털어놓으며 그가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시간이 지난 탓인지, 형사들은 이미 도주한 의사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고 수사의 진척을 묻는 로페즈에게 새아버지는 의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노인이 되었다고 그 상처가 깨끗이 치유되는 게 아니니까. 로페즈는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직접 그를 아는 지인을 찾아 나섰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이렇게 모든 걸 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삶의 예의로 다시 데려다줄 타인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최종적으로 얻은 교훈이었던 것 같다. 타인의 포용을 용서나 우호적인 판단이 아니라 인정으로 받아들여 환영하는 것. 누구나 때때로 남들이 모르는 각자의 삶에서 잔혹한 역경을 맞기도 하며,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이루는 서로가 없다면 이 악몽은 언제든 되살아날 기회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 (117쪽)


삶을 포기하지 않고 절망의 순간마다 그를 이끈 건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쓰다 나는 울컥해진다. 침잠했던 시절이 떠오르며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가족에게도 냉담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나를 일으켜 세운 건 무엇인가. 나에게 무엇인가 묻게 되는 것이다. 배리 로페즈가 견디고 겪어야 했던 그 상처와 비교할 수 없지만. 살아가면서 겪게 될 상처와 상실을 치유할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읽으면서 조심스럽지만 로페즈에게 그것은 자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거대하고 포괄적인 의미의 자연이 아니라 그가 느끼고 경험하고 생활한 장소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러니 한 편으로는 이 책은 그가 다닌 여행의 여정을 담은 기록, 탐사 기록으로 볼 수도 있다. 인생이라는 여행,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의 여행, 선주민을 만나는, 낯선 이를 만나는 사람 여행이라고 할까.


알래스카 북부와 중부 각지를 야영한 날들, 남반구에서 머문 겨울밤, 극지 고원에 위치한 캠프, 딸과 함께 남극 크루즈 선박에서 보낸 시간, 이 모든 여행에서 그는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씨를 기록하고 동물을 더 많이 보고 관찰하려 애쓴다. “여행은 매일매일 우리에게 이제껏 보지 못한 무언가를 소개한다.” (276쪽)는 로페즈의 말은 그저 풍광을 보려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세계 각국의 유명 관광지를 찾아 나서는 여행객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하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화하는 자연,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생명을 놓치지 말라고.


내게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어렵고도 아름다운 책이다. 기록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할까. 무언가 쓰는 일, 쓰면서 생각하고 쓰면서 돌아보고 쓰면서 정리하는 일. 쓴다는 행위는 살아있다는 증명이었다. 살아내고 있다는 다짐이었다. 로페즈가 남긴 기록을 읽고 그의 생각과 느낌을 모조리 흡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흡수라니, 가당치도 않은 바람이라는 걸 안다. 그가 여행한 곳들의 지명이나 특색을 검색할 수 있으나 그 안의 고유한 감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970년 여름부터 줄곧 그가 살아온 오리건 서부 로페즈의 집은 상상할 수 있다. 아니, 그려보는 것이다. 치누크 연어가 산란하고 물수리 울음이 들리는 강, 엘크와 퓨마가 사는 숲, 흑곰의 발톱 자국을 발견하는 공간. 그리고 이런 겹쳐지는 이런 문장. 나는 이 부분이 너무 좋았다. 왜 이리 좋은지 설명할 수 없지만 알고 알려지는 교감이라니. 그것은 장소와 나의 관계가 아닌 모든 존재와의 관계에도 필요한 말이라 생각한다.


나는 자연의 모든 장소가 ‘알려짐’에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의 어디쯤에선가 인간은 자신들이 ‘알려지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하고, 그렇기에 그들이 아는 장소에서 그들의 존재가 사라질 때 장소는 그들을 그리워한다. 서로가 알고 알려지는 이런 교감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197쪽)


나는 제법 괜찮아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치유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상처와 반갑게 인사할 수 을 정도로 무감해진 것도 맞다. 그러나 여전히 삶이라는 게 버겁고 힘들다. 살아가는 게,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페즈의 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용기와 위로를 건넨다. 삶의 모든 것과 화목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그 앎을 우리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미지의 것이 두렵지 않다. 이곳의 많은 동물들이 집에서 몇 발짝 벗어나면 죽음이, 때로는 더 무시무시한 것이 도사린 가운데 살아가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과 화목하다. 이 앎이 있기에 나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 각오를 얻는다. (367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4-03-30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의 예의로 다시 데려다 줄 타인이 필요하다”는 구절 저도 참 좋았어요! 그 타인이 사람일 수도 있지만 글쓰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던…

자목련 2024-03-31 14:17   좋아요 1 | URL
네, 글쓰기는 그런 힘이 있어요.
나를 쓰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 쓰고 싶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우아 2024-03-3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과 비인간을 모두 생명으로 보면서 삶을 구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나침반이었습니다.

자목련 2024-03-31 14:18   좋아요 0 | URL
나침반이자 어둠을 밝혀주는 등대 같은 책이었어요.
 
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상이 무료하고 지루할 때 드라이브는 괜찮은 일이다. 직접 운전하지 않더라도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복잡했던 머릿속을 단순하게 비워준다. 어쩌면 욘 포세의 장편소설 『샤이닝』 속 남자도 그런 걸 바랐을지도 모른다. 초겨울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를 가르며 운전을 하고 돌아오면 지루함이 사라질 거라고. 그러나 그는 깊은 숲속 눈밭에 갇히고 말았다. 처박힌 차를 꺼낼 수가 없었다. 차를 꺼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를 도와줄 누군가 말이다. 모든 게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이 숲에서 나가야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생각하다 길을 되짚어 나가기로 한다. 그러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고 어딘가 마을이 있으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점점 어두워지는 숲을 헤매는 기분을 상상하자니 나에게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제발 이 남자가 숲을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야생동물의 위협을 피하고 조난이 아닌 생존으로 끝나기를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묘하다. 아니 욘 포세의 글이 묘하다고 하는 게 맞다. 쉼표로만 길게 이어진 문장으로 독백이나 다름없던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느꼈던 것처럼. 소설을 이끄는 한 남자, 그는 마치 연극 무대에 올라서 배우 같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고, 거기에 몽환적인 눈 내리는 숲 속이라니. 알 수 없는 흰빛과 우연하게 발견한 바위에 앉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고립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어떤 편안을 발견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 싶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주 조용히 서 있다. 사방이 완전하고 고요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 싶다. 침묵 속에서는 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내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 나는 들을 수 있다. (59쪽)







더 놀라운 건 홀로 있던 숲속에 느닷없이 등장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노부부다. 분명 이건 환영이어야 맞다. 심지어 노부부는 남자의 부모였다. 그렇다면 신이 그를 구하기 위해 그들을 보냈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발견하고 어떤 감격이나 기쁨을 보이지 않는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 죽음이 따라온다. 그가 맞이한 세계는 죽음이 아닐까. 사실, 이 소설은 뭔가 해석하기보다는 욘 포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그의 문장에 물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정말 그것은 가능할까. 그럼에도 부단히 나를 찾기 위해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게 생이라는 사실.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나는 반짝이던 그 존재의 일부가 된 것 같다, 지금 그 존재는 더이상 순백색 빛을 발하지 않지만, 그렇다,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다,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 (79~80쪽)


우리는 맨발로 무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한 숨 또 한 숨, 어느 순간 숨이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호흡하는 무를 빛처럼 뿜어내는 반짝이는 존재뿐이고, 어느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우리다, 각각의 순백색 속에서. (80~81쪽)


한 편의 아름다운 풍경화 같고 한 편의 웅장한 시 같은 소설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욘 포세의 문장에 빠져들고 그 숲에 혼자 남은 그 남자는 곧 나 자신은 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 가만히 눈을 갚고 순백색이란 뜻의 원제(kvitleik)를 떠올리며 숲속을 그리게 될 것이다. 내게는 무대의 막이 내리고 배우가 퇴장하는 모습이 겹쳐진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소설. 우리의 인생에서 산다는 것과 죽음이야말로 그런 게 아니겠는가.


책에 수록된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 침묵의 언어>를 통해 욘 포세가 추구하는 소설에 대해 만나고 나면 『샤이닝』을 다시 읽고 싶을 것이다. 두 번 읽는다고 더 쉽게 다가오고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글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가 듣고자 하는 게 무언인지, 나는 무엇을 듣고자 노력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을 불가해한 것으로 채워진 삶을.


내게 글쓰기는 귀를 기울여 듣는 일입니다. 글을 쓸 때 나는 결코 사전에 준비를 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듣기만 할 뿐입니다. (95쪽)


그리고 고요를 생각한다. 묵연한 그것. 어쩌면 순백일지도 모를 그것을 생각한다. 80쪽의 짧은 소설이 품은 웅장하고 깊은 고요를, 오직 고요함만이 낼 수 있는 신비로운 소리를 마주하기를 소망하게 된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고요를, 이제껏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고요의 소리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4-03-22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 그리고 저녁>의 분위기가 느껴지는데요.
욘 포세의 소설을 읽으면 왠지 북유럽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소설 속 분위기가 있을 것 같아요^^

자목련 2024-03-25 13:28   좋아요 1 | URL
네, 죽음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까요.
눈으로 가득한 숲 속의 명징한 차가움, 말씀처럼 북유럽의 풍경을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