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
전범선 지음 / 포르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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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치킨을 배달시키고 추운 날씨에 뜨근한 국물이 생각나 돼지 등뼈탕을 먹었다. 맛있게 먹고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걱정과 배달비가 꽤 많이 올랐다는 걸 생각했다. 내가 먹은 동물, 그러니까 닭이나 돼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먹었던 음식이고 닭이나 돼지는 반려동물이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많은 이들이 채식을 선호하고 사회적으로도 비거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건 안다. 그래도 나와는 조금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여겼다. 당연히 동물을 착취로 인해 우리가 소비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동물권을 보호하고 차별에 반대하는 사상과 철학인 ‘비거니즘’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


밴드 활동을 하고 글을 쓰는 작가, 책방 풀무질의 주인 전범선의 비거니즘 에세이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는 열흘 동안 지리산 산청 집에 살면서 쓴 글이다. 열흘 동한 하루에 하나씩 주제를 갖고 쓴 초고를 완성시킨 책이다. 나 같은 독자에게는 조금 낯설고도 어려운 책이었다. 동물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인간의 폭력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부터 주변에 채식주의자가 없는 내가 변화와 실천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좀 더 솔직해자면 이성적으로는 동조하면서도 동참에 대해서는 회의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내가 몰랐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비거니즘, 동물해방에 대해서는 조금 더 다양한 시각과 토론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저자의 말처럼 채식을 통해 재료 본연의 맛을 알고 몰랐던 맛의 세계를 만나는 놀라운 경험도 비거니즘의 즐거움이라는걸. 거기다 환경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내가 매일 쉽게 세상과 접속하는 스마트폰을 오래 쓸수록 고릴라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콜탄이 생산되는 곳이 고릴라의 서식지로 콜탄의 생산이 서식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말 자연을 군림하고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종일까.책은 에세이라는 형식을 지녔지만 인류가 언제 어떻게 육식을 하게 되었는지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자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에 대한 안내서라 볼 수 있다. 저자의 풍부한 지식과 높은 식견으로 채워진 비거니즘으로의 계도서라고 할까. 인류가 불을 사용하고 사냥을 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남성 중심 사회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이 건너야 할 가장 큰 적이라고 말한다.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살림으로 하나 된다. 모두 생존과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비거니즘은 우리의 밥상을 죽임이 아닌 살림의 먹거리로 채우는 것이 시작이다.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의 몫으로 할당하고 폄하했던 살림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35쪽)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을 비거니즘이 왜 필요한 것인지 그는 독자를 설득하고 강조한다. 그 설득의 과정 역사가 있고 현재 세계의 흐름과 유명인의 주장과 글들을 소개한다. 소로우가 채식주의자가 된 배경과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을 언급하며 동물해방운동이 21세기의 그것이라 설명한다. 인권의 차별에 반대하는 것처럼 동물권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거니즘의 목표는 동물해방이다. 비건 세상이란 에덴동산과 같이 모든 동물이 고통 없이 사는 곳이다.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처럼 들릴 수 있어도,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필요하다. 비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의 선택에 호소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 종 차별주의와 육시 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125쪽)


책을 읽으면서 자꾸 즐겨 먹었던 삼겹살과 불고기가 되기 전의 돼지와 소의 모습이 생각났다. 고기를 먹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 그 반대에 선 이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하거나 비건을 선택한 이들 말이다. 최근에 학교나 군대 같은 단체 급식에서 비거니즘을 위한 식단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개선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변화하는 게 중요하다.


비거니즘의 목적은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나의 도덕적 우월함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현시점에서 최우선 과제는 공장식 축산을 철폐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채식 인구를 늘려야 한다. 도살장의 소는 내가 무슨 이유로 자신의 젖과 살을 안 먹는지 알지 못한다. 동물해방은 의도보다 결과가 중요한 운동이다. (147쪽)


비거니즘의 삶을 계획하거나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동지애를 전해준다. 더불어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이 책이 정확한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나 같은 독자에게는 왜 비거니즘의 사회로 전환해야 하는지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현재 동물 관련한 생업 종사자를 위한 구체적인 지원이나 사업전환에 대한 사유를 찾을 수 없는 게 아쉽다.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꿈꾸는 일은 아름답지만 가야 할 길이 멀다. 심각한 기후 위기로 인해 지구가 아닌 우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세계 갑부의 주장이 이뤄질 날도 쉬이 오지 않을 것처럼. 그러니 우리는 조금 더 실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연을 지키고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더 힘을 써야 한다. 나부터도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지만 고기를 먹는 일에 대해 깊게 고민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변모하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능력을 키운다. 환대하고 경청하고 공감하고 돌보고 연대하고 지각하는 힘을 연마한다. 하나 되는 요령을 터득한다. 뭇 생명과 연결하고, 스스로 온전해지고, 분열된 로고스와 에로스, 정신과 육체를 통합하는 연습을 한다.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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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별생각이 없었는데 웃고 있는 돼지가 그려진 삼겹살집 간판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저도 고민이 ㅠㅠ

자목련 2021-11-16 10:10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결심까지는 못해도 조금씩 바꿔나가는 방법을 깊게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플라멩코 추는 남자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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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의 형태를 원하지만 그쪽으로 발을 내딛는 일은 어렵다. 섣불리 내밀었다가 깊은 수렁에 빠질까 두렵기도 하고 현재까지 살아온 게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다. 사소한 취미를 새로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렇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이처럼 크다. 하지만 정작 시작을 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운전이든, 언어든, 동호회 가입이든 결국엔 깊이 내재된 두려움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의 『플라멩코 추는 남자』의 주인공 67세 남훈 씨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은 현직에서 물러나 자신만의 위한 삶을 살기로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평생 한 몸처럼 지냈던 중고 굴착기를 파는 일도 주저했고 후회와 실수뿐인 지난 삶에 대해 딸 선아와 아내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혼자만의 기록으로 남긴 버킷 리스트를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버킷 리스트는 대단한 게 아니었으니까. 아내나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화내지 않기, 백화점에서 명품 정장 사기, 체력 키우기, 외국어를 배우고 해외여행하기 정도였다. 은퇴 후 여유 자금도 괜찮았으니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운 버킷 리스트는 혼자만의 기쁨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의논할 이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떤 외국어를 배워서 여행을 떠날까. 남훈 씨가 선택한 나라는 스페인, 그러니 당연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스페인의 광장에서 추는 플라멩코에 빠진 것이다. 스페인어 강사의 말이 이상하게 그를 들뜨게 했고 이상한 확신도 안겨주었다. 진짜 달라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말이다.


“어떤 언어형식을 배운다는 건 새로운 관계를 준비하는 것과 같지요. 이 언어는 미래의 언어입니다. 멋진 기회와 새로운 만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기억하세요. 새로운 언어형식이 새로운 관계를 만듭니다.” (56쪽)


몸도 마음도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연습처럼 확실한 보답을 주는 것도 없었다. 언어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춤이 문제였다. 아무리 연습해도 원하는 만큼 실력이 늘지 않았다. 해외여행도 중요했지만 그에겐 남은 중요한 버킷 리스트가 있었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보연을 만나는 것으로 남훈 씨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보연을 만나는 일 역시 스페인어를 배우고 플라멩코를 추는 일처럼 그에게는 처음 시도하는 것이었다. 남은 삶에 보연이라는 가족이 들어오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전과는 다른 삶, 더 이상 후회로 남겨두고 싶지 않은 삶.


낯선 언어를 배우고 낯선 리듬을 타며 몸을 움직이는 일은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맞추어가는 것으로 보연을 향한 마음도 그러했다. 보연을 아이가 아닌 한 사람의 어른으로 대하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가 있기 마련이지만 때를 놓쳤다고 포기하고 단념한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67세 남훈 씨는 지금 보다 늦은 때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이는 아버지를 떠올릴 것이고 어떤 이는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단순하게 ‘플라멩코 추는 남자’만 보고 춤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분명 소설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있다. 쓸쓸하고 작아진 모습의 아버지, 사느라 바빠 돌보지 못한 가족의 마음, 그리고 나만의 시간.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소설은 그것들과의 관계, 사랑에 대해 말한다. 정열적인 플라멩코에 담긴 사랑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라고.


굴착기의 기본 작업은 땅을 파고 메우는 것. 그것은 불도저처럼 한 번에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바닥을 다기지만 하는 롤러처럼 작업자를 지루하게 하지도 않는다. 보드라운 땅에서 쓰레기나 암석을 골라내고, 수도관 따위를 교체하느라 파헤친 땅을 되메우는,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버킷으로 땅을 덮고 다지면, 그 뒤에 도로가 깔리고 집이 생기고 아름다운 공원이 들어섰다. (258~259쪽)


지금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땅을 파고 메우는 단순하고 지리멸렬한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버킷 리스트처럼 나중에 분명 단단하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자리할 거라는 걸 믿는다. 남훈 씨와 소설 속 인물들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면서 소중한 이들과 단단한 끈으로 연결된 사랑처럼.


그러므로 67세 남훈 씨의 버킷 리스트는 우리의 그것이 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삶, 그 안에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우리들의 이야기. 편안하고 따뜻하고 까칠한 유머를 지닌 우리네 모습을 발견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고. 하루하루 코로나19시대를 버티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허태연의 소설이 밝고 환한 감동을 안겨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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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7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7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고솜에게 반하면 - 제10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6
허진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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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동화 <오즈의 마법사> 속 동쪽 마녀와 서쪽 마녀가 생각난다.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했던 마녀. 착한 마녀가 동쪽 마녀였는지 서쪽 마녀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런 신비한 능력을 지닌 마녀를 한 번쯤 만나 단 한 가지 소원을 말해야 한다면 어떤 소원을 말해야 하나 상상을 할 뿐이다. 마우리가 사는 세상에 마녀가 있다면 그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동화 속 이미지처럼 별 그림 모자를 쓰거나 빗자루를 타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도 요즘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모든 걸 소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제10회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허진희의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독고솜이 여학생이 아닌 남학생일 거라 생각했다. 풋풋하고 순수한 중학생의 첫사랑을 기대했다고 할까. 버려야 할 편견이다. 기대와 달랐다고 해서 별로였다는 건 아니다.


중학교 1학년은 청소년이라고 하기엔 살짝 아쉽지만 그렇다고 어린이라고 할 수도 없다. 중학교의 세계는 초등학교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춘기로 고민이 많아지고 친구와의 사귐과 부모님과의 관계에 있어 생각이 자라는 시기다. 『독고솜에게 반하면』는 그런 열네 살 아이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학년 2학기 전학을 온 독고솜에 대해 반 아이들은 묘한 경계심을 보인다. 그 중심에는 반장인 단태희가 있다. 여왕이라 불리는 아이, 그 곁에는 태희의 말을 전하는 박선희가 있다. 삼삼오오 모여 함께 다니는 사이라면 큰 문제가 없는데 독고솜을 마녀라고 말하고 따돌린다. 독고솜과 한동네에 살았던 단태희는 독고솜 모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전학을 왔을 때 반갑지가 않았다. 독고솜의 교과서가 찢어지는 일이 일어난다. 당사자인 독고솜과 다르게 탐정을 꿈꾸는 서율무는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서율무는 독고솜이 점점 더 궁금했다.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서율무와 단태희가 화자가 되어 교차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독고솜은 정말 마녀일까. 서율무가 목격한 장면, 놀랍게도 정말 그랬다. 기분이 좋으면 모든 걸 공중으로 띄울 수 있었다. 모계로 전해지는 마녀 집안. 서율무는 독고솜과 진해지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이 뭐라 생각하건, 솜이는 진짜 멋진 아이니까.


“기분이 좋으면 이렇게 돼 버려.”

독고솜 가방이랑 교실의 책상, 창가 화분까지 한꺼번에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건지 떠오른 것들은 다 반짝이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의자랑 교탁이랑 급훈 액자까지도 붕 떠올라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그러자 마치 눈에 뭐가 씐 것처럼 세상이 다른 색으로 보였다. 미지의 세상에 훅 들어온 기분! 스스르 다리에 힘이 플리고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지더니, 제멋대로 어깨가 들멍댔다. (17~18쪽)


율무가 솜이네 집에 놀러가면서 둘은 가까워지고 친한 친구가 된다. 솜이는 고구마와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물론 마녀의 능력도 있기는 했다. 기분을 헤아리고 따뜻하게 만드는 능력. 그런데 왜 다른 아이들은 솜이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소문을 만들어낼까. 그런 소문은 같은 반 아이 영미가 밤길에 폭행을 당해 입원을 하면서도 이어진다.영미의 마음과 상황을 잘 모르면서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입원비 모금을 하고 그 과정에서 분실사고가 일어난다. 범인은 누구일까, 이번에도 단태희의 무리가 벌인 일일까.


중학교 1년의 모습은 아직은 어린 철이 없는 아이의 모습일까. 어쩌면 그들의 모습은 우리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잘 모르는 사실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편을 가르는 어른의 모습 말이다.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명랑 탐정 서율무가 활약하는 탐정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십대 아이들의 관계를 다룬다. 서로에게 대해 알아가기 위해서는 진심을 보여주는 용기가 필요하는 걸 알려준다. 거기다 마녀라는 독특한 인물 설정으로 재미를 더하고 그 안에서 가정폭력과 따돌림이라는 심각한 문제을 유연하게 풀어낸다.


독고솜이 영미를 향해 마법을 부리는 이런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춘기 시절의 부족하고 부끄러웠던 나의 행동과 서툰 마음이 그립기도 하고 그때 그 친구들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십대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고 어른에게는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성장소설이다.


영미의 등 뒤 창문을 통해 열감 없는 가을 햇살이 밀려들어 왔다. 빛무리가 내려앉은 영미의 옆얼굴이 파도가 부서지듯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순간, 솜이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솜이의 손이 영미의 손에 부드럽게 가닿았다. 쏟아지는 햇살에도 끄떡없는, 그 빛에 조금도 묻히지 않는 솜이의 새까만 눈동자가 영미에게 향했다. 그 순간 눈 안에는 영미밖에 없었다. 흔들림 없는 솜이의 검은 눈동자가 빛 속으로 사라져 가던 영미의 먼지 같은 얼굴을 붙잡았다.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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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2 1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게 마법이 가지는 의미가 참 다양하게 해석되는 거 같아요. 아이랑 같이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반가워요 ㅎㅎ

자목련 2021-11-13 15:53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이 동화는 다양한 의미를 전하는 것 같아요.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남은 주말 따뜻하게 보내세요^^
 
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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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이 가운데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는 이가 있다.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지 알면서도 무엇이 가장 힘든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 습관이 나쁘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기만을 바랐다. 그것이 그에게 다른 방식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불안할 때 손톱을 뜯거나 성마른 표정을 짓는 것처럼. 그에게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도 이어지지 않았다. 조해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자꾸 겹쳐졌다. 그는 하나가 아니었다.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와 닮아있었다.


너무 익숙해서 그냥 그런 가 보다 여기고 삶은 다 힘드니까 생각했던 일상들이 입체적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조해진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그러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의지할 이가 없었다. 의지하려 말을 건네거나 손을 내밀어도 상대는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누군가를 돌보고 기약 없이 삶을 희생하며 버티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간병인, 가난한 예술가, 비정규직 노동자, 안전이 보장되지 현장에서 실습생이 아닌 노동자가 된 청소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의 산증인의 삶은 모두 우리의 것이었다. 그들이 힘겹게 버티는 생을 조해진은 언제나 그렇듯 담담하게 들려준다.


9편의 단편 가운데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던 소설은 단연 「하나의 숨」이었다. 처음에는 제목의 하나가 가진 의미가 소설 속 인물의 이름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숫자 하나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을 앞둔 계약직 교사인 ‘나’에게 실습을 나간 학생 ‘하나’의 전화는 달갑지 않았다. 대학입시가 아닌 취업을 목표로 둔 학교에서 취업률은 중요했고 다른 공장도 실습생에 대한 대우는 비슷했다. ‘하나’에게 학교로 돌아오라고 선뜻 말할 수 없었다. 거기다 학교에 계속 남아있을지 알 수도 없어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하나’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그제서야 하나가 있었던 곳, 하나가 매일 전화를 하며 걸었을 그 밤을 마주한다. 그리고 하나에게 일어난 사고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이 더욱 세심하게 살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나’에게 닥친 현실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소설을 읽으며 하나와 닮은 누군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의 조카, 나의 친척, 과거로 돌아가 나의 친구가 거기에 있었다. 하나의 숨이 환한 숨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다고, 어차피 이곳엔 진짜가 없으니, 왜냐하면 지금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주 긴 꿈을 꾸고 있으므로. 꿈 바깥에 두고 온, 차창에 얼비치는 도시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깨어난다 해도 그곳 역시 꿈일 거라고, 그러니까 꿈 바깥의 꿈일 뿐이라고 믿으면서. 다만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만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을 이어간다. 그래서, 오직 그 얼굴을 지키기 위해서, 행복은 가짜가 아니라고 느끼는 그들의 한순간을 위해서, 가까스로, 자꾸만 꺼지려 하는 심장을 바닥에서부터 부풀리며, 하나는 또 한 번…… 하나의 숨을 쉰다. ( 「하나의 숨」, 103쪽)


그런 바람은 「파종하는 밤」으로 이어진다. 공장에서 수은 중독으로 소년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은 ‘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과 동시에 돌봐야 하는 또래와는 다른 어린 아들을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으까. 단단한 사회적 제도와 울타리는 소년들뿐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 하는 ‘나’에게도 필요했다.


위태롭고 불안한 숨을 이어가는 이들은 현실의 우리였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뉴스와 언론에 등장했던 그들의 현재가 궁금했다. 올바른 사회로 나가기 위해 투쟁하고 정의를 외치던 이들이 떠난 자리를 지키며 그들이 돌아오면 설자리를 잃을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계선 사이로」에서 무엇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다르다고 구분하는지 그 명확에 대해 아무라도 붙잡고 묻고 싶어졌다.


간절하게,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마음으로, 감각되지 않은지만 존재하는 경계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연진도 그런 종류의 경계선이라면 다른 사람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분명하게 의식하게 했던 몸 안의 특별한 선도 그중 하나였다. 비로 이제는 사라졌지만 남들에게는 없는 그 선을 갖고 있던 시절에는 학보사 책상에 쌓인 신문과 잡지들, 인스턴트커피의 달콤한 냄새와 형광펜으로 밑줄을 친 윤희의 문장, 그리고 먼지 낀 학보사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으로 낡은 책상 주변이 갑작스럽게 환해지던 순간이 연진의 세계를 구성했다. 그 풍경부터, 연진은 말하고 싶었다. (「경계선 사이로」, 133~134쪽)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는 이들에게 세상이 너무도 잔혹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숨」은 중의적이며 뜨겁게 다가온다. 하나에게 그렇듯 우리에게도 모두 저마다의 하나의 숨이 절실하다. 각각의 하나의 숨이 모여 환한 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9편의 단편 가운데 이전의 단편 「문주」나 장편 『단순한 진심』와 연결된 제목이 아닐까 싶은 「문래」는 조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의 기원, 글의 시작에 대한 조해진의 개인적인 서사라고 하면 맞을까. 아련하다 못해 아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상처를 고스란히 꺼내는 일은 아프고 고통스럽기에 「문래」를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만났던 조해진의 소설이 한곳에 모인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나의 상처가 잠자는 나의 방을 떠올리면서.


저는 그 방을, 그 방이 있던 동네와 그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까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하며 살아왔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방이 저에게 새겨 넣은 상처가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는 것을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상처에 빚을 지며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는 거겠죠, 상처의 고유함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공평한 특권일 테니까요. (「문래」, 290~291쪽)


내 고향은 문래하고, 나의 문장[]이 그곳에서 왔다[]고…… (「문래」,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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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21-11-10 13: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 옆에도 습관처럼 한숨을 쉬는 사람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나쁜 습관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더라구요 ;;;

자목련 2021-11-10 16:50   좋아요 2 | URL
어쩌면 한숨을 쉬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이젠 겨울인 것 같아요. 쌀쌀한 날들, 건강 잘 챙기고요^^

scott 2021-12-09 16: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오늘 저녁은 환한 숨 쉬며 ^ㅅ^

자목련 2021-12-10 10:35   좋아요 0 | URL
네, 우리 모두 환한 숨을 쉬어요!!
저도 축하드리고요^^

thkang1001 2021-12-09 16: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0 10:34   좋아요 0 | URL
^^*

그레이스 2021-12-09 16: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리뷰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12-10 10:3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려요^^
활기찬 하루 보내세요^^

mini74 2021-12-09 16: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1-12-10 10:34   좋아요 2 | URL
저도 축하드려요!
즐거운 하루 이어가세요^^

새파랑 2021-12-09 1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저도 축하드려요 ^^

쎄인트saint 2021-12-09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0 10:33   좋아요 1 | URL
세인트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1-12-09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리뷰에 선정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0 10: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향기로운 하루 이어가세요^^

서니데이 2021-12-09 2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1-12-10 10:33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초란공 2021-12-09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12-10 10:32   좋아요 2 | URL
저도 축하드려요. 건강하고 환한 날들 이어가세요^^
 
마이 선샤인 어웨이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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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삶은 언제나 아쉬운 장면뿐이다. 그중에서도 몇 장면은 평생 동안 불에 덴 상처로 남아 자신을 따라다닌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는 흐릿해지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은 선명하게 남는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에게만 나타나는 환영처럼. 그것을 포옹할 수 있을 때 삶은 비로소 완성되는지도 모른다. 후회와 실수를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기를 낼 때 삶은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흘러갈 수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러한 보편적인 진리를 우리는 너무 늦게 깨우친다. 아니, 후회로 가득 찬 시절에는 전혀 알 수 없다. 상처와 고통을 견디며 조금씩 성장한다.


그래서 M.O. 월시의 『마이 선샤인 어웨이』의 화자가 들려주는 그의 십 대 시절의 이야기는 그저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모르기 때문에 서툴렀던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게 힘들었고 상대를 위한 노력이 오히려 아픔을 주고 말았다.


소설은 ‘너’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글이다. 그러니까 고백이자 용서를 구하는 글이라고 할까. 1989년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의 한여름에 일어난 사건이 시작이다. 화자는 그 사건의 용의자 중 하나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평범하게 흐르던 여름 날, 달리기를 잘 하는 학교 인기 스타인 화자가 짝사랑한 열다섯 살 린디에게 벌어진 성폭행 사건이다. 네 명의 용의자에 화자도 포함된다. 스스로가 용의자라고 밝히니 범인을 찾아내는 스릴러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불량아로 찍힌 구순열 흔적이 있는 학생, 많은 고아들을 맡았던 위탁가정의 남편 정신과 의사, 위탁아동의 한 명인 문제 학생과 화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소문과 동네에서 그들의 행동을 통해 범인으로 유추하면서 일상을 이어간다. 화자의 눈에 비친 린디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육상부도 그만두고 학교에서 어울리는 친구들도 달라졌다. 오직 화자만이 그녀를 관찰하고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하지만 열네 살 소년이 생각하는 방법은 너무도 무지했다. 화자의 말실수로 인해 학교에는 린디의 소문이 자세하게 퍼진다. 무엇이 린디를 위한 일인지 화자는 잘 몰랐다. 그저 린디와 멀어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바랐다. 그래서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만 했다. 사춘기 소년에게 그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비밀상자에 담긴 린디에 관한 것들이 어머니를 좌절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예고 없이 더 큰 불행을 물고 온다. 누나가 죽음으로 집안의 어둠은 걷힐 줄 모르고 어머니의 우울은 깊어간다. 당시에 화자는 그것들의 실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열네 살의 소년에겐 당연한 일이다. 린디와 통화를 하면서 린디의 모습을 상상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일이 더 소중했다. 그래서 밤마다 린디의 전화를 기다린다. 동네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화자는 린디가 괜찮아진 건 아닐까 착각한다. 하지만 그럴 리가. 그동안 범인을 찾기 위한 화자의 말과 행동들이 오히려 린디에게 가장 큰 상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린디가 그 일로 인해 하루하루를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제 범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린디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화자는 너무 늦게 알았다. 린디가 어머니와 함께 동네를 떠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잊힐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재회한다. 남편과 함께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난 린디. 서로에게 아름답고 행복했던 배턴루지의 기억만으로 가득하다. 과거의 나쁜 기억은 사라진 것처럼. 하지만 린디가 얼마나 힘겹게 그 시간을 통과했을지 알지 못한다. 사건의 피해자로 스스로를 버티며 살았을 시간들.


소설은 린디의 사건을 가장 중심에 둔 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삶의 층위를 보여준다. 1990년대의 배턴루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는 아주 훌륭한 사회소설이자 아름답게 아픈 성장소설이다. 순수하고 솔직한 사춘기 소년의 가슴 아픈 짝사랑의 기억뿐이 아니라 부모의 이혼과 가족의 죽음을 통해 조금씩 삶을 배우고 알아간다. 그때 밝히고 싶었던 진실이 누구를 위한 진실이며 진실이라는 게 과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일상을 공유한다고 해도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시간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일 수도 있다. 어떤 기억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진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하고 미묘한 삶을 생각한다. 사랑의 기억으로 회복 중인 삶에 대해서.


나아가 기억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기적을 일으켜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내 다시금 우리 옆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한 여자를 바라보게 한다. 그녀는 십 대 청소년 시절에 보았던 사람과 참 다른 사람, 훨씬 복잡한 사람이다. 기억이 있기에 우리는 그녀의 삶을 총체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어머니의 삶뿐 아니라 내 삶까지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한 희생. 우리가 겪어낸 고통. 우리가 어머니에게 안긴 고민. 어머니가 우리를 키운 방식. 그래 그래 그래.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다. 그것이 기억의 목적이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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