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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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넷 윈터슨의 장편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얀 마텔의 『얀 마텔 101통의 문학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넷 윈터슨이란 작가의 이름조차 몰랐다. 얀 마텔은 “어떤 책이든 우리에게 다른 삶을 살게 해주며, 다른 이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가르쳐 줍니다.”라고 말했다.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말인데 왜 이리 마음을 울렸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란 소설을 기억하고 있었고 덕분에 읽게 되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란 제목에서 이미 오렌지만을 과일이라 주장하는 이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가 등장할 거란 걸 알 수 있다. 뻔한 예상하다. 그러나 스스로 오렌지만이 과일이라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오렌지가 얼마나 좋은 과일인데, 왜 오렌지가 아닌 다른 과일을 선택하느냐고 강요 섞인 조언과 권유를 계속할 것이다. 나도 그럴지 모른다. 내가 좋은 걸 다른 이가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전부라 믿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에는 오렌지 말고도 다양한 과일이 있다는걸. 설령 세상에 과일이 오렌지 하나만 존재한다고 해도 그 오렌지를 거부할 수 있다고.


소설의 주인공 ‘지넷’의 어머니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최선을 다해 지키려 하고 그 안에 입양한 딸 지넷을 가두려 한다. 아니, 자신이 세계를 완성하려고 지넷을 입양한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넷과의 충돌은 당연한 일이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구약 성서 「신명기」부터 읽도록 가르쳤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규정해 놓은 삶, 그것이 선이고 정의였다. 그게 무엇이든 모든 걸 다 흡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아이 지넷에게 세상은 얼마나 좁고 답답했을까. 귀가 안 들리는 지넷에게 성령 충만한 거라고 말하는 어머니라니.


지넷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품었던 기대는 무너졌다. 학교에서 지넷은 별종인 학생이자 왕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지넷 탓이 아니다. 존재와 동시에 어머니에게 세뇌당한 세계가 지넷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단 숨에 그것과 결별하고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지넷은 여전히 교회에 나가고 어머니를 돕고 신을 위해 일한다. 그러나 지넷은 더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고 어머니가 항상 건네준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깨우친다. 열여섯 살의 지넷의 눈앞에 나타난 소녀 멜라니를 향한 마음은 사랑이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서로를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 지넷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비롯한 교회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여자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죄이고 악이었다.


집을 나온 지넷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트럭을 운전하고, 장례식 일을 돕고,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생활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병원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다. 시간이 흐르고 지넷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철학적으로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니까.”(285쪽)라고 말하지만 너무 늦었다.


소설은 지넷이 자신의 내면에 다다르고 완성하는 자전소설이며 성장소설이자 여성 소설이다. 창세기에서 시작해 롯기로 끝나는 목차를 보면 성경 소설이라 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지넷이 스물다섯 살에 출간한 소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놀랍고 대단하다. 그러니 십 대 소녀의 반항기, 세상을 향한 당돌한 몸짓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소설이다. 지넷이란 이름이 만들어갈 세계의 시작이라고 할까.


세상엔 수많은 형태의 사랑과 애정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함께 지내기도 한다. 이름은 주는 것은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이는 본질과 관련된 것이며 힘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사나운 밤에 누가 당신을 집으로 부르겠는가? 당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뿐이다. 낭만적 사랑은 싸구려 소설로 희석되어 수천 권 수만 권의 책으로 팔린다. 어딘가에서는 낭만적 사랑이 여전히 원서와 같은 석판에 적혀 있다. 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바라다고 건너고 뙤약볕 아래에서의 고생도 마다 않고 내가 가진 전부를 줄 것이다. 그러나 남자를 위해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은 파괴자가 되려고만 하지 결코 파괴되지는 않으려 하니까. 그래서 남자들은 낭만적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리고 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282~ 283쪽)


나는 당연히 지넷을 응원했지만 엘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엘시는 교회의 다른 어른과 달랐다. 귀가 아파 병원에 있을 때도 멜라니와의 사건으로 지넷이 비난받을 때도 엘시는 일방적인 무리들과 달랐다. 어린 소녀 지넷에게 유일한 어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병원이 아니라 지넷 곁 가까이 있었더라면, 그녀의 죽음이 조금 더 늦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크고 아쉬움이 남는다.


“A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B일 수도 있는 거야.”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는 거야.” (61쪽)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진리, 그 아름다운 가치를 오직 엘시만이 지넷에게 알려주었다. 엘시가 지넷에게 들려준 말들이 분명 지넷을 든든히 지켜주었을 거라 믿고 싶다. 엘시의 말은 여전히 힘이 된다. 지금을 살아가는 수많은 지넷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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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0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구절은 다시 읽어도 좋네요. 저도 엘시가 안타까웠어요.... 지넷 윈터슨은 그래도 주변에 좋은 사람이 좀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자목련 2024-04-04 11:39   좋아요 0 | URL
제목만 기억하고 있던 소설인데 잠자냥 님의 리뷰 덕분에 읽게 되었어요.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기회가 닿으면 읽어보고 싶고요^^

독서괭 2024-04-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령 세상에 과일이 오렌지 하나만 있더라도 거부할 수 있다!! 👍👍👍

자목련 2024-04-04 11:41   좋아요 1 | URL
당당하고 독립적인 삶을 생각해요! 이 소설 흥미롭고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