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속절없이 무너져내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조심해야 한다. 남김없이 다 쏟아낼지도 모르니까. 아무나 붙잡고 보기 흉한 흉터로 남은 상처에 대한 사연을 하소연할 수도 있다. 유디트 헤르만의 단편 소설 『레티파크』 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일곱 편의 짧은 이야기가 왠지 하소연 같기도 하고 넋두리 같기도 한 느낌. 처음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던 분위기와 감정은 소설의 것이 아닌 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몇 개의 짧은 이야기를 읽노라니 그 흥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소설 속 인물은 자신의 히스토리를 전부 보여줄 생각이 없다. 물론 인물과 인물의 관계, 과거의 이력을 일부러 숨긴 건 아니다. 내밀한 감정을 비밀스럽게 보일 듯 말 듯 감춘다고 할까.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어떤 슬픔이나 상실에 대해 적극적인 설명이나 표현을 하는 순간 삶이 구차해진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래서 어떤 이는 그 허탈함과 절망을 말이나 행동으로 끊임없이 보여주고 어떤 이는 그저 듣거나 보고만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면할 수 없어서다. 어찌할 바 모르는 그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기에.


떠난 남자를 기다리는 이에게, 그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듯 서성이는 여자에게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말하지 못하는 마음. 과감하게 떠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이별과 상실의 경험이 없는 이라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페티시」 속 엘라에게 아이만이 “우린 출발해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별과 상실을 확인하는 게 두려운 엘라와 다르게 「어떤 기억들」 속 여든두 살의 그레타는 그 모든 일을 다 경험한 할머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세입자 모드와 단둘이 산다. 과거에는 가족과 살았고 다른 세입자도 많았다. 그레타는 새 세입자를 찾지 않는다. 모드는 이주 동안 떠나있다 돌아와야 하는데 혼자 남을 그레타를 걱정한다. 그런 모드에게 그레타는 이렇게 말한다.


살다 보면 정말이지 몹시 기묘한 일들이 다시 떠오르곤 해요. 순간순간 나의 꿈들이 깨어났던 만. 분명 나는 잘 있을 것예요. 혼자서도, 걱정할 것 없어요. 잘 다녀와요. (143쪽)


소설 곳곳에는 그레타가 살아냈을 삶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세입자 모드를 면접할 때 했던 질문들(책을 읽나요, 노인과 관계를 맺어본 적 있나요. 마약을 하나요, 인생을 즐기나요, 등등)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레타는 두려울 게 없어 보인다. 설령 모드가 떠난 사이 자신이 죽더라도 말이다. 이상한 건 그레타의 말에 괜히 독자인 내가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앞으로 다가올 삶의 기운이나 감각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온다는 걸 믿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런 믿음이 생긴다면, 확신을 갖는다면 삶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을까. 그게 가능할까. 면접은 다가오는데 한 아이는 아프고 다른 아이의 볼도 뜨겁다. 친구 닉에게 두 아이를 부탁하고 테스는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 테스가 면접을 보러 간 사이 닉은 두 아이와 종이비행기를 만든다. 돌아온 테스에게 닉은 종이비행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테스는 닉에게 자신이 면접해서 한 말을 들려준다. 어떤 기대도 절망도 없이, 그러나 단호한 테스의 의지가 느껴진다.


진실. 나는 사람들한테 진실을 말했어. 달리 뭘 말하겠어? 나는 아이가 둘 있다고, 싱글맘이라고, 정신 병동 경험이 있다고 말했어. 나는 이렇게 표현했어. 나는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이제 다시 나가고 싶다고. 일을 하고 싶다고. 나는 말했어. 저는 씩씩해요, 저는 투지가 있어요, 저는 낙관적이에요. 저는 안정적인 사람이고 평정심을 가졌어요. (「종이비행기」, 97쪽)


그녀가 면접에 합격하고 출근에 대한 안내를 전할 전화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희망할 뿐이다. 테스가 걱정되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소설 밖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해버리면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살면 살수록 배우고 깨닫는다. 그래서 「교차로」속 패트리샤는 집을 비운 사이 침입해 난동을 피운 옆집 세입자의 십 대 아들을 선뜻 고발할 수 없다. 끊임없이 고민한 후에야 결정을 내리면서도 번복하게 되고 후회하는 일,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


그녀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심연이라고. 이렇게 말할까, 아니면 다르게 말할까, 아니면 아예 그냥 말하지 않는 게 상책일까. (「교차로」, 216쪽)


하나의 답이 정해진 게 아니고 구체적이고 정확하지 않아서 신경을 끊을 수 없게 만든다. 자꾸 생각한다. 이미 지난 사랑에 대해, 지난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버릴 수 있다고 다짐해다가 한순간 생각에 빠져드는 걸 반복한다. 미련할 정도로. 그렇다. 유디트 헤르만은 삶의 대부분이 그러지 않냐고 말한다. 삶에는 모호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자 2024-04-0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 리뷰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24-04-08 19:59   좋아요 1 | URL
달자 님, 많이 아쉬운 리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디트 헤르만의 다른 소설을 이어서 읽고 싶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