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해안과 섬을 이어가는 식으로
섬과 해안과 지도를 맞추는 것처럼
낱낱의 외곽을 새기며
앞뒤의 가능성이 앞뒤를 반박하지 못하도록
함부로 이유를 빌려다 썼다
그것을 잠깐 부르는 게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목적지 중 <계속 열리는 믿음>(75쪽)

최근 몇달동안 술 생각이 별로 없었다. 남들 마시는 것만 봐도 즐거웠다. 어젠 즉흥적으로 남편의 치맥 제안에 일찍부터 마시기 시작해서 정말 이른 시간에 취한 채 돌아와 잔 것 같다. 분명 세탁소에서 세탁물이 많으니 빨리 찾아가 달라는 문자도 받았는데 그것도 찾아 오지 않았고 오전에 수영 다녀온 가방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욕실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고보니 애들 저녁밥도 안 챙긴 게 생각났는데 그건 다행히 남편이 챙겨 먹이고 설거지까지 예쁘게 해놓았다.
속이 쓰리다. 남편 말로는 우리 둘이 생맥 10잔을 마셨다고 하니 아무래도 네잔 정도는 내가 마셨을 것 같다. ˝딱 한잔만˝ 하는 그 버릇이 어디 갔을까!
결국 다음주 마지막 수업엔 차를 놓고 갈까했으나 차를 다시 가져가기로 한다. 술을 조금만 마실 것 같지 않다. 분명 광기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음 한편 좋은 사람들과 은근 취기를 즐기는 것도 좋을텐데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래도 너무 먼곳에서의 만취는 곤란하겠다.


아침마다 세상을 뒤집는
여자가 있다 목장갑에 기름보다
콧물 더 많이 묻고
바람이 붉은 포장을 건드리면
얼룩으로 이력을 쓰는 앞치마 한 장
먼저 달려가 펄럭인다
오른쪽 문짝이 삐걱거리는 트럭으로
반죽을 실어다놓은
여자의 사내는 골목 어귀에서
담배 한 대 다 태우고 돌아가고
뒤집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기름방울은
마을버스가 닿지 않는 동네 엄마
없이 밥을 먹는 아이
얼굴에 주근깨 자국으로 번진다
날마다 남은 잠을 끌고 온 사람들은 말없이
가스불을 바라본다 거리를 채질하는 바람
두 볼을 스쳐
가도 세상을 벼르본 날
하루도 없다 그저 제향 같은 연기 더러 오르고
여자의 가난으로 구운
손바닥만 한 세상을 받아든 사람들은
기름방울처럼 길 위로 스며들었다
(이하 중략)
겨울을 뒤집느라 아침마다 혼자
뒤집히던 그녀
기름방울 속에 누렇게 떠 있었다
-세상을 뒤집는 여자 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70~71쪽

신용목 시인의 시집을 머리맡에 둔지 며칠되었다. 이제야 읽는다.

방도 때로는 무덤이어서 사람이 들어가 세월을 죽여 미라를 만든다
-오래 닫아둔 창 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4쪽

아! 하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런 것이 시인의 시선이고 생각이고 말이구나! 빠져드는 구절이 꽤나 많다.
시라는 걸 직접 써보며 든 생각은 시는 정말 아무나 쓰는 게 아니였구나였다. 아무리 생각하고 머리를 쥐여짜도 감각이 살아있지 않은 시어들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를 느꼈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쓴 것들인지 알게 되어 시를 읽는 마음이 조금 더 공손해진 느낌이다.
신용목 시인의 시집을 처음 읽어보는데 매력적이다. 빠져들게 하는 싯구들이 정말 많다. 시를 쓰려면 정말 이 정도는 쓰고 싶다할만큼 부러운 마음도 든다. 아무래도 시인에게 반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이다.
다시 시집을 펼쳐야겠다. 노트에 옮겨 적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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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3 0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23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4-23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섬님은 진짜 시를 좋아하시는것 같아요.
시를 읽고, 느끼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저는 <그 바람을 다..>을 대출했다가 그대로 반납했다는 슬픈..... 과거.....

꿈꾸는섬 2016-04-23 21:39   좋아요 0 | URL
아! 정말요? 전 이 시집 읽으면서 완전 반했다죠. 신용목 시인님처럼 쓰고 싶어요.ㅎ 거의 불가능하겠지만요.

후애(厚愛) 2016-04-2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꿈꾸는섬 2016-04-23 21:41   좋아요 0 | URL
후애님~^^감사해요. 이번 주말은 시월드와 함께라죠ㅎㅎㅎ
그저 웃어요.^^
후애님 행복한 주말되세요.^^

순오기 2016-04-23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게 마셨으면 좋아요, 이젠 속은 풀린 거죠?^^ 나도 오랜만에 막걸리 두 잔, 생맥 한 잔, 병맥 한 잔...목.토 이틀을 마셨네요.ㅋㅋ

꿈꾸는섬 2016-04-23 21:4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요새 숲은 정말 예쁘겠죠~~~
막걸리와 생맥과 병맥ㅎㅎ 이틀동안 즐거운 자리가 있었나봐요.^^
오랜만에 남편과 데이트를 즐겼는데 너무 취해 일찍 잠들어 애들에게 미안했어요.ㅎ

수이 2016-04-24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기!!!!!!

꿈꾸는섬 2016-04-24 07:13   좋아요 0 | URL
ㅎㅎ디오니소스의 그것!
 

죽어가는 것과 죽음은 구별해야 해. 아무런 중단없이 계속 죽어가기만 하는 게 아니야. 건강하고 몸이 좋다고 느끼면 보이지 않게 죽어가고 있는 거야. 확실한 종말이 반드시 대담하게 선언되는 건 아니야. 아니, 너는 이해 못해. 늙지 않았을 때 노인에 관해 이해하는 유일한 것은 그 사람들한테 그들의 시간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뿐이야. 그러나 그것만 이해한다면 그 사람들을 그들의 시간 속에 얼어붙게 만들게 되고, 그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직 늙지 않은 사람들에게 늙는다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다는 뜻이야.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서, 늙는다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해. 과거에 존재한 것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너는 여전히 존재하고, 이미 존재했다는 것. 지나갔다는 것에 시달리는 만큼이나 네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너를 꽉 채우고 있다는 것에 시달려. 노년이란 걸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 생명이 위기에 처하는 것이 그냥 일상적인 상황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말이야. 곧 마주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피할 도리가 없어. 영원히 자신을 둘러싸게 될 정적을. 그것만 빼면 모두 똑같아. 그것만 빼면 살아 있는 한 불멸이야.(50~51쪽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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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3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4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전모임 명목으로 오전 10시에 만나 오후 3시40분쯤 헤어졌다.
말도 많이 하고 많은 이야기도 듣고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난 목요일 받아온 재미난 책들이 계속 나를 기다리고 그나마 가장 한가했던 화욜일을 이렇게 소비하고나니 허탈하다.
이기호의 <웬만해선~>은 11일 밤 늦은줄 모르고 한번 붙잡았다가 하도 재미있어 내리 읽고 잤다.
내가 요즘 애정하는 s, j, d님이 애정하는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은 미모로운 j님이 선물해주셨고 워낙 칭찬이 자자하여 기대에 부풀어 뒤늦게 들어와 오후에 잠깐 집어들었는데 아이들 집에 오고 저녁 먹이고 이 일 저 일 하다보니 호흡이 끊겨 잠시 미뤄두었는데 이 야심한 밤에 읽기 딱 좋은 듯 하다.
그리고 s님의 책장개방으로 늘 좋은 책을 돌려보게 해주시는 덕분에 얻게 된 <당신이라는~>은 제목처럼 차분하고 조용하고 여유있을때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밤에 찬찬히 시 한편 읽고 자야겠다. 곱씹는 맛이 좋은 정영효시인의 <계속 열리는 믿음>... 이 시인이 쓰는 에세이는 어떤 느낌일까? 진중할까?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같은 톡 쏘는 탄산수같은 맛일까? 시인의 일상도 궁금하지만 시인의 생각이 쉽게 읽히는 에세이를 만나보고싶단 생각을 한다. 분명 기대해도 좋은 글이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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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4-13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애정하시는 d가 저라 믿으며....
제가 애정하는 필립 로스를 읽으시는 꿈섬님~
제가 애정합니다. ^^

꿈꾸는섬 2016-04-14 23:27   좋아요 0 | URL
ㅎㅎ단발머리님 눈치도 빠르셔라~~
필립 로스를 처음 읽는데 다른 작품들도 궁금하네요.
부지런하지 못해서 언제쯤 찾아 읽게 될지 모르겠지만 쉽진 않지만 매력있어요.^^
 

서촌 류가헌 갤러리에서 신현림시인과 함께하는 낭독의 밤에 다녀왔다.
4월, 어느새 따뜻해진 날씨에 류가헌 갤러리 마당에 모여 앉은 저녁 시간도 아늑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진한분홍 원피스에 연한분홍 양말을 신은 시인의 모습은 평소 알고 지내는 옆집 언니처럼 정겨웠다.
시를 읽기 전에 갤러리에 전시중인 사진들을 큐레이터의 설명과 함께 둘러 보았다. 작품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고 처음엔 시쿤둥한 모습이던 아이들은 어느새 사람들 틈을 헤집고 앞에 나가 있었다.
알라딘 문화초대석에서 1인 초대에 당첨되었는데 관계자분의 배려로 아이들도 함께 가게 되었고 정말 뜻깊고 의미있으며 소중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시인이 사진책도서관을 뒤로하고 우리를 향해 앉았고 시인을 향해 둘러 앉은 독자들은 시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시인의 면모에 다시한번 반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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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3 0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뜻깊은 봄밤 보내고 오셨네요.시도 류가헌도 섬님과 아이들도 넘 아름답습니다♡

꿈꾸는섬 2016-04-14 23:28   좋아요 0 | URL
ㅎㅎ뜻깊은 봄밤~^^
아름답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 2016-04-13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낭독을 듣고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고....
이런 특별한 경험을 어린 나이에 한 꿈섬님 두 자녀가 부러운데요~~

꿈꾸는섬 2016-04-14 23:29   좋아요 0 | URL
특별한 경험이 앞으로도 많았으면 좋겠어요.^^

hnine 2016-04-15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현림 시인의 시와 사진과 에세이를 예전부터 보고 읽어왔어요. 그녀의 어려웠던 지난 이야기가 기억나서 지금도 신현림 시인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봐도 마음이 짠 하네요.
꿈섬님 오랜만에 뵈오니 반가와요. 아이들도 많이 컸고요.
저 예쁜 꽃도 오래 눈길을 붙잡습니다.

꿈꾸는섬 2016-04-14 23:32   좋아요 0 | URL
나인님 정말 오랜만이죠.^^
아이들도 저도 많이 자랐어요.
신현림시인 정말 열심히 사시더라구요. 사진 작품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새책도 나온다고 하구요.
오랜만에 들러 반갑게 인사해주셔서 감사해요.^^
 

 인터넷서점 알라딘의 문화초대석에서 신현림 시인과 함께하는 낭독의 밤, 이벤트에 당첨되어 류가헌갤러리에 다녀왔다. 서촌 류가헌갤러리는 사진전을 주로 하는 곳으로 한옥으로 되어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며 아이들 동반을 흔쾌히 허락해준 관계자 덕분에 아이 둘을 데리고 서울 나들이를 다녀오게 되었다.

4월, 어느새 따뜻해진 날씨에 류가헌갤러리 마당에 모여 앉은 저녁 시간도 아늑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진한분홍 원피스에 연한분홍 양말을 신은 시인의 모습은 평소 알고 지내는 옆집 언니의 모습처럼 정겨웠다.

시를 읽기 전에 갤러리에 전시중인 사진들을 큐레이터의 설명과 함께 둘러보았다. 그냥 무심히 볼 때와 다르게 작품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고 처음에는 시큰둥한 모습이던 아이들이 어느새 사람들 앞에 나가 설명과 그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마당을 향해 툇마루에 걸터앉거나 마당을 둘러싼 보조의자에 자리하고 앉았고 시인은 사진책 도서관을 뒤로하고 우리를 향해 앉았다. 시인을 향해 둘러앉은 독자들은 시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시인의 면모에 다시 반하는 시간이었다.

스무 명 남짓한 독자들과 시인의 만남은 오붓하게 느껴졌다. 봄밤에 어울리는 꽃도 한 송이씩 선물해주어서 기분이 한결 들뜨는 것 같았다.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에 실려 있는 시 중에서 네 편의 시를 낭독하였다. 처음엔 백석의 <선우사>를 가장 늦게 온 미모의 독자가 낭독하였다. 전기의 <매화초옥도> 그림을 함께 보며 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벗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소제목만으로 우리의 시낭독회를 여는 시로 맞춤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백석, <선우사>중) 눈처럼 피어난 매화꽃 풍경도 아름답지만 아직은 쌀쌀한 초봄, 하얗게 눈 덮인 산길을 헤치며 벗을 찾아가는 선비의 모습은 가슴 찡하도록 아름답다는 시인의 이야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고형렬 시인의 <꽃의 통곡을 듣다>를 낭독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갔으니 눈에 쉽게 띄었고 시인은 아들에게 한번 읽어 보겠냐고 하셨지만 부끄러워하는 아들을 대신하여 엄마인 내가 낭독하기로 하였다. 대신 마당의 한가운데에 아들과 등을 지고 서서 낭독해달라고 부탁하셔서 그렇게 하였다. “꽃의 통곡을 듣다/ 밖에서 누가 부르니까 꽃이 피는 겁니까/ 누가 찾아왔다 간다 나를 찾아올 사람들은 죽었는데/ 주먹을 자기 얼굴 앞에 가만히 올리고/ 가운뎃손가락 마디로 현관문을 똑똑똑 노크한다/ 먼 곳이다 작년의 그루터기와 얼음을 밟고 오는/ 그 신의 증인들일까/ 나는 대답을 놓쳤다 안에 주인 분 아니 계십니까/ 혀는 있는데 언어가 없어 대답할 수 없었다/ 물은 고여 침묵한다/ 방문이 실례가 된 적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나는 오늘, 안에 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안에서 부름켜가 인간의 마음을 듣고 있었다/ 숨어 있는 것이 있다면 대답 않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꽃이 오는 길이 매우 춥고 그 시간은/ 우리가 태어나던 침묵의 흐름입니까/ 그럼 밖에서 누가 부르지 않아도 꽃은 피는 것입니까/ 하지만 가지에 저렇게 많은 꽃이 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등 뒤에 그리고 뇌 속에/ 그들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전문) 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 이브 탕기의 그림 <엄마, 아빠가 다쳤어요>와 함께 읽은 이 시는 “저렇게 많은 꽃이 피는 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표시”라는 구절에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로 낭독한 시는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현대의 기도>라는 시였다. 이 시의 거친 언어로 남성독자가 낭독하기로 하였는데 시인의 왜 혼자 왔냐는 질문에 남성독자는 시는 혼자일 때 더 감흥을 느낄 수 있다며 그 시간을 즐기러 왔다고 하였다. 뭉크의 <절규>와 함께 이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본주의 사회의 적나라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를 처음 접했던 스무 살 무렵의 충격이 지금은 많이 완화된 것을 느낀다는 시인의 말에 나도 그렇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림이라 아이들도 아는 그림이라고 아는 척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신현림 시인의 <양말 한 마리> 시를 시인이 직접 낭독하였다. “당신이 선물 준 양말을 버릴 수가 없어/ 해진 곳을 기워 가니 비단길처럼 아름다워요/ 한 땀 한 땀 기울 때마다/ 돈황 가는 길목/ 명사산 모래소리가 흘러내려요/ (중략) / 가엾이 여기는 사랑 끝에서 날개가 자라고/ 우리는 서로 버리지 못할 양말이 되어/ 붉은 저녁 하늘을 맘껏 날으며 흘러내려요” 어긋나고 합쳐지는 사랑의 속성을 표현한 이 시는 시인이 정말 양말을 기우며 쓴 시라고 하였다.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연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한 때”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를 읽는 밤은 깊어가고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우리는 어느 누구 하나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낭독회가 끝나고 준비해간 책에 시인의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시인과 포옹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아이들은 처음 경험하는 광경이 낯설기도 하였겠지만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그 흥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혼자 즐기는 것도 좋았겠지만 엄마가 가는 곳을 구경하고 싶어 하던 아이들과의 동행은 더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아이들이 처음 가본 한옥갤러리, 사진전 그리고 시인과 함께하는 낭독회의 추억이 어른이 되어서도 오롯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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