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논술 수업을 하러 다녀왔다. 우리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수두에 걸렸고, 같이 수업하는 아이들은 중간고사에 뒤풀이 여행까지 바빴던 탓에 거의 한달만에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제 남편은 오랜만에 외박을 하고, 일 때문이긴 했지만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채 뒤척였다. 어제 돌아온 남편은 피곤하다고 저녁 먹고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TV를 보다 잠이 들었고, 아이들 뒤치닥거리하고도 잠이 잘 오지 않았던 밤이었다. 그러면서 설핏 잠이 들었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우리가 이사갈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이상한 꿈......이사에 대한 강박관념이 작용했나보다 했다.
몸이 피곤하고 귀찮아 친정에 아이들을 맡겨둘까 하다가 큰언니네 집에 아이들을 맡겨두고 작은언니네 집으로 갔다. 조카에게 줄 책들을 몇권 챙기고, 김치 냉장고 가득한 작년 김장김치도 챙겨서 가지고 갔다. 어찌나 무겁던지 후회가 밀려왔다.
수업을 끝내고 아이들을 데리러 큰언니네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차 빼기 좋은 자리에 놓으려고 일부러 음식물 쓰레기통 옆쪽에 놓았다. 우리 언니네는 오래된 주공아파트에 살고, 주차공간이 늘 부족해 이중주차해놓기가 일쑤다. 차를 세워두고 아이들을 데리러 올라갔는데 아이들은 오랜만에 이모네 집에서 조카들과 놀이에 흠뻑 빠져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도 사실 언니네서 저녁을 떼우고 가고 싶었다. 남편은 오늘 함께 일하시는 분들이랑 술자리가 있다고 했고, 아침에 지은 밥으로 점심까지 먹고났으니 집에 돌아가 밥하기가 싫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저녁 떼우고 집에 돌아가 아이들 감기약 먹이고 양치질 시켜 재울 욕심이 가장 컸던 것이 사실이다. 저녁 먹고 설거지거리가 너무 많아 애들 봐준 언니한테 미안해서 설거지까지 다하고 나니 8시 10분쯤 되었다.
얼른 서둘러 집을 나서서 차를 뺴려고 갔는데 내 뒤에 차가 턱하니 서있다. 도저히 밀어도 안 밀리고, 전화번호조차 없었고, 밀었다고 쳐도 도저히 차를 뺄 수 없는 상황이라 경비실에 가서 뒤의 차 때문에 차를 뺼 수 없다고 했더니 경비아저씨가 상황을 보셨다. 그러더니 난감한을 표정을 지으신다. 아마 인터폰하면 엄청 싫어할거라는 거다. 그러면서 직접 해결하면 안되겠냐는 것이다. 옆에서 작은언니가 엄청 유명한 여자란다.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비상식적이니 사람이란다. 큰언니네서 되도록이면 자고 가란다. 하지만 집에서 자는 걸 선호하고, 아이들 감기약을 가져오지 않은 탓에 집에 꼭 가야했다. 또 큰언니네서 작은언니네 집까지 가는데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비도 내리고 내일 항암치료를 받아야하는 언니를 걸어가게 하기도 그랬다. 그래서 내가 차주인 댁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죄송하지만 차 좀 빼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기어 중립에 놓았는데 안 밀리냔다. 정말 안 밀렸다. 비도 내렸고, 차를 밀어도 차를 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차 죄송하다고 차 빼고 그 자리에 주차하시라고 말했다.
집에서 나온 아줌마가 어디 사냐고 큰소리로 말했다. 언니네 집에 왔다가 간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몇호에 사냐고 물었다. 솔직히 몇호인지 기억이 안났다. 복도식 아파트였고, 언니네는 이층 맨 끝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더니 어떻게 언니네 호수도 모르냐고 책망했다. 또 죄송하다고 했다. 그냥 거기가 거기라 호수를 외우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이 아줌마가 차를 빼러 직행하는게 아니라 경비실 문을 벌컥 열더니 머리가 거의 백발인 아저씨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낯선 사람에게 자기네 집을 알려줬다고 뭐라고 했다. 경비아저씨 상대하기 싫었지만 자꾸 속을 긁으니 아저씨의 항변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아줌마였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그런 게임 같았다. 사실 내 목소리도 엄청 크다. 따지기도 엄청 잘 따진다. 엄현히 따지자면 그 아줌마 잘못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죄송하다. 그러니 차 빼달라고 사정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마구 마구 싸웠을지도 모른다. 내 성격 또 그리 순하지만은 않다. 불의를 보면 못 견디는게 사실이니까.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미안하다고만 했다. 경비실 옆의 집의 아저씨가 문을 열고 한마디 하셨다. "아줌마, 도대체 별 것 아닌 걸로 매번 왜 그리 소리를 지릅니까?" 이 아줌마 그 아저씨 말에 꼬투리 잡으며 있는 말 없는 말 마구 쏟아내셨다. 머리 허옇게 센 경비 아저씨께 어찌나 죄송했는지 모른다. 입주민이 내는관리비로 월급받는 사람에 대한 무시와 멸시가 어찌나 심했는지......자기가 20년 동안 살았고, 방문객들은 그곳에 살지도 않으며 왜 그곳에 주차를 하냐는 것이다. 방문객은 저쪽 길가에나 차를 대고 들락거리란다. 알았으니 어서 차를 빼달라고 계속해서 얘기했다. 아이들이 비도 오고 너무 오래 기다렸다.ㅜㅜ
여하튼 그 아줌마 폭설 끝에 차를 빼러 가서는 저보고 밀어보랍니다. 제가 미쳤나요? 왜 밀어요? 밀어 봤거든요. 그래서 상냥하게 말했죠. 제가 힘이 약해서 그런가 정말 안 밀리더라구요. 했더니 그냥 차를 빼는 듯 하더니 엄청 야비하게 빼더군요. 제가 후진하면 들이받게 말이죠. 그래서 좀 더 빼달라고 했더니 운전도 못 하는게 차 가지고 다닌다고 또 소리 소리 지르더라구요. 저 운전 아주 잘 하지 않으니 웃으며 맞아요. 저 잘 못해요. 그러니 더 빼주세요. 했더니 아주 조금 빼더라구요. 제가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도 각이 안나온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확 빼더라구요. 정말 속에서 천불이 났지요. 그래도 또 참고 또 참았답니다.
사실 오늘 논술 수업 시간에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을 했지요.
그 순간, "건전한 이기주의와 건전한 이타주의"가 생각나더라구요. 자기만 아는 사람들을 이기주의자라고 부르잖아요. 하지만 건전한 이기주의자들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자기의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조율할 줄 알아요. 이타주의 또한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는 좋은 의미이긴 하지만 건전한 이타주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야 나도 타인도 모두 이익을 볼 수 있을테니까요.
아무리 죄송하다고 굽신거리긴 했지만 할말 거의 다 하는 전 차를 빼러 가는 도중 그 분께 "화내면 모든게 화가 된다네요." "웃으면 복이 온다잖아요." 등 거의 혼자말처럼 말을 흘렸죠. 물론 그 분 제가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며 어디서 지랄이냐고 하더라구요. 참 대단한 아줌마에요. 그때 제가 한 생각은 이 아줌마 참 불쌍하다였어요. 얼마나 많이 손해를 보고 살았으면 자신의 잘못도 남탓으로 돌릴까. 세상 살이 행복할 순간이 한번도 없었겠구나. 불쌍하다. 불쌍하다. 그랬지요.
제가 운전하며 돌아오며 들던 생각은 이 아줌마 늘 자신이 주차하던 공간에 다른 차가 서 있던게 짜증이 났던 거에요. 그래서 일부러 차를 뒤에 세우고 싸움 걸어오길 기다렸던 것 같아요. 인터폰하면 인터폰한다고 경비아저씨께 소리 지르고, 사람을 직접 올려보내면 올려보냈다고 소리를 지르는 거죠. 경비아저씨들 싫은 소리 듣기 싫으니 피하고 싶으셨을테고요. 그냥 언니네서 자고 올 걸 그랬나, 한편 후회도 했지요. 그래도 집에 돌아와 아이들 약 먹이고 양치질 시켜 재웠으니 얼마나 흐뭇하던지요.
살다보면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요. 큰 목소리로 따지고 들면 자신이 잘 하는 줄로만 알겠죠. 제가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이 얘기를 전하며 그랬죠. 그 아줌마는 자기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할까? 했더니 남편 말이 아마도 그렇지 않겠냐고 하더라구요. 대판 싸워주지 그랬냐구요. 근데 애들 보는 앞에서 그 아줌마랑 댓거리 하는 것 조차 창피했지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현수가 엄마, 책 읽고 자고 싶다고 해서 골라보라고 했더니 <손톱깨물기>를 현준이는 <아빠를 찾고 싶어요>라는 책을 가져왔고 잠자리에서 읽어 주었어요. 다 읽고나서 현수가 "엄마 아까 그 아줌마 귀신 같아서 무서워서 막 울고 싶었는데 참았어."라고 말했어요. "울음 참아줘서 고맙고, 아까 그 아줌마는 잊어줘."했더니 현준이는 "엄마가 나를 혼낼때 그 아줌마 같이 소리 질렀어요."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전 현준이에게 전 그 아줌마와 같은 사람이었던 거에요. 그래서 현준이에게 미안하다고 다음부터는 엄마가 조심할게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마음 넓은 아들은 "엄마, 내가 용서할게."하더라구요. 그 아줌마의 모습이 아들에겐 나의 모습이었다니......그리고 한참 후 아들이 말하길 "근데 엄마, 내가 잘못할때만 그랬어. 내가 잘할땐 안 그랬어." 하더니 쿨쿨 잠이 들었어요.
나 자신도 뒤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어요. 화내며 살 필요 없잖아요.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이 웃어주고, 좀 더 너그러운 엄마가 되어야겠어요. 아이들 마음을 잘 읽어내지 못해서 늘 문제지만, 이제부터라도 더 많이 노력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