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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평점 :
< 1 >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어느 날, 친구들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논쟁은 소설을 쓰는 친구의 신세한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제법 과격한 어조로 소설을 읽지 않는 요즘 세태를 비난했다. 그리곤 지난 시절 함께 글쓰기를 공부했던 친구들마저 책을 읽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을 힐난했다.
그러자 소설을 쓰지 않는 친구 하나가 반론 혹은 변명을 했다. 요즘 세상에서 소설이 과연 얼마만큼의 기능을 하고 있는가, 이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소설 따위를 읽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소설을 쓰지만 무명에 가깝고, 널리 알려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 나는 중간에 끼인 상태로 말했다. 소설을 읽지 않는 세태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소설은 그 사회의 문화적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임이 전적으로 독자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소설가들이다. 요즘 독자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최근 소설이 재미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애초부터 맞고 틀림이 문제가 되지 않는 논쟁이었다. 아니, 논쟁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신세한탄과 변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 2 >
김중혁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 때의 논쟁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가장 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맞다. 바로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김중혁의 소설에서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 3 >
좀 거창하게 말해보자. 우리 소설(사실, 소설뿐이 아니다. 우리 영화나 드라마, 만화, 음악 등등 대부분의 예술장르가 그러하다.)은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이 없다. 유럽처럼 장중한 스케일이나 문화적 깊이도 없고, 미국처럼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장르소설도 없다. 그뿐인가? 일본처럼 아기자기하면서 재기발랄한 것도 없다.
무엇 때문인가?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단순한 방향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장르소설은 상업적이라고 무시하고, 태생을 간과한 채 서구의 이론을 적용시켜 평론가나 연구자들의 눈에 드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정작 독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도 못하면서, 독자들의 수준이 낮다고 투덜거리기만 한다.
잘라 말하겠다.
먼저 독자의 요구를 파악해야 한다. 이제 소설에도 마케팅의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소설은 문화상품과는 다르다. 온전한 예술 행위로의 소설쓰기, 즉 철저히 자기만족을 위한 소설쓰기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은 '상품성을 가진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을 통해, 내 과격한 논의를 방어하고자 한다.)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찾는 작업이다.
마케팅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소비자의 요구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제품이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이 소비자의 요구에 어떻게 부합되는지를 어필해야 한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면 이렇게 된다.
소설이 읽히기 위해서는, 그래서 소설책이 잘 팔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독자들의 요구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문제이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상업주의에 영합하지는 말인가?” 이 물음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A) 이는 독자들을 무시하는 얼치기 계몽주의적인 관점이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독자 역시 감식안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경우 그들의 안목이 보편적이며 타당하기까지 하다. B) 또한 이는 위선적인 자기기만이다. 상업주의를 하기 싫다면, 독자들이 책을 보지 않는다는 둥의 넋두리를 떨 필요가 없다. 그냥 자기 돈을 책을 찍어 주변 사람들과 돌려 읽으면 된다. 뭐, 운이 좋아서 다른 사람도 읽어주면 좋고, 아니어도 서운할 것 없고. 오히려 이런 자세가 더 쿨하고, 예술가답다.)
< 4 >
그렇다면 독자의 요구는 무엇인가?
4-1. 선정성?
많은 창작자들의 착각 중의 하나가 선정적이기만 하면 독자들이 다 좋아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소설 독자들은 야설 독자들과 분명히 다르다. 소설이 제아무리 선정적이라고 하더라도 포르노보다 더 하겠는가?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읽을 시간에 열심히 다운로드를 받고 있을 것이다.
4-2. 새로운 시대?
그렇다면 시대 문제인가?
요건 좀 고민해볼만 하다. 그리고 보다 깊이 있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시대 문제를 다루긴 하지만, 그것은 예전의 것들과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니, 한국전쟁이니, 분단상황이니, 반독재투쟁이니, 산업사회의 폐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많은 작가들이 더욱 많은 작품을 통해 다루고, 다루고, 또 다루었다.
엇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같은 이야기라면 이야기 방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여기에 성공한 작품으로 김영하의 소설「검은 꽃」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김중혁의 소설들에서는 새로운 이야기 방식이 없다. 짐짓 새로워 보이는 이 작품집은, 적어도 이야기 방식의 측면에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모든 서술이 기존의 소설에서 보아왔던 것이다.
이야기 방식을 바꾸는 것 말고도, 새로운 사회 문제를 찾아내는 방법도 있다. 20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문제. 산업화 정도가 아니라, 고도산업화된 지식사회의 문제. 이것은 이야기거리 자체가 새롭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 하다.
김중혁의 작품들은 이런 측면에 어느 정도 부합된다. 내가 김중혁이란 작가에게서 찾아낸 가장 큰 미덕은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 시대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소설은 ‘접근’을 할 뿐이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부’하거나 ‘성찰’하거나 ‘논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 작품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멍청한 유비쿼터스」와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해커의 활약상, 혹은 전산보안시스템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새롭지만, 그 문제의 기원을 탐구하지 않았고, 그 영향력 역시 간과해버렸다는 점은 끝내 아쉽다. 그래서 제법 독설적인 문명진단이 될 수도 있었던 소재가 그저 ‘시건방진 해커의 액션 활극’이 되어버렸다.
4-3. 삶?
범위를 좁혀볼 필요가 있다. ‘시대’라는 용어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독자도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결국은 모두 ‘삶’의 문제라고. 맞다. ‘삶’이야말로 소설이 꾸준하게 추구해왔던 문제가 아니던가.
‘삶’의 범위를 생각해보자. 흔히 이 단어는 ‘현실’이나 ‘생활’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지만, 꼭 그런 것들하고만 관련되지는 않는다.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톨킨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것처럼, 무의식과 상징 그리고 환상도 역시 ‘삶’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삶이란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렇다면, 소설도 역시 이 현실과 환상의 두 가지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중혁의 소설은 이 균형감각이 부족하다. 그의 작품에서 ‘현실’은 찾아볼 수 없다. 단순한 소재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 혹은 경험과 이어지는 문제이다. 나는 이 작가를 알지 모르지만, 단순히 작품만을 가지고 평가하자면, 사회 경험이 부족하다. 아니,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전무하다. 즉, 그는 문학인으로의 삶을 살았을 뿐이지,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살지 않은 듯 하다. 그러니 생활인이 대부분인 독자들에게 이런 글이 먹힐 리 없다.
물론 이는 김중혁 만의 문제는 아니다. 1990년대 이후의 소설가들이 대부분 그러하지 않았던가? 윤대녕의 댄디즘이나, 여성작가들의 낭만적 불륜이야기 등등,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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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이것이 우리 소설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활에 빠진 허구. 무릇, 거짓말의 기반은 현실이다. 가장 그럴싸한 것이 가장 빼어난 거짓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 소설은 그 기반을 잃어버렸다.
‘소설가’라는 명칭은, 멋진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들의 거짓말이 다른 이들을 멋지게 속이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소설가가 아니다. 소설가들이여 먼저 생활을 찾자. 그래야 생활인인 독자들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중혁에게, 그리고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소설가들에게 전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