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책과 환경을 제재로 삼고 있는 소설/동화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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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효형출판 / 2002년 2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2003년 10월 21일에 저장
구판절판
환경소설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책. 하지만 번역의 문제와 정서적인 문제로 인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2003년 10월 21일에 저장
절판

세풀베다의 가장 큰 장점은 명확한 논지이다. 그는 단호하고 명쾌한 논리로 환경문제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도요새에 관한 명상- 김원일 중단편전집 3
김원일 지음 / 문이당 / 2005년 7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03년 10월 21일에 저장
품절
우리 소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환경문제륻 다루고 있는 작품. 다소 도식적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그 중우한 깊이를 느껴볼 수 있다.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루이스 세뿔베다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5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03년 10월 21일에 저장
구판절판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환경문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놓은 책. 아이들에게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는 최초의 책으로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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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항상 아픔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아프기 때문에, 고통스럽기 때문에, 아름답기도 하지요. 성장의 아픔을 담고 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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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5년 11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2003년 08월 18일에 저장
절판

지금 뒤돌아보면 어떤 느낌일까? 하지만 이 책은 내가 고등학교 때 달달 외우고 다녔던 작품이다. 나의 대학생 생활은 응당 이러하리라 생각하면서...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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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8월 18일에 저장

내가 꼽는 최고의 성장소설. 이 작품을 일곱번 읽었고, 그 중에서 다섯 번을 눈물 흘렸다. 읽으면 읽을수록, 되씹으면 되씹을 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6,500원 → 5,850원(10%할인) / 마일리지 320원(5% 적립)
2003년 08월 18일에 저장
구판절판
우리의 교육은 왜 그리도 피폐할 수밖에 없는가? 이 연작소설에 담긴 이야기는 나의 고등학교 실절 이야기이며, 지금 역시 반복되고 있는 잘못에 대한 기록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03년 08월 18일에 저장
구판절판
남루한 세상, 더러운 세상, 그 속에서 파수꾼이 된다는 것은, 쉬워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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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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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어느 날, 친구들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논쟁은 소설을 쓰는 친구의 신세한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제법 과격한 어조로 소설을 읽지 않는 요즘 세태를 비난했다. 그리곤 지난 시절 함께 글쓰기를 공부했던 친구들마저 책을 읽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을 힐난했다.

  그러자 소설을 쓰지 않는 친구 하나가 반론 혹은 변명을 했다. 요즘 세상에서 소설이 과연 얼마만큼의 기능을 하고 있는가, 이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소설 따위를 읽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소설을 쓰지만 무명에 가깝고, 널리 알려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 나는 중간에 끼인 상태로 말했다. 소설을 읽지 않는 세태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소설은 그 사회의 문화적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임이 전적으로 독자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소설가들이다. 요즘 독자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최근 소설이 재미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애초부터 맞고 틀림이 문제가 되지 않는 논쟁이었다. 아니, 논쟁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신세한탄과 변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 2 >


   김중혁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 때의 논쟁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가장 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맞다. 바로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김중혁의 소설에서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 3 >


   좀 거창하게 말해보자. 우리 소설(사실, 소설뿐이 아니다. 우리 영화나 드라마, 만화, 음악 등등 대부분의 예술장르가 그러하다.)은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이 없다. 유럽처럼 장중한 스케일이나 문화적 깊이도 없고, 미국처럼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장르소설도 없다. 그뿐인가? 일본처럼 아기자기하면서 재기발랄한 것도 없다.


  무엇 때문인가?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단순한 방향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장르소설은 상업적이라고 무시하고, 태생을 간과한 채 서구의 이론을 적용시켜 평론가나 연구자들의 눈에 드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정작 독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도 못하면서, 독자들의 수준이 낮다고 투덜거리기만 한다.


   잘라 말하겠다.


   먼저 독자의 요구를 파악해야 한다. 이제 소설에도 마케팅의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소설은 문화상품과는 다르다. 온전한 예술 행위로의 소설쓰기, 즉 철저히 자기만족을 위한 소설쓰기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은 '상품성을 가진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을 통해, 내 과격한 논의를 방어하고자 한다.)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찾는 작업이다.

   마케팅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소비자의 요구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제품이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이 소비자의 요구에 어떻게 부합되는지를 어필해야 한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면 이렇게 된다.

   소설이 읽히기 위해서는, 그래서 소설책이 잘 팔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독자들의 요구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문제이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상업주의에 영합하지는 말인가?” 이 물음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A) 이는 독자들을 무시하는 얼치기 계몽주의적인 관점이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독자 역시 감식안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경우 그들의 안목이 보편적이며 타당하기까지 하다. B) 또한 이는 위선적인 자기기만이다. 상업주의를 하기 싫다면, 독자들이 책을 보지 않는다는 둥의 넋두리를 떨 필요가 없다. 그냥 자기 돈을 책을 찍어 주변 사람들과 돌려 읽으면 된다. 뭐, 운이 좋아서 다른 사람도 읽어주면 좋고, 아니어도 서운할 것 없고. 오히려 이런 자세가 더 쿨하고, 예술가답다.)



< 4 >


   그렇다면 독자의 요구는 무엇인가?


   4-1. 선정성?


   많은 창작자들의 착각 중의 하나가 선정적이기만 하면 독자들이 다 좋아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소설 독자들은 야설 독자들과 분명히 다르다. 소설이 제아무리 선정적이라고 하더라도 포르노보다 더 하겠는가?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읽을 시간에 열심히 다운로드를 받고 있을 것이다.


   4-2. 새로운 시대?


   그렇다면 시대 문제인가?


   요건 좀 고민해볼만 하다. 그리고 보다 깊이 있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시대 문제를 다루긴 하지만, 그것은 예전의 것들과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니, 한국전쟁이니, 분단상황이니, 반독재투쟁이니, 산업사회의 폐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많은 작가들이 더욱 많은 작품을 통해 다루고, 다루고, 또 다루었다.


   엇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같은 이야기라면 이야기 방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여기에 성공한 작품으로 김영하의 소설「검은 꽃」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김중혁의 소설들에서는 새로운 이야기 방식이 없다. 짐짓 새로워 보이는 이 작품집은, 적어도 이야기 방식의 측면에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모든 서술이 기존의 소설에서 보아왔던 것이다. 


   이야기 방식을 바꾸는 것 말고도, 새로운 사회 문제를 찾아내는 방법도 있다. 20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문제. 산업화 정도가 아니라, 고도산업화된 지식사회의 문제. 이것은 이야기거리 자체가 새롭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 하다.

   김중혁의 작품들은 이런 측면에 어느 정도 부합된다. 내가 김중혁이란 작가에게서 찾아낸 가장 큰 미덕은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 시대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소설은 ‘접근’을 할 뿐이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부’하거나 ‘성찰’하거나 ‘논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 작품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멍청한 유비쿼터스」와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해커의 활약상, 혹은 전산보안시스템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새롭지만, 그 문제의 기원을 탐구하지 않았고, 그 영향력 역시 간과해버렸다는 점은 끝내 아쉽다. 그래서 제법 독설적인 문명진단이 될 수도 있었던 소재가 그저 ‘시건방진 해커의 액션 활극’이 되어버렸다.


   4-3. 삶?


   범위를 좁혀볼 필요가 있다. ‘시대’라는 용어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독자도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결국은 모두 ‘삶’의 문제라고. 맞다. ‘삶’이야말로 소설이 꾸준하게 추구해왔던 문제가 아니던가.


   ‘삶’의 범위를 생각해보자. 흔히 이 단어는 ‘현실’이나 ‘생활’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지만, 꼭 그런 것들하고만 관련되지는 않는다.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톨킨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것처럼, 무의식과 상징 그리고 환상도 역시 ‘삶’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삶이란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렇다면, 소설도 역시 이 현실과 환상의 두 가지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중혁의 소설은 이 균형감각이 부족하다. 그의 작품에서 ‘현실’은 찾아볼 수 없다. 단순한 소재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 혹은 경험과 이어지는 문제이다. 나는 이 작가를 알지 모르지만, 단순히 작품만을 가지고 평가하자면, 사회 경험이 부족하다. 아니,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전무하다. 즉, 그는 문학인으로의 삶을 살았을 뿐이지,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살지 않은 듯 하다. 그러니 생활인이 대부분인 독자들에게 이런 글이 먹힐 리 없다. 

   물론 이는 김중혁 만의 문제는 아니다. 1990년대 이후의 소설가들이 대부분 그러하지 않았던가? 윤대녕의 댄디즘이나, 여성작가들의 낭만적 불륜이야기 등등,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


   나는 바로 이것이 우리 소설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활에 빠진 허구. 무릇, 거짓말의 기반은 현실이다. 가장 그럴싸한 것이 가장 빼어난 거짓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 소설은 그 기반을 잃어버렸다

   ‘소설가’라는 명칭은, 멋진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들의 거짓말이 다른 이들을 멋지게 속이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소설가가 아니다. 소설가들이여 먼저 생활을 찾자. 그래야 생활인인 독자들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중혁에게, 그리고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소설가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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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진 2007-05-1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는 건 쓰는 분의 자유입니다만 제대로 알고 써주셨으면 합니다. 김중혁 씨는 여러 직업도 전전하셨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는 분이십니다. 사회 경험이 전무하다뇨. 소설만 가지고 작가까지 단정짓는 건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라훌라 2007-05-20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심 님께서는 김중혁 작가의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 제가 "작품만을 가지고 평가하자면~"과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이라는 단서를 붙였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시는 것을 보니 이 작가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과 통찰이 있으시리라고 기대합니다. 의견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늘보리 2007-06-21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고 깊고 열정적인 리뷰는 두 가지 작품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하나는 정말 맘에 쏙 드는 작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말 성에 안 차는 작품.. ㅋㅋ 이 정도 분량의 리뷰를 쓸 정도면 정말 .. ㅋㅋ 펭귄뉴스도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한국 작품들 태반이 이 책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겁니다(현실성이랄까?). 님이 지적하신 그 점 때문에 한국 소설 안 읽는다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이구요. 저 역시..ㅋㅋ 한가지 더붙이자면 일본 소설에도 특별히 생활이란 것은 없는데 왜 그렇게 읽히는지 가슴이 쓰리긴 합니다. 제가 볼 땐 일본 소설이 별달리 재기발랄한 점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요. 아무튼 일본 소설이든 한국 소설이든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작가들이 좀 나타났으면 합니다. 생활이든 재기발랄함이든. 쩝쩝. 그러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아무튼 라훌라님의 리뷰는 저를 즐겁게 해줍니다. 최소한 이 책보단 그랬네요. ^^ ㅎㅎ
 
 전출처 : 로쟈 > 오역의 희열

연말이면 으레 그렇지만 할일은 많고 마음은 바쁘다(그렇지만 손은 더디다!). 정리할 일들 가운데는 좋은 일들도 있지만 궂은 일들도 있다. 가급적이면 연초부터 인상을 구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지겨운 책읽기'도 몰아서 해보도록 한다(좀 하다 보면 지치겠지만).

 

 

 

 

제일 먼저 브라이언 마수미의 <천 개의 고원 사용자 가이드>(접힙과펼침, 2005). 이미 품절된 책인지라(자체 품절?) 굳이 이런 자리에서 다룰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없지는 않지만,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지라 일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정리해둔다. 마수미(B. Massumi)는 <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이며, 당연히 영어권의 대표적인 들뢰지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가이드'의 원제는 'A User's Guide to Capitalism and Schizophrenia'(1992)이다. 그러니까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가이드북인 셈이다. 가이드북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개성적이며 따라서 그닥 친절하지는 않다. 친절한 걸 원한다면 우리식 가이드북인 <노마디즘>(휴머니스트)를 참조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 가이드북의 대상은 <천 개의 고원>이 아니라 <천의 고원>이지만).

마수미의 책은 상당히 오래전에 복사해두었었는데, 이처럼 번역돼 나왔길래 반가웠다, 라고 쓰면 좋겠지만, 사실 반갑지 않았다. 역자의 전력에 비추어볼 때 제대로 된 번역서일 확률이 지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해서, 미덥지 않은 마음에 도서관에 주문이나 해두었었는데, 얼마전에 대출가능해졌고 내가 첫 대출자였다(궁금함보다는 주문에 대한 '책임감'에 떠밀려 대출했다). 고급스런 장정의 하드카바이긴 하지만, 역시나 읽어보는 시간이 아까운 오역서. 한데, 이건 역자 자신이 "이 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많은 오역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243쪽)라고 태연하게 밝혀놓고 있는 터여서 지적하기도 쑥스럽다(보통은 '혹 있을지도 모르는 오역은 역자의 책임이다'라고 적는다). 아아, 역자의 말은 겸양이나 아이러니가 아니라 액면 그대로인 것이니!('오역의 희열'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번역을 감행하는 이유가 설명/이해되지 않는다.)

몇 걸음 뗄 것도 없이 첫 페이지부터 오역의 퍼레이드이다. 마수미의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국역본은 네 개의 장으로 재구성하면서 'Pleasures of Philosophy'란 제목의 서문을 '희열'이란 장으로 옮겨놓았다. 해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은 고스란히 빠져있으면서 오역의 '희열'을 유감없이 제공해주는 번역문들을 약간만 맛보기로 한다(어차피 이해못할 철학이라면 즐기기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좋게 생각한다면, 번역에 대해서 툴툴대는 나의 태도는 제법 옹졸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음으로써 나의 그 옹졸함을 굳이 더 과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서의 첫 페이지 세번째 문단이 국역본의 두번째 페이지에는 이렇게 옮겨져 있다(문단이 나뉘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분열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집니다. '철학'이 그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그저 일반적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출(bastard)로서의 철학입니다. 서출이 아닌 합법적 철학은 '전제군주의 그늘'에서 말하는 순수이성의 '관료주의'가 낳은 아들이며 제도(the state)의 역사적 복잡성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관료주의와 복잡성은 우리 정신의 내부에서 실제적으로 기능하는 절대 제도(the State)를 생산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석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건전한 논리'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된 안정적인 주체로서의 담론이며, 바위와 같이 견고한 담론이자, 백인우월주의적이며 '일반(universal)' 진리의 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8쪽, 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 철학에 대한 단정적인 서술이므로 밑줄긋기를 해볼 만한 대목처럼 읽히지만, 문제는 제멋대로의, 보다 정확히는 정반대로의 번역이라는 것. 원문은 이렇다: "Schizophrenia, like those 'suffering' from it, goes by many names. 'Philosophy' is one. Not just any philosophy. A bastard kind. Legitimate philosophy is the handiwork of 'bureaucrats' of pure reason who speak in 'the shadow of the despot' and are in historical complicity with the state. They invent 'a properly spiritual... absolute State that... effectively functions in the mind." Theirs is the discourse of sovereign judgment, of stable subjectivity legislated by 'good' sense, of rocklike identity, 'universal' truth, and (white male) justice. 'Thus the exercise of their thought is in conformity with the aims of the real State, with the dominant significations, and with the requirements of the established order."(1쪽)

처음 네 문장은 국역본의 번역도 오역에 속하지는 않는다. 나라면, "분열증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처럼, 여러 가지 이름으로 행해진다. '철학'은 그 중 하나이다. 그건 여타의 일반적인 철학이 아니다. 아주 개 같은 철학이다." 정도로 옮기겠다. '개 같은 철학'(A bastard kind of philsophy)은 철학에서의 분열증, 혹은 분열증적인 철학이 갖는 이름이고 양상이다. 이 '잡종 개' 같은 철학과 대척점에 놓이는 것이 '합법적 철학'이고 '국가 철학'이다(State를 역자는 '제도'라고 옮겼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다. 비록 '제도권 철학' 정도라면 '국가 철학'과 의미가 통할 수는 있지만). 이 합법적 철학은 순수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역자는 'bureaucrats'을 '관료주의'라고 옮김으로써 이후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그럴 경우 이후에 나오는 'they'가 무얼 받는 건지 오리무중이 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개 같은 번역이 돼 버렸다). 

다섯번째 문장부터 다시 옮기면 이렇게 된다: "합법적인 철학이란 순수 이성의 '관료들'이 만들어낸 고안품이다. 그들은 '전제군주의 그늘' 속에서 말하며 역사적으로 국가 체제와는 공모관계에 있다. 그들은 '그러한 체제에 걸맞게 우리의 마음 속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정신의 절대 왕정(국가)을  발명해낸다.' 그들의 담론은 주권적 판단의 담론이며, '양식'에 의해서 합법화되는 안정된 주체성의 담론이고, 바위같이 확고한 자기동일성, '보편적' 진리, 그리고 (백인 남성적) 정의의 담론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유를 실행한다는 것은 실제 국가의 목적들과 지배적인 대의들, 그리고 기존의 질서가 요구하는 사항들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합법적인 철학과 그로부터 분열증적으로 도주/탈주하고자 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개 같은 철학'은 정반대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를 실재적 제도(the State)의 목적과 동일시하여 혹은 지배적 기호와 동일시하여 기존의 질서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프로세스"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오직 역자만이 알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류의 오역이 국역본에는 모든 페이지에 걸쳐 출몰하며, 나로선 이 '희열들'을 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 맛만 보는 정도에서 다시 역자의 말로 넘어가는 이유이다.

"역자는 번역하는 다이어그램 기계입니다.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가 선행하지 않더라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의 개념의 전이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죠.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다발입니다."(242쪽) 한 대목만 지적했지만, 이 '종이다발'과 '텍스트의 본질과 심오한 이해'는 서로 무관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암시되었을 것이다. 쑥쓰러운 것은 이 또한 역자의 계획(손바닥) 안에 다 포함돼 있다는 것. 그러니 '기계 번역'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빨만 아픈 일이다.

 

 

 

 

마지막 역주에서의 충고: "이미 우리나라에 출간된 <천 개의 고원>, <안티오이디푸스>, <이성의 논리> 그리고 <차이와 반복> 등의 번역본의 페이지번호는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수정본의 출간여부가 정해지지 않았기도 하거니와 독자들은 우리말 번역본으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영역본으로 돌려보내거나 불어원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덱스의 키워드를 사용하여 번역본이 아닌 토종 철학자들의 저서로 돌아가는 방법을 적극 추천합니다."(244쪽)

역자가 <이성의 논리>라고 한 건 <의미의 논리>를 가리킨다. 역자가 언급하고 있는 국역본들이 비록 미흡한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역자가 논할 수준은 넘어선다(그러니 적반하장이다). 그럼에도 역자의 충고는 적어도 이 마수미의 책에서만큼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나는 독자들이 원본(영어본)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원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존중하기 때문"이다(이 비문은 나의 것이 아니며 오타도 아니다. 역자의 문장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역자가 풀서비스로 제공하는 희열에 어느 정도 몸을 푼 독자라면, 이제 '철학의 즐거움'은 다른 자리에서 맛보아야겠다. 이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다간 희열의 '괴물'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길('괴물monstrosity'은 마수미의 책 마지막 장의 제목이다)... 

05. 12. 19.

P.S. 귀가해야 하는 탓에 오늘은 여기까지만(마수미의 책은 내일 반납할 것이다). 조만간 몇 권의 '지겨운 책읽기'가 이어질 것이다(이 얼마나 지겨운 희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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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상 이야기 - 어느 프랑스인이 본 처가의 나라 꼬레
에릭 비데 지음, 니코비 그림, 최미경 옮김 / 눈빛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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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지리는 하나의 보편성만 있는 것이 아니며, 보편성과 개별성이 대를 이루는 이론의 축 위에 여러 단계의 보편서이 존재함을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서, 현실은 항상 중도적인 것이며, 그 어떤 것도 완전히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 오귀스텡 베르크(Augustin Berque), 『야성과 기교』 중에서



[ * ]


한국에 대한 글을 쓰는 서구인들은 오리엔탈리즘에서 이상화하거나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에릭 비데는 오랫동안 한국에 살면서 가정을 이루고, 학자로서 한국에 대한 연구를 상당 기간 하고 있는 사람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 역시 남다르다. 본문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일상적인 것이다. 일상적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문제도 적절하게 진단을 한다. - 「옮긴이 후기」, p.170.

 

  자신을 올바로 돌아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아무렴, 그래야 우물에만 갇혀 만족해버리는 잘못을 피할 수 있다. 특히 비판에 익숙하지 않고, 비판과 비난을 쉽게 혼동하는 우리에게는 이러한 저작을 읽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외국인들의 저술 중에서 만족할만한 수준의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에 인용된 옮긴이의 후기에서 지적된 것처럼, 대부분은 우리를 동양의 일부로 신비화하거나, 우리 사회의 단면만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긴, 이것은 외국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 역시 일본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신비화와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이 저술에도 그런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것들보다는 좀 더 정돈된 시각을 갖추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이 책의 저자가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관광객’의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생활인’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는 한국의 목욕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허름한 밥집과 술집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장과 지방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를 다루었던 대다수의 저술들이 도시와 경제와 정치를 다루었다는 점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우리의 특징을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도 위험한 작업이다. 그러나 구태여 정리하지 않더라도, 도시보다는 지방에서, 대기업보다는 시장에서, 정치문제보다는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우리의 특징을 더 잘 파악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지만 쉽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적어도 ‘관광객’의 시선을 유지할 때는 그러하다. 여행길에 찾아간 고장에서 삶을 느끼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리고 이러한 장소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그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관찰자에게 더욱 잘 발견되는 법이다. 공간이 장소가 된다는 것은, 낯선 경험이 익숙해진다는 의미이니까. 익숙한 경험은 우리에게 자극을 주지 못한다. 익숙함 속에서 발견되는 낯선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특징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인 에릭 비데는 한국인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첫 번째 단계로 목욕탕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일본인들과 비교하고 있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인용하고자 한다. 이 부분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특징을 잘 표현한 곳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가 가본 적이 있는 한국․일본․헝가리․터키의 목욕탕 중에서 한국의 목욕탕이 가장 가족적인 분위기이며, 시설도 가장 잘되어 있고, 이웃 일본의 목욕탕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목욕탕에는 일본의 목욕탕에 없는 목욕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용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도 있다. 내가 처음 일본의 목욕탕에 갔을 때,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데 주인이 따라 나와서 추가요금을 내고 가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사우나에 들어갔기 때문이란다.

  (……) 한국에서는 보통 아침에 목욕탕엘 간다. 아니면 오후 늦게 가게 되는데, 대부분의 목욕탕은 저녁 7-8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한국에서 목욕탕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들르는 경우가 더 빈번한 것 같다. 특히 전날 저녁에 과음을 했을 때 머리를 맑게 해주는데 아주 좋다. 일본의 경우, 목욕탕은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잠자기 전에 몸을 푸는 곳(p.32.)으로서 기능한다. 그래서 밤 11시, 자정까지 열려 있다. 한국과 일본 목욕탕의 가장 큰 차이는 개방 시간보다도 그 내부에서 진행되는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들은 온탕에 입수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아주 치밀하게 몸의 곳곳을 닦아낸다.

  (……) 일본사람들의 경우는 탕에 들어가기 전에 물을 끼얹는 정도로 몸을 가볍게 닦고, 탕에서 나온 다음에 오히려 세심하게 닦는 편이다. (……) 이미 17세기의 책에도 “규율준수 정신과 검소함이 특징인 일본인들은 편집증일 만큼 청결을 추구한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그 점이 바로 어떤 때는 일본을 참기 어렵게 느끼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욕탕에서만큼은 청결의 세세한 사항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을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p.33.)


   그러나 이 작가의 시각에도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이는 저자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대표적인 예가 백담사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백담사를 전두환의 은신처로만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백담사에 대해서는 한용운 선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이를 개인적 취향의 문제, 즉 정치에 대한 관심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인의 전통과 특징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면, 아무래도 전두환보다는 한용운이 타당할 것이다.

  더구나 한용운은 시인이면서 사상가였고, 한국 불교를 혁신하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는 점을 감안하자면,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들도 백담사에서 한용운을 떠올리기보다는, 전두환을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런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지키지 않는데, 누가 우리 것을 지켜주기를 바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몇몇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의 주장은 대부분 타당하고, 따끔따끔하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잊고 있던 문제들, 경제 성장 제일주의에 의해 우리가 스스로 잃어버렸던 것들에 그는 애정을 보이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지적했던 것들이야 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가 앞장서서 지켜야 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날카로운 지적 중에서 몇 가지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 나이가 상당히 들어도 부모의 경제적 부양을 받는 젊은이들은 결혼을 할 때는 부모들이 장만해 준 아파트와 거기에 어울리는 자동차를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풍속이 가족 간의 결속력의 발현이라고 보지만, 내가 보기에는 현실의 삶에서의 도피이며, 원하는 물건을 노력해서 시간을 두고 하나씩 사들이는 데 필요한 인내심 부재의 현상일 뿐이다. (p.40.)


- “도시의 시장은 한국에서 수세기 전부터 중앙정부와 촌락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기관의 역할을 했다. 시장에 가보면 바로 촌락의 영향이 도시에서 계속해서 미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핸더슨(Henderson)은 시골 특유의 상부상조와 나누기 전통 등이 도시에서 계속되는 장소로 시장을 꼽으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같은 물건을 판매하는 시장 상인들 사이에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들 중에 한 명이 운이 나쁘게 파산을 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 같은 동업자들끼리 서로 돈을 빌려 준다. 어떤 때는 차용증 한 장 쓰지 않고 빌려 주기도 한다. 만약에 깡패들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위험에 처한 상인을 위해 서로 힘을 모은다. 정부가 그들이 판매하는 상품에 대해 어떤 불리한 조치를 취하면 항의하기 위해서 역시 힘을 모은다. (p.54.)


- 19세기에 샤를 바라는 한국의 음악이 이미 중국이나 일본에서 듣던 음악에 비해 훨씬 우수하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로부터 오십여 년이 지난 후에 앙리 미쇼는 “한국의 고대음악은 쾌락을 제공하기 위한 여성들인 기녀들이 부르는 데도 슬프고 장중하다”라고 적고 있다. 최근의 음악도 서구의 유행가를 그대로 따르는 노래를 제외하고는 아주 우수한 음악이 많다.

  이 주점의 손님들은 모두 단골이며, 거의 가수 수준으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로, 거침없이 주점에 여기저기 놓여 있는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그러면 다른 손님들도 같이 따라서 노래를 하곤 한다. 특히 1970-80년대의 민주화 투쟁 시에 많이 불렸던 저항의식의 데모 노래가 많다. 이 주점에서는 거의 세계에 보편적으로 나타났지만 선진국, 특히 프랑스의 경우에 사라져 가고 있는 음유시인의 전통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한국적인 맥락에(p.69.)서 이 전통이 지속되고 있었다.(p.70.)


★ 옷가게나 시계가계도 늦게까지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밤이 이슥한 시간에 양복이나 시계를 사러갈 것인가. 이 상인들의 가족의 삶은 어떻게 유지가 되는지. 이 점이 바로 한국 현대사회의 거대한 모순인 것이다. 가족의 가치에 대해서 서구보다 훨씬 더 강조하면서 사실은 가정생활의 조화와 행복을(그것보다 더 우선적이라고 생각하는) 국가나 기업의 영리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p.114.밑줄강조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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