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 - 모성과 카오스, 에로스의 판타지
시미즈 마사시 지음, 이은주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작품의 탄생, 혹은 재생


 


「물론 작품을 언제나 분석적으로 검증할 필요는 없으며, 그려진 표층장면의 전개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표층적 장면 속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층을 볼 필요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pp.50-51.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당연하다.

  작품은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렇지 않은가? 작가가 없다면 작품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작품은 탄생하자마자 소멸되어 버리고, 몇몇 작품만이 살아남는다. 살아남아 사람들의 기억 속을 떠돈다. 그리고 다시 그들 중의 몇몇은 사람들의 감성을 장악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시대를 지배하기도 하는 <작품 중의 작품>이 된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작품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되살아나는 작품, 감성을 장악하고 시대를 지배하는 작품 중의 작품, 그런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런 작품들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콤비네이션이 필요하다.

  우선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필요하고, 다음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소비하는 독자/관객/시청자 등이 필요하며, 마지막으로 그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 해설자로의 비평가가 필요하다. 이 콤비네이션이 조화를 이룰 때에야 비로소 작품 중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중에서, 비평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러움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애니메이션을 텍스트로 해서 작품론 혹은 작가론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물론 두 말할 필요 없이,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장(巨匠)이고, 그의 작품은 분석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지금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야오가 아직 거장이 아니었을 때, 그의 작품이 이제 막 발표되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의 작품을 분석해준 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는 거장이 될 수 있었으며, 그래도 그의 작품은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었을까?

  이런 것들은 모두 가정에 불과하니 확언할 수야 없더라도, 그러지 못했거나, 혹은 그리되기 힘들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모든 작품은 비평을 통해서 새롭게 탄생한다. 특히 요즘처럼 엄청난 양의 ‘작품’들이 쏟아질 때에는 더욱 그렇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모태회귀(母胎回歸)>나 <신(神)과 인간에 대한 관계> 등은 별반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 다만 그러한 내용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텍스트에서 추출해냈다는 것이 새로울 뿐이다.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적 적용이나, 신화원형 비평적 접근은 다른 문화예술 장르에서는 일반론에 가깝게 사용되고 있는 분석방법이다. <이웃의 토토로>에서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하는 것이 토토로라는 것,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의 모습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합체형 인간이라는 것, <천공의 성 라퓨타>의 라퓨타는 유토피아의 재현이자 허구라는 것,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내포되어 있는 ‘물’의 상징적 의미 등등, 이런 것들이야 말로 그러한 분석방법의 결과들이다. 


  사실 이러한 분석방법이 애니메이션에 적용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들이야 말로, 당대의 문화예술 장르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나 전설, 소설이나 회화, 오페라와 연극 등에서 이러한 이론이 추출되었고, 이제는 애니메이션에 적용되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은 흘렀고, 그만큼 시대를 주도하는 예술 장르가 변모한 것이다. 그러므로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이런 상징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러하기에 이러한 분석방법이 가지는 한계도 이 책에서 역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즉,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해석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만큼 동감 되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센과 치히로…>에 대한 분석에서 가오니시와 하쿠를 대립적인 인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의 관계를 꼭 이렇게 보아야 할 것인지 의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 다만 오직 센이라는 아이를 좋아하는 것만 공통될 뿐이 아닌가? 또한 가오니시는 제니바의 집에 머물게 되는 것으로 그 임무를 마감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장점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상징적인 의미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징이 어떤 단계에 따라서 구현되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런 상징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보편적인 상징을 결합하는 능력(plot)이야 말로 거장의 능력이고, 작품 중의 작품을 만드는 요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요인을 찾아내는 능력이야 말로 비평가의 능력이고, 작품을 되살려내는 힘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이러한 작가와 비평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바로 이 부분이 내가 부러웠던 부분이다. 우리에게는 왜 이러한 비평서가 없는가? 일본 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도 분명히 애니메이션과 만화 작품이 있지 않은가.

  우리의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수준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라 해서 처음부터 인정받는 작품들이 나왔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작품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고, 그 분석을 통해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냈으며, 부족 부분을 끊임없이 보강해왔다.

  왜 우리는 이런 작업을 하지 못하는가? 이제 비평가들의 시야가 순수 예술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좀더 보편적인 예술장르로, 조금 더 대중적인 문화 ‘작품’으로 확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독서를 끝내고 감상문을 작성하는 지금도 여전히,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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