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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사람들 - 인류학의 지형을 획기적으로 넓힌 피그미 탐사 보고서!
콜린 M. 턴불 지음, 이상원 옮김 / 황소자리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1. 가면의 고백
고백한다. 나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그동안 공부하고, 이야기하고, 글을 쓰면서 나는 문화의 다양성을 지지하고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다.
아니, 생각은, 생각만은 진실이었다. 다문화가정을 지원해야 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비하하지 말아야 하며, 주류 문화와 함께 여러 대안 문화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과 주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다른 문화의 가치를 인정했던 것일까? 어쩌면 나는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 즉 “내가 가진 삶의 습속은 당연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문화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집단의 문화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관용과 이해를 강조했던 그동안의 내 주장에는 우월의식이 포함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들을 향한 나의 말과 글과 행동을 일종의 시혜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심은 인류학자 콜린 M. 턴불(Colin M. Turnbull)이 지은 탐사보고서 《숲 사람들》을 읽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의 본문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 나는 우선 표지와 중간에 삽입된 사진부터 살펴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보잘 것 없고 조그만 사람들, 젖가슴을 훤히 드러내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미개인들, 기껏해야 나뭇잎으로 집을 짓고 나뭇가지로 활 따위나 만드는 원시적인 문화를 가진 부족이라고.
하지만 차근차근 책을 읽어가면서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피그미족은 자신들 만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현명하고 효율적이면서 독창적인. 하지만 그들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상은 내가 품었던 느낌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어째서 이런 오해가 발생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베스타(Reberend P. Schebasta)는 흑인 부족을 통해 연구를 했고 흑인 부족 마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반면 나는 직접 피그미와 접촉했고 흑인 부족의 영향을 배제한 채 스스로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다른 유럽인들 역시 흑인 마을이나 흑인 농장에서 피그미를 보았을 뿐이었다. 나는 숲속과 개간지 마을 양쪽 모두에서 피그미를 관찰했고 그 두 환경에서 피그미들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점을 발견했다. 사실 이제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피그미의 모습은 흑인 마을에서 혹은 흑인 부족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관찰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p.31.)
오해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피그미들과 직접 마주하거나 소통하지 않고 흑인들의 눈에 비친 모습만을 기록했다는 것. 그리고 이 흑인들은 피그미를 지배하려 했을 뿐 이해하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바프와코아 마을 반다카 족 추장이자 “유럽인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인물 ‘키추이’가 피그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키추이]가 피그미를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했다. 피그미는 재판정에서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다. 마을 흑인이 피그미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 그 자신이 듣고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재판 기록 따위는 없다고 했다. 당연히 그의 판단은 언제나 마을 흑인 쪽에 유리한 것이었다. (…) 만약 피그미가 마을 흑인에게 불만을 제기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카추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피그미에게는 불만을 제기할 권리가 없네.(p.297.)
이처럼 상대를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이들의 눈으로 파악했으니, 피그미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졌을 까닭이 없다. 낯선 문화를 학습하기 위한 첫 단계인 ‘개방적 자세’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다.
다른 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만한 편견이야 새롭지 않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흑인에게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억압을 당하는 자들이 압제자에게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 다시 폭압을 행사한다.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이야말로,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잘못이 아니던가. 백인을 동경하면서 흑인을 낮춰보는 태도, 선진국을 추종하면서 후진국들을 무시하는 자세.
그런 점에서 나는 흑인과 다를 바 없었다. 문명인의 가면을 뒤집어 쓴 채, 한껏 깔보는 눈빛으로 피그미들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태도는 피그미들에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조차 못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지르고 있는가? 이런 편견을 버리지 않고서는 “낯선 문화의 이질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는 열린 마음”도 갖출 수 없고, ‘자문화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2. 자연과 연대하는 삶 : 피그미, 모노노케 히메, 그리고 나비
편견의 가면을 벗어버린 뒤에야 피그미들의 정체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삶은 두 가지 방식으로 분리되어 있다. 흑인 마을에서의 삶과 피그미들이 고향으로 여기는 숲에서의 삶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단연 ‘숲의 삶’ 쪽이다.
숲은 피그미들에게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제공한다. 그곳에서는 일과 놀이가 분리되지 않는다. 일하며 놀고, 놀면서 일한다. 생활과 교육이 나뉘지 않는다. 삶이 교육이고, 교육이 곧 삶이다. 생필품을 구하려고 마을에서 사는 시기도 있지만, 일단 숲으로 돌아가면 피그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삶을 즐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유머, 춤, 노래에 익숙하다. 특히 노래는 삶의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는 수단이다. 이런 인식은 피그미들의 연장자인 모케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숲은 우리에게 아버지이고 또 어머니라네. 숲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듯 음식, 옷, 집, 애정 등 필요한 모든 것을 주지. 보통 때는 모든 일이 잘 된다네. 숲이 자식들을 잘 돌보기 때문이지. 하지만 일이 잘 안 되는 때라면 (…) 숲이 잠자고 있거나 자기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기 때문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숲을 깨워야지. 노래를 불러주어 깨워야 하는 거야. 숲이 즐겁게 깨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지. 그럼 모든 것이 다시 좋아진다네. 그렇게 우리 세상이 다 잘 돌아가면 다시 숲에게 노래를 불러줘 우리의 행복을 나누는 거야.(pp.130-131.)
인용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노래는 “숲이 즐겁게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동시에 “행복을 나누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피그미들의 전통 악기이자 춤인 몰리모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배려와 소통을 통해 그들의 삶은 비로소 온전해지고 풍요롭게 변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작은 빈터에 켄게가 있었다. 나무껍질 옷을 입고 나뭇잎 장식을 달았으며 머리에는 꽃을 꽂았다. 그는 혼자서 춤을 추고 부드러운 소리로 노래도 부르며 나무 꼭대기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빈터로 들어가 왜 혼자서 춤을 추고 있느냐고 농담조로 물었다. 켄게는 멈춰서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천하제일의 바보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멍청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놀랍다는 식이었다.
“난 혼자 춤추는 것이 아니에요. 숲과 달과 함께 춤추는 거지요.”
(pp.342-343.)
바로 이것이 피그미들이 고독에 빠지지 않는 이유이다. 수많은 문화예술 작품들이 고독을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제시한다. 무리를 이루고는 있지만 철저하게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 그러하기에 그들은 항상 외롭다. 고독을 잊기 위해서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으니, 집착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다만 자아를 병들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 현대인들에게 고독이야말로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인 셈이다. 하지만 피그미들은 고독해지지 않는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곁에는 언제나 자연이 함께 한다. 서구인의 눈에는 홀로인 것처럼 보였지만, 피그미는 “숲과 달과 함께” 있었다. 이런 연대감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이처럼 자연과 연대하는 삶의 가치는 《숲 사람들》 이후 각종 문화예술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영향관계가 분명히 드러나는 작품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姫)>와 제임스 캐머런(James F. Cameron) 감독의 영화 <아바타(Avatar)>에 등장하는 나비(Na’vi) 족이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옛날 옛적에 이 나라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곳에는 태고적 신들이 살고 있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0709/pimg_774471193773315.jpg)
<모노노케 히메>의 도입부에 제시되는 이 문장은, ‘신성한 숲’이란 개념은 피그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숲은 생명력으로 충만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인간들은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여 이용하려고 한다. 《숲 사람들》에서 맘바사 지역 행정관이 “숲을 베어내 만든 개간지에 피그미들을 정착시키고 농사를 짓게” 만들려 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실패한다. <모노노케 히메>에서의 숲은 인간들에 의해 폐허가 되고, 《숲 사람들》의 피그미들은 정착생활을 견뎌내지 못한다. 욕심에 의해 훼손된 자연을 치유하는 힘은 믿음에서 나온다. <모노노케 히메>의 주인공들이 고난을 이겨내고 생명신 시시가미(シシ神)의 목을 돌려주자, 숲은 신성한 힘에 의해 부활된다. 《숲 사람들》에서 맘바사 지역을 비롯한 바깥세상의 소식을 들은 모케 노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숲은 우리 집이네. 우리가 숲을 떠나면, 혹은 숲이 사라지면 우리도 죽는 거야. 우리는 숲의 사람들일세.
인간은 자연과 공존해야 한다는 믿음, 훼손된 신뢰를 되찾기 위한 노력 등이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숲은 부활하지만, 주인공 산(もののけ)은 끝내 인간을 용서하지 못한다. 《숲 사람들》의 피그미들은 오랜 가르침을 지켜내지만, 가차 없는 문명의 침범을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다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들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 인간은 여전히 이해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하늘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 그들은 위대한 나무들의 씨앗 속에 있는 순수한 영혼들을 볼 수 없다. 그들은 모든 에너지가 빌려온 것이고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0709/pimg_774471193773319.jpg)
영화 <아바타>의 무대가 되는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 나비 족은, 자신들을 침략하는 인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는 현대 사회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다.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물질적 가치에만 관심을 가지고 씨앗의 영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돌려주어야 한다는 진실을 모르고 독점하려고만 하는 사람들. 그들은 결국 《숲 사람들》에서 피그미들을 착취하려는 흑인과 서구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아니,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은 아닌가?
나비 족은 여러 측면에서 피그미와 닮았다. 비록 신체적 특징이야 거인과 왜소종족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자연에 순응하고, 나무를 숭배하고, 스스로 숲의 일부가 되어 살아간다는 점은 일치한다. 또한 그들은 공통적으로 외부세력의 위협을 받고 있다.
위협은 《숲 사람들》보다 <아바타>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가공할 무기를 앞세운 침략자들에 의해, 나비 족의 숲은 파괴당한다. <모노노케 히메>에서처럼 부활하지도 못한다. 피그미들의 숲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소수의 문화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작품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모노노케 히메>와 <아바타>에 나타난 《숲 사람들》과의 공통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직 하나가 남았다. 문명인의 가면을 쓴 우리와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저들을 이어주는 메신저의 존재이다.
3. 되돌아오는 이야기,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열린 태도는 왜 필요한가?
<모노노케 히메>의 주인공 아시타카는 인간의 마을에 속하지만 숲의 신령들을 이해하게 된다. <아바타>의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나비 족의 생활방식에 공감한다. 그리고 《숲 사람들》에서는 저자 콜린 M. 턴불이 피그미의 메신저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의 것으로 환원된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우리 문화 역시 누군가에겐 낯선 문화일 것이다. 우리가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의 문화 또한 이해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열린 태도는 문화의 총체성을 확보하는 기본적인 여건인 동시에, 그 총체성 안에서 우리 문화를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된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바로 내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 이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작품들이 발표되는 한, 우리가 이해해야 마땅한 문화들이 남아 있는 한, 결코 노력을 멈출 수 없다. 낯선 문화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이제 우리는 겨우 그 출발점에 서있을 뿐이다. 갈 길이 아직 멀다. 하지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발걸음을 옮기자. 우공이산(愚公移山) 우보만리(牛步萬里). 조심씩 흙을 옮기면 거대한 산을 움직일 수 있고, 느리지만 우직한 걸음으로 머나먼 길을 완주할 수 있다. 조급해한다고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고 보잘 것 없고 소소한 노력이 쌓일 때, 문화가 바뀐다.
그러니 걷자. 피그미들처럼. 숲의 사람들처럼. 작은 발걸음이 모여서 길을 만들고, 조그만 노력을 쌓여 세상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