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형식은 내용을 지배한다

 

 

[ 1 ]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근래에 와서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익만 추구하고, 선비들은 학식을 개인적인 목적달성에만 쓰려고 합니다. (……)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과 봉록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글을 읽고는 글귀를 멋대로 따와서 묻고 답하는 데만 쓰니, 이는 마치 잘 치장한 상자만 사고 정작 사야 할 구슬은 되돌려주는 격입니다. 글을 지어도 괴상하고 과장된 문장으로 꾸며 과거에 빨리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니, 도리에 위배되고 진리에 어긋날 뿐입니다.』

- 조종도의 대책, p.283.

 

 

모든 형식은 내용을 지배한다. 한때나마 내용이 형식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매우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형식을 지배하는 내용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 특별한 경우란 두 가지 밖에 없다. 애초부터 형식을 알고 있지 못했거나, 혹은 형식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용과 형식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가 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둘은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서 반목하고, 으르렁거리고, 싸운다.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앞에 인용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용 부분은 “교육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라는 명종의 질문에 대한 조종도의 대답이다. 그는 과거제도가 잘못 시행되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편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첨부하고 있다.

 

 과거는 일정한 규칙과 형식이 있으므로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형식에 맞지 않으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래서 결국 과거에서 뽑히는 답안은 내용보다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의 글만 뽑히게 되어 있다. 글재주를 자랑하고 다듬을수록 문장만 교묘해지고 뜻을 알 수 없으며, 사람들의 심성을 들뜨게 하고 화려한 겉멋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세상을 다스릴 재주와 자질, 인격과 덕망은 글재주로 알 수 없다. 따라서 과거를 위한 문장이 성하면 성할수록, 참으로 나라를 건질 재주를 가진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편자 설명, p.292.) 

 

나는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분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책의 내용이 형편없거나, 빤한 밑천으로 겉멋만 부려 형식을 요란하게 만들었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책의 내용은 참신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것들을 일깨워주는 좋은 자극이 되었으니까. 사실 그렇다. 조선이란 시대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각종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수없이 접했기 때문에 익숙하지만, 그러나 각 매체가 전하는 조선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내게 있어서 조선이라는 시대는 심각한 정쟁과 허식으로 가득 찬 유약하기 짝이 없는 왕조였다가, 고고한 딸깍발이 선비들의 고고한 기상이 살아있는 시간이면서, 또한 한편으로는 판소리나 마당놀이 등에서 나타나는 민중의 역동적 에너지로 충만한 시기이기도 하다. 세종에서 영조와 정조로 이어지는 군왕 중심의 인문부흥과 서민의식이 싹텄던 실학파의 정신과, 궁중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당리당략을 위한 파벌싸움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어쩌면 조선은 이러한 모습들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서 공존하는 다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시대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은 조선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용만큼은 아니지만 형식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일단 5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무리 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으니,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었던 듯 하다. (형식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자세하게 논의하겠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는가? 문제는 책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 사회, 그 자체에 있었다. 책의 서두에서 편자는 책문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답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조선의 책문과 현재의 대입 논술시험을 비교하면서, 책문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죽기를 각오하고 진술한다는 표현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책문의 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과거에 낙방하거나 권력자의 눈밖에 난 경우도 있다니, 이런 강조가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 이 표현은 공허하기만 하다.

 

무릇 모든 비판은 현실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행정가, 정치가들의 비판은 더욱 더 현실적이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관념적인 것, 허황한 것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으며, 그 문제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종교가, 철학자, 예술가들의 몫이다. 그들은 꿈을 꾸기 때문에 사회를 비옥하게 만든다. 하지만 행정가와 정치가들의 꿈을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꿈을 꾸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현실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이념이니, 관념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은 그들의 몫이 아니다. 그들의 몫은 삶, 온전히 생활의 문제에 국한된다.

 

바로 여기에 책문의 한계가 있다. 책문이란 관리를 등용하기 위한 평가방법이다. 물론 현재의 관리와 조선시대의 관리의 성격이 다르다고는 해도, 관리는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기본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은 종교가가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며 예술가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그들은 행정가이고 정치가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지어 올린 책문에는 현실이 없다. 그들은 대부분 성현의 말씀을 장황하게 인용하고, 그 속에서 보편타당 한 진리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주장한다. 이러한 것들만 지킨다면 어찌 태평성대가 되지 않겠소이까? 물론 그 중에는 간혹 용감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자, 이런 진리가 있소이다. 그런데 위정자들은 이런 것을 지키지 않소이다. 특히 왕, 당신이 지키지 않소이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지 않겠소이까? 대단한 용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도 여전히 현실은 없다.

 

과거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이 다르지 않다면, 사람이 먹고 자고 싸는 것이 틀려지지 않았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단순 명쾌하게 마음을 고쳐먹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어디 있을까? 마음먹기는 쉽다. 하지만 실천은 어렵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이며, 다이어트에는 실패만을 거듭하는가. 임금 한 명이 생각을 다르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공상이다. 사대부 몇몇이 행동을 고친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망상이다. 옛날로 되돌아가 진리를 바로 세운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허망한 꿈이다. 시간과 강물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관리들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기 위해 목을 늘이기보다는, 지금 눈앞의 것을 해결하기 위해 앞을 바라봐야 한다.

 

책문의 질문을 하는 임금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예비관리들도 모두 이러한 현실인식이 부족하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첫째 감정, 바로 안타까움이었다.

 

 

 

이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책문이 가진 형식주의이다. 편자의 설명처럼 책문은 형식이 고정되어 있다. 질문은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로 시작된다. 이에 대한 답은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로 시작하여 장황하고 공손한 참사와 겸사가 이어진다. 그리고 답의 마지막은 “보잘것없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고 두렵지만, 솔직히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을 드립니다”로 끝맺는다. 편자는 이를 ‘작자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액자’라고 표현하면서 그 행간을 잘 읽으라고 주문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조선시대 사람이 아니다. 도무지 행간이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허황한 말장난뿐이다. 이건 중국 옛이야기 퀴즈대회에 지나지 않는다.

 

닫힌 형식은 내용까지 닫히게 만든다. 창의적인 내용은 고정된 틀 속에서 살 수 없는 법이다. 우리는 흔히 공무원들을 고루하고 비효율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행정서류 속에서는 죽었다 깨나도 창의성이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틀을 깨면서 나온다. 달걀의 모양에 집착하면 달걀을 세울 수 없다. 모양을 깨버려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앞서 이야기했던 현실인식의 결여에 대한 원인도, 이러한 형식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허망한 말장난은 독자들은 피로하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피로했다. 나만의 문제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선이라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모든 독자들은 대부분 나처럼 행간을 읽지 못할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대책을 올리는 선비들도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해서 답답하지 않았을까. 또한 그들의 답을 읽어야 하는 임금도 자신이 원하는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빙빙 돌아가기만 하는 말에 답답하지는 않았을까.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둘째 감정, 답답함이었다.

 

 

 

[ 2 : 또 다른 형식 – 각주 ]

 

 

이 책의 형식과 관련된 아쉬움을 지적하고자 한다. 주변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이것도 내 감상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꼭 한번은 언급하고 싶었다.

 

각주와 역주도 분명히 하나의 텍스트여야 한다. 그런데 이들을 본문과 분리시켜 책 뒤에 위치시킨 것은 독자들을 수고를 유도하는 것이니, 좋은 편집 방법은 아니다. (물론 이런 방법은 본문에 대한 집중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각주의 분량을 줄여야 했다.) 

 

본문과 각주의 색깔을 구분하는 방법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알아보기 힘든 오랜지 색을 선택했다는 점이 문제이다. 더구나 각주와 역주까지 쉽게 구분되지 않았으니, 이쯤 되면 문제가 심각하다. 

 

사실, 이 책에 포함된 각주는 독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 출전에 하나하나 신경을 쓰겠는가? 이것은 각 단락의 뒤에서 참고문헌으로 처리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필요했던 주석은 역주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털어냈어야 했다. 그랬다면 책의 몸매는 훨씬 군살이 없어졌으리라. 

 

이처럼 정확한 출전에 집착하는 것을 독자층을 명확하게 선정하지 못한 오류, 혹은 책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 오류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편자의 다음과 같은 변명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변명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가져 가면 그때마다 조금씩 새로운 주문을 했다. 그래서 책은 처음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단순한 고전 번역본이 아니라, 옮기고 풀이한 책이 된 것이다.(후기, p.463.) 

 

가장 큰 문제는 이 책이 정체성을 찾지 못한 것이다.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공도서인지,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양도서인지 분명하게 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공도서라 하기엔 내용은 너무 피상적이고 평가는 주관적이었다. 또한 교양도서라고 하기에는 내용과 현실 사이의 연결고리가 헐겁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책은 고급스러운 교양도서였어야 했다고 판단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여 분량을 줄이고, 디자인과 형식을 좀더 분명하고 단정하게 만들고, 내용도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견고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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