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시대도 변하고,
내 전공도 스토리텔링으로 바뀐 탓에
이런 주문을 받는 일이 적어졌지만,
등단 직후 몇 년 동안은 이런 주문을 많이 받았지.
-- 시 낭송해줘~
내가 아무리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말이야.
그래,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시나 소설은 구분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마치 내게 있어 소녀시대의 멤버들이 그냥 '소녀'들인 것처럼.
(사실, 이 친구들도 이제 소녀는 아니지 않아?)
몇 번은 정중하게 거절했지.
그 요청이 왜 잘못인지 설명하기도 했고.
우선, 당신이 원하는 건, '암송'이지 '낭송'이 아니란 말이야.
낭송은 시 작품을 보면서 읽는 거야. 근데 지금 이 자리에는 작품이 없잖아, 그러니 외워서 말할 수밖에. 그러니 암송이야.
-- 아아, 아무튼 해줘, 그거, 낭송인지 암송인지.
하긴. 소설가와 시인을 구분할 수 없는데, 낭송과 암송을 구태여 구분해 무엇하리.
결국에 체념하고 암송하기로 했지.
그런데 마땅하게 생각나는 것이 없단 말이지.
이건 순전히 내가 멍청하고 무식한 탓이야. 어릴 적부터 암기에는 젬병이었어. 순전히 변명이겠지만.
그래서 최대한 짧고 간결한 시 작품을 골랐지.
예를 들어, 요런 것.
뱀
너무, 길다
- 쥘 르나르(Jules Renard), <<박물지>> 중에서
얼마나 좋아?
누구나 쉽게 외울 수 있잖아?
만일 너무 짧다고 불만스러워 하는 기색이 보이거든, 청중의 성향을 파악해서 다음의 부가 설명을 더 하면 좋아.
1) 여기에서 '뱀'은 인생을 뜻한다. 이 얼마나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작품이냐!
2) 여기에서 '뱀'은 히틀러를 뜻한다. 이 얼마나 (정치적이고 참여적인) 작품이냐!
한국 작품에서 고르자면, 최고봉은 이것이지.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싶다.
- 정현종
아아, 정말 멋진 작품이지. 문학성으로도, 길이로도.
혹시 여전히 짧다고 퉁실거리거든, 까짓 보너스로 다른 작품을 함께 암송해도 좋아.
사이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 박덕규
청중이 좀 어린 세대라면 이 작품이 효과적이지.
반말투로 낭송하면 더욱 효과가 좋아.
이것도 참 재미있는 경험이지. 반말로 시를 낭송한다는 것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그런데, 오늘 암송의 기술에 적합한 시를 한 편 발견했어.
다음에 써먹어 보려고 해.
개심사(開心寺)에 들며
여가 어디여.
여가 거기여.
- 권혁제, << 투명인간 >>, 문학의전당, 2009. 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