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나날 문학과지성 시인선 211
이기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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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죽만 건드리는 것은 싫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그의 시는 선언적이다. 詩가 선언적이라는 것은 나쁜가? 아니다. 나쁘지 않다.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시인의 개성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문제가 될 것 역시 없다. 적어도 시의 구성논리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그렇다. 시의 고전적인 목적이 '감동의 전달'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다. 선언적인 문장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지극히 단정적 표현으로 일관되고 있다. 그 내면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타인의 삶에 대한 관찰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진술의 전면으로 나타나지 못한다. 그만큼 선언적인 목소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선언적인 목소리가 지배하는 진술에서는, 타인의 견해는 끼어들 틈이 없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모든 문장은 독자와 작가 사이의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런 식의 작품에서는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독자는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작품의 내부에 국한되는 설명이다. 작품의 외부, 즉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시점에서부터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이런 작품에 내릴 수 있는 평가는 두 가지 뿐이다. 작가의 선언에 동감하거나, 반대하거나. 이것은 강요된 선택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작가의 위치를 지나치게 우월하게 만든다. 마치,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처럼, 작가는 독자에게 명령한다. 내 말에 동조하라, 동조하지 못하겠거든 포기하라.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자만이다. 불안한 권력이다. 불손한 자신감이다. 과연 누가, 어떤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선언적인 시는 위험하다. 나쁘지는 않지만, 위험하다. 권력의 핵이 작가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이 그대로 이해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균형감각을 갖춘 군주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렇지 못한 작가에게 이런 종류의 시는 너무나 위험한 무기가 된다.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시집에서 선언하는 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목소리를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단단하게 응집될 뿐이다. 그는 반성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꽃, 먼지, 별빛, 뻘물보다 못한 존재라고 설명한다. '~보다'라는 표현의 이중성에 주목하자. 이런 것들에 자신을 비유한다는 것 자체가 강한 자신감이다. 스스로 못하다고 하면서도, 결국 이것들에도 미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우월하다는 의식이다.

이러한 우월성이 없다면,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의 긴장감은 유지되지 못한다. 작가가 내비치는 우월성은 권세나 자본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단련을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흔들릴 때는 어떻게 되는가? 말 그대로 '유리'처럼 맑은 상태에서만 작품의 건강성이 확보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이 시집의 선언은 허망한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거칠게 말하자면, 이 시집은 동어반복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시들이 필요할 것인가? 이 시집은 결국 단 하나의 시로도 묶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무엇 때문에 이리도 많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며, 독자는 무엇 때문에 같은 내용의 성명을 거듭해서 들어야 하는가?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형식의 시는 지루하다. 나쁘지는 않지만 지루해지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견딜만 하다. 아직까지는 많이 위험하지 않고, 많이 지루하지도 않다. 다만 위태로울 뿐이다. 높이 매달린 끈을 걸어가는 곡예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단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어도 그는 추락하고 만다. 스스로 묶어놓은 끈이 너무 높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추락이 치명상이 될 것이다. 위험하다. 불안하다. 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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