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도루
윌리엄 깁슨 지음, 안정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SF소설의 매력은 시간이 지난 뒤에 발휘된다. 당시에는 그저 공상에 불과했던 것이 현실로 되는 순간, 『해저 2만리』에 나오는 가공할 성능의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핵잠수함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멋진 신세계』의 유전자 조작이 현실의 게놈 프로젝트로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 SF소설은 빛을 발한다. 이 작품이 빛을 발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것은 1996년, 이제 막 인터넷이라는 문명이 시작되던 때였다. 물론 그때 이미 인트라넷 기술과 기본 개념은 설정되었던 상황이었지만, 그것을 발전시킨 개념들은 2002년 현재의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있다. 사이버스공간의 형성 및 활성화, 해킹을 통한 개인 정보의 유출(작품에서는 ‘접속분기점’을 통해 행동의 유추분석), 사이버 아이돌스타(작품 속의 ‘아이도루’ 아이도루(Idoru)라는 표현은 아이돌(Idol)의 일본식 발음이다) 등이 이 책에서 예측하고 있던 사이버 문명들이다.

물론, 이외에도 그리 신선하지 않고, 현실에서 구현되지는 않지만, 동시통역기, 손끝으로 작동하는 컴퓨터(컴퓨터 운영체계를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이미 많은 SF영화에서 사용된 방법이다. 이 방법은 컴퓨터의 운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등도 앞으로 구현될 수 있는 상상력이라고 판단된다.

SF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재를 돌아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저 가능성에 불과한 것들을 현실처럼 구현하여, 그것들이 가진 혹은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을 내보인다. 『1984』의 파쇼 독제에 대한 구현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아직 나타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한 구현이 나타난다. 특히 이 작품과 다른 작품이 변별되는 것은, 정치/사회/과학과 같은 문제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문화에 대한 경고라는 점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이버캐릭터와의 연애, 스타시스템에 대한 비판 등이 이 작품이 주된 경고이고, 이것이 다른 어떤 분야에 대한 경고보다 독특하고 공감되는 부분이다.

이미 문화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다른 것들이 바탕이 되지 않는 문화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문화는 기본적으로 자생하지 못한다. 다른 것들이 기반에 속하는 것이라면, 문화는 기반 위에 쌓아올린 누각이다. 언제 허물어질지 알 수 없는 누각.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기반이 흔들려버리면 허물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공중누각.(이 작품에서도 인터넷을 바탕으로 하는 사이버공간과 해킹을 통한 개인정보의 누출이라는 문제를 함께 다루게 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문화의 속성 때문이다.)

문화, 그것도 대중문화의 첨병이면서 메카니즘인 인터넷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의 상상력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 지, 그 정확한 시기를 판단하기 힘들다. 다만 이 작품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현실이 등장할 때, 이 작품의 힘은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이 되어버린 허구는 더 이상 허구로서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말테니까. 어쩌면 이것이 SF소설의 한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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