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김연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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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별점주기가 아까웠다. 나는 대부분의 책에 재미를 느껴오던 독자였기에. 참으로 오랜만에 읽은 재미없는 소설이다. 한동안 거침없이 이루어지던 내 독서의 행진이 이 책으로 인해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이 작품집의 가장 큰 문제는 서사의 不在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전면에서 이야기는 거의 배제되어 있다. 서사는 배후로 가라앉고, 자의식이 강한 문장이 전면으로 부각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기법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서사가 부족할 경우, 작품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문장의 힘이 부각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문장의 質이 어떠한 가에 달려 있다.

앞에서 언급한 '문장의 힘'이란 개념은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감수성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적 사유의 힘이다. 감수성의 힘은 무엇보다 사물에 대한 범상치 않은 직관력이 바탕이 된다. 흔히 독특한 개성이라고 설명되는 부분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관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물과 사건을 낯설게 진술할 수 있는 능력, 바로 이것이 문장에 힘을 실어준다. 철학적 사유의 힘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바탕이 된다. 감수성의 힘이 직관을 통해 사물을 보고 있다면, 사유의 힘은 이성을 통해 사물과 다른 사물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가가 사용하는 문장들은 이와 같은 힘이 없다. 감수성의 힘도, 사유의 힘도 모두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결여는 문장의 기본을 자기연민을 두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자기 비판을 강요해 내고 있는 모순 때문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자기연민을 바탕으로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문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물론 연민을 객관적으로 비판하려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순서가 바뀌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작중 인물의 사유는 연민에서 비판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고 다시 자기연민으로 퇴행하고 있다. 이러한 연민과 비판의 혼용은 이 작품집에 수록된 한 작품의 제목처럼, '미성년'의 것이다.

소설은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라는 루카치의 견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소설가와 등장인물은 변별된다는 점에서, 그와 같은 '미성년'의 자세가 모순을 가진다는 것은 충분히 유추될 수 있다. 소설가는 등장인물이 아니다. 등장인물은 미성숙한 인물일 수 있지만, 소설가는 (적어도 자신의 작품에 있어서는) 미성숙한 인물이 될 수 없다. 등장인물에게는 자기연민과 자기비판이 혼란하게 제시되는 '미성숙'이 허용될 수 있지만, 소설가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혼란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를 통해서 작품의 질서가 만들어진다.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이러한 질서가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많은 반성을 끄집어내지만, 그것은 금방 연민으로 바뀌어 버리는 거짓 반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의 독백으로 작품이 구성되고 있으니, 작품의 문장들도 모순을 일으키고 만다. 감수성의 힘을 가지기에는 자기 비판이 너무 과도하고(자기연민이 과도했다는 설명도 결국에는 같은 의미가 된다.), 사유의 힘을 가지기에는 자기연민이 너무 컸다. 감수성과 사유의 어중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이 작가의 문장이며, 이 작품들의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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