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클라반 : 오늘날 우리의 문명과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커트 보네거트 : 먼저, 왁자지껄한 텔레비전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게 중요해. 텔레비전에서 문제랍시고 떠들어 대는 것들, 마치 우리가 반드시 걱정해야만 할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일들에서. 문학이야말로 관객들이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 형식이 아닌가. 우리들은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대단히 잘 읽을 수 있어야하네. 아이러니를 느낄 정도로 읽어야 한단 말일세!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숨은 뜻까지 알아챌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문학에 박식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프렌치 호른을 연주하기를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야.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란 말일세. 내가 <타임퀘이크>에서 말한 것처럼, 읽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사실 그건 불가능해. 문학이란 고작 26개의 표음 문자와, 열 개의 아라비안 숫자, 여덟 개 정도의 구두점을 독특하게 일렬로 줄 세우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물론 당신들처럼 인쇄된 책을 보고 머릿속으로 워털루 전쟁을 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for God's sake!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미국인 중 1400만 명은 운전면허시험 원서를 작성할 만큼도 읽지 못한다네. 그러니 우리의 관객층은 넓을 수가 없어. 우리가 필요한 건 꽤나 숙달된 관객,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숙달된 관객이니... (관객들에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할 만큼 배워줘서 고맙소. [웃음]
- 커트 보네거트, 대담집 <Like shaking hands with God> 중에서
(* 주의 : 이 글은 긴데다 미괄식이므로 알라딘 관계자 혹은 출판 관계자 분들은 중반 이후부터 읽어주시기 바람)
팔자에 없는 북한산 야간산행(이라고 쓰고 행군이라고 읽는다)을 마치고 맞은 토요일 오후를 통째로 '쇼 음악*심', '스타골*벨 - 아이돌 특집', '무한*전 - 서바이벌 특집'을 보며 날려버린 (소위) 인문MD가 이런 말을 인용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어쨌든 오늘은 입사 3주년이 되는 날.
사실 책에서 면제(면'죄)되어 맘껏 TV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금요일 밤 해치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 덕이다. 왜,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는 것도 있지 않는가. '막장'을 파는 광부들 처럼 헤드랜턴을 켜고, 저녁 8시에서 새벽 3시까지 산을 탔는데, TV 좀 보는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래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생각외로. 인간은 때론 아주 깊고, 어두운 일들을 상상할 수 있는 존재니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일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실은 8부 능선을 넘을 때 즈음에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나나나 나 나나나나나 나나나나… 한참을 흥얼거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인터*크 CM송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 자리에 부장님이 계셨다는 얘기를 했던가?)
바로 그 산, 새벽 한 시, 저 위 9부 능선에서, 누군가, 외쳤다.
"허경영!"
뭐라고? 설마…
귀신이라도 만난듯 긴장한 내 달팽이관 속으로 파도처럼 쏟아지는 그 이름. 허경영경영경영 허경영경영경영… 아, 누군가 '시험합격을 / 살이 빠지기를 / 키가 크기를 / 예뻐지기를'(허경영 디지털 싱글 'Call Me' 참고) 그토록 바라는 것인가 싶어 순간 손발이 오그라들던 새벽 한 시, 북한산에서, 나는, 물었다.
어째서 삶은 이토록, 인간을 힘들게 하는지. 과연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한 문제는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는 그저, 집에 돌아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잠을 청하고 맞은 오후, 이미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된 LG의 경기를 돌려 보며, 1사 만루에 타석에 등장한 페타지니를 향해 속절 없이 "허경영!"을 외칠 뿐. 바로 그 순간 페타지니의 배트에 맞은 공이 담장을 향해 쭉쭉 뻗어나가는 모습을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다가도, 아슬아슬하게 파울이 된 것을 확인하며 씁쓸하게 웃을 뿐. 그럴 뿐.
인생이라니, 세상에.
오래된 농담이에요. 음, 리조트에 할머니 둘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거죠.
"세상에, 여기 음식은 정말 끔찍해!"
그러자 다른 할머니가 말하기를, "그래 맞아, 게다가... 양까지 적어!"
그게 바로 내가 인생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에요. 외로움과 비참함,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차있는 데다가…
그 모든 게 너무 빨리 끝나버리죠.
- 앨비 싱어, <애니 홀> 중에서
조금 망설이던 나는, 다시 책을 집는다. 책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더이상 믿지 않아도. 너무 많은 책을, 너무 가볍게 읽어 버렸다는 생각이 눈을 찔러도.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여전히 누구도 내게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같은 말을 해주지 않아서.
적어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거라는 위안 몇 조각을 손에 쥐고. 어쨌거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해온 일이니까. 3년 넘게 연애해 본 사람들은 내 기분을 아마, 이해하겠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할만큼 멍청해줘서 고맙소!"
(* 상단의 '주의'에 해당하신 분들은 여기서부터 읽으세요)
한 언어학자의 아마존 오지 마을 탐방기인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와 한 사회학자의 시카고 빈민촌 방문기인 <괴짜사회학>는 모두 예기치 않은 순간에 조우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한 책이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학문(사회학)과 다른 책이 깊이 담고 있는 또 하나의 학문(언어학, 인류학)에도 불구하고 책들은 각각 '사회인'과 '문명인'이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성장담을 닮았다. '사회인' 혹은 '문명인'이라 이름 붙여진 인생이란 결국 '레디메이드 인생'에 다름 아니니까.
결국 오늘날 성장이란 우리가 깊숙히 지니고 있는 문명인의 프레임을 깨트리는 것. 공장에서 찍어내고, TV에서 광고하는 우리들의 행복과 사랑과 불행과 절망과 고통과 즐거움, 그러니까 인생을 넘어서는 무엇을 비로소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까, '입사식'으로 표현되는 교양소설의 전통은 이미 21세기에 유효하지 않단 말이다, 그것은 이제 성장도 뭣도 아니니까)
선교를 위해 아마존의 피다한 마을로 떠난 다니엘 에버렛. 언어학 전공을 살려 야만의 죄악에 빠져 있는 파다한 원주민들에게 '복음'의 빛을 선사하겠다는 열망에 들뜬다. 박사 논문을 위해 빈민가를 기웃거리던 수디르 벤카테시. 만성적인 빈곤에 시달리는 그들을 분석, 사회학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건 잠입에 성공한다.
결국 그들이 하고자 했던 일은, 각자의 고귀한 '소명의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프레임을 '미개인' 혹은 '빈민'에게 이식하는 것일 뿐이었다. 지독한 폭력. 본의 아니게 오만한 문명인은 물론 이를 알지 못하고, 그저 벽에 부딪혀 괴로워하고 원망할 뿐이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가치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어렴풋한 자각이.
<괴짜사회학>의 수디르는, 경찰차도 구급차도 오지 않는 '빈민의 섬'에서 통계자료를 들먹이며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최신의 연구에 따르면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25퍼센트라는 것. 빈곤의 고리를 끊기위해 그들을 갱단 대신 학교에 보내야한다는 것. 그러자 주민 대표인 베일리 부인이 말한다.
"만약 자네 가족이 굶주리고 있고 내가 자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쩌겠나?" 당연히 가족들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때까지 학업을 미루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대답하는 그에게 부인은 되묻는다. "하지만 자넨 학교에 다녀야 하잖아, 안 그런가? 그게 자네를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테니 말이야."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마가복음을 피다한 어로 번역하고, 자가발전기가 달린 카세트 플레이어까지 구입해 '오디오북'을 나누어주며 설교에 열을 올리던 다니엘은, 그럼에도 별다른 진척이 없자 '간증'을 하기로 한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수님을 알기 전의 삶에 대해 말한 것이다. 어떻게 자신이 술과 마약에 빠져 지냈으며, 새엄마의 자살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한 마디로, 얼마나 불행했는지.
'문명세계'에서 그랬듯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오! 주여!'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같은 찬양을 연발하기를 기다리던 다니엘은, 그러나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는 그들의 반응에 당황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네 엄마가 자살했다고? 우하하! 참 바보 같다. 피다한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아."
결국, 자신의 악덕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의도적인 방치 속에 빈곤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들은, 불러도 오지 않는 경찰차와 앰뷸런스 대신 갱단을 부르고, 갱단의 지배하에 돌아가는 지하경제를 통해 생활을 꾸려나갈 뿐이고, 그런 빈민가의 작동원리는, 근본적인 지점에서 수디르가 살아왔던 '사회 안쪽'과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다니엘 또한 마찬가지.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며, 죄의식도 없이 순간에 충실한, 누구도 자살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와 자칫하면 술과 마약에 유혹에 빠지고, 쉽게 목숨을 끊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 중에 도대체 어느 사회가 더 나은 사회인지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듯,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회 혹은 문명과 조우한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의문을 던지며 점점 더 성장하지만 그 결말은 사뭇 다르다. 사회구조에 대해 별 다른 의문을 느끼지 못하던 중산층 사회학자 수디르는, 빈민 문제가 사회 때문임을 깨닫고 그들에게 형제와 같은 유대를 느낀다. 하지먼 거기까지. 별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던 그는 완성한 논문을 쥐고 씁쓸하게 '사회 안 쪽'으로 복귀할 뿐. 하지만 선교하러 왔다가 신앙을 버리게 된 다니엘은 아래와 같은 꽤나 감동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피다한 사람들은 실용적인 유용성만을 인정한다. 이들은 우리 머리 위에 천국이 있다고 믿지 않으며, 우리 발밑에 지옥이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이들은 죽음에 대해 어떠한 추상적인 설명도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절대자, 정의로움, 성스러움, 죄악, 소유와 같은 개념이 없다. 그러한 개념이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피다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삶, 그러한 사회를 직접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 인류에게 더없이 소중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삶은 참으로 매력적인 비전이다.
우리는 종교와 진리라는 가치를 버리고도 충분히 행복하게, 아니 훨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피다한 사람들은 그것을 증명한다. 물론 그들이 느끼는 욕구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욕구는 대부분 문화가 달라도 똑같은 생물학적 바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문화는 말로 직접 표현하기 어려운 생물학적 욕구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 이러한 욕구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하루하루 그저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유용하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피다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따라서 어떠한 욕구도 쌓일 틈이 없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거의 모두 앓고 있는 걱정, 두려움, 좌절의 근원이 피다한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초월적인 존재, 보편적인 진리를 열망하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은 그들의 가치관 속에 들어갈 자리조차 없다. 피다한 사람들에게 진리란 물고기를 잡는 것, 노를 젓는 것, 아이들과 웃으며 노는 것, 형제를 사랑하는 것, 말라리아로 죽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 때문에 그들을 미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신, 세상, 창조와 같은 개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관념의 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을 다른 기준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구성원들이 행복할수록 발전한 문화이고 불행할수록 미개한 문화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피다한 문화는 지구상에서 가장 발전한 문화이다. 억지처럼 들리는가? 걱정, 불안, 욕심, 두려움, 불만, 좌절, 세상을 모두 이해하고 말겠다는 아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한지, 즐겁고 유쾌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한지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라. 신이나 진리는 과연 무엇에다 쓸 것인가?
-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중에서
언젠가 존 레논이 노래했듯이.
상상해 봐요, 천국이 없다고
아주 쉬워요 일단 시도해 봐요
저 아래 지옥도 없고
우리 위에는 파란 하늘 뿐이죠
상상해 봐요, 모든 사람들이
그저 오늘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이런 것들을 읽고 있으면, 방바닥에 누워 책을 통해 다른 인생과 간접조우를 시도할 뿐인 게으른 인문MD 조차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짜 좋은 게 뭐지?" 혹은
"How to be good?"
아마 커트 보네거트라면 이렇게 되물었겠지.
"짹짹?"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속한 사회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생활인이고. 아마존에 갈 일도, 빈민가에 잠입할 일도 없는 보통 사람들. 그렇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어쨌거나 인생은 계속해서 흘러 가는 것이다. 언제 사람 되나 싶어도, 제대로 좀 살고 싶어도… 아무 도리 없이.
그런 우리들에게 언제나처럼 피터 싱어는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출근길마다 작은 연못가를 지난다. 날씨가 더울 때면 가끔 연못에 들어가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겨우 무릎까지 물이 차니 염려는 없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춥고, 시간도 이르다. 그런데 연못에서 첨벙거리는 아이가 있는 게 아닌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주 어린아이다. 겨우 걸음마를 하는……. 그 아이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다. 주위에 아무도 없나, 부모나 유모는? 하고 둘러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물 밖으로 겨우 몇 초 동안만 고개를 내밀수 있는 모양이다. 뛰어 들어가 구하지 않으면, 빠져 죽고 말 것이다. 물에 들어가기란 어렵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며칠 전에 산 새 신발이 더러워질 것이다. 양복도 젖고 진흙투성이가 되리라. 아이를 보호자에게 넘겨주고 옷을 갈아입고 나면, 틀림없이 지각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자, 당신은?
피터 싱어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구하겠다고 한단다. 큰 맘 먹고 장만한 양복과 새 신발을 버려도, 지각해서 월급이 깎여도. 아이를 구하는 일이 더 소중하므로. 싱어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지구상에 수많은 아이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단지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버려둔 채 새 양복과 새 신발을 사는가?
뜨끔.
세상엔 끔찍한 부류와 비참한 부류가 있다고 생각해. 두 개의 카테고리가 있다고.
끔찍한 부류는, 이를테면, 말기환자 같은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맹인, 장애자..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 나한테 그건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야.
그리고 비참한 부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지. 그게, 그게 다야.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비참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해.
비참하다는 건, 정말 운이 좋은 거니까.
- 앨비 싱어, <애니 홀> 중에서
가끔 비어있는 지갑을 바라보며, 곰곰 따져보다가 '이게 다 매달 나가는 기부금 때문이야'라고 생각해버리는, 비참함에 잠을 설치지만 운이 좋다고는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인간 되려면 한참 먼 인문MD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Special Thanks to
to 커트, 여전히 평안하시길
to 닉, 언제 술 한잔 해요
to 우디, 당신의 여름은 어때요?
to 존, 당신이 옳았어요
to 허경영, 전화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