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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주문이 많은 요리점 <1Q84>
현장 MD가 뽑은 올해의 좋은 책 2009

  연말의 묘미는 역시 시상식이다. 영화․음악․드라마․버라이어티에 이르기까지, TV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한 해가 절로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때론 공정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아이돌 그룹이 축하공연을 하는데 공정성 따위에 신경 쓰고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정성이라니, ‘초신성’도 아니고.

  시상식이야 차고 또 넘치지만, 애석하게도 책을 대상으로 한 행사는 찾기 힘들다. 2010년을 코앞에 두고 있건만, 리영희 선생이 평생공로상을 받고 카라가 축하공연을 하는 훈훈한 광경은 요원한 것이다. 출판계가 영세한 탓만은 아니다. 출판연감에 따르면 2008년 출간 도서는 43,099 종이라고 한다. 만화와 참고서․어린이 책을 제외한다고 해도 25,000 종이 넘는다. 드라마나 음반은 말할 것도 없고, 500여 편 내외가 개봉하는 영화와도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어쩐지 가난한 흥부와 그 자식들이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 사회의 1인당 평균 독서량이 1년에 10.8권이라고 하니, 2008년 출간된 책을 다 읽을 2300년 쯤 후에는 화려한 시상식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이런 사정 탓에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인터넷 서점에서 진행하는 ‘올해의 책’ 투표다. 화려하진 않지만 전적으로 독자들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는 나름 쏠쏠한 편. 투표가 막바지에 이른 올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1위를 달리고 있다. 일본에서 예약판매 기간 동안 60만부를 팔았다는 뉴스부터 선인세 논란, 속편 소식에 이르기까지. 하루키를 둘러싼 말들이 끊이지 않았던 한 해이지만, 감개가 무량한 건 어쩔 수 없다. 세상에, 하루키라니. 90년대에 태어난 친구들이 아이돌로 데뷔하는 2009년인데?

  ‘춘천 가는 기차’ 안에서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는 여인에게 “노르웨이의 숲엔 가보셨나요?”라는 멘트를 날리던 핸드폰 CF가 화제를 모았던 게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 사이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이라며 청춘의 정언명령을 날리던 쿨한 형은 어느덧 예순을 넘긴 할아버지가 되었고, 한때의 청춘남녀들 또한 심드렁한 생활인이 되어 버렸다. 10년이란, 그런 시간이다. 그럴듯한 음식과 음악, 모험과 환상이 있는 <1Q84>는 분명 잘 쓰인 하루키 소설이지만, 2009년의 독자들이 열광한다면 그 이상의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평자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이 자리에서 진실을 밝히겠다. <1Q84> 흥행의 비밀은 바로 ‘난독증이 있는 문학 미소녀’ 후카에리다. 귀엽고 예쁘지만 어딘지 통념과는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던 기존 하루키의 소녀들과 달리, 후카에리의 외모는 그야말로 전형적. 몇몇 장면들은 걸그룹 팬픽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2권 중반에 등장하는 베드씬은 남성 판타지의 총결산이라 할만 하다. 영감님도 참 주책이시지만, ‘올해의 베드씬 상’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년에는 범람하는 연말 시상식 자리에 책 관련 행사도 추가 되었으면 좋겠다. 화려하고 의미 있는 행사가. 꼭 <1Q84>와 후카에리 때문은 아니다.


- 무비위크 409호




그러니까 실은, 거창한 제목의 '현장 MD가 뽑은 올해의 좋은 책 2009'는 '올해의 베드씬 상'을 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물론 영감님이 다 잘하셨다는 건 아니다. 주책이라는 생각이 안드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상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안드는 것 또한 아니다…. 이런 게 나이를 먹은 건지 아직 젊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 글에 담긴 일말의 진심에 대해. 지금까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루키의 작품은 <상실의 시대>였다. 다른 작품들은 관심의 정도에 따라 읽거나 읽지 않았거나 했겠지. 그리고 이제 그 자리를 <1Q84>가 물려 받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정답은 우리 마음 속에… (절대 낚시 아님)

2010년에는 다들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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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계란 2010-01-06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1Q84 1권 뗐는데 정말 퇴근하고 싶게 만드는 글이군요. 외근도 가야하고 할 일도 많지만 어서 퇴근해서 2권부터 읽어야겠어요!

활자유랑자 2010-01-07 17:3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꼭 보아야 하는 베드씬인 겁니다(응?) 하지만 남성 판타지의 총집합이라... (먼 산)

2010-10-05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꼭 하루키를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해변의 카프카부터는 좀 싫어졌어요. 너무 심각해졌달까나요.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그냥 젊은 시절부터 이름난 작가여서 작가 생활만 해 온 관념성이 느껴지는.. 젊은 시절 하루키가 더 좋아요.
글구 에반게리온 티비판 및 영화 시리즈를 보면 볼수록 이런, 오타쿠 남자들, 싶어지던데, 10년만에 다시 오프닝을 보니 더 그런 생각이.. 하루키도 사실 보면 볼수록 그 점이 아주 일관됩니다..=.= (말씀하신 남성 판타지..) 흥행의 비결 두 자리 수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근데 야한 영화는 잘 팔리는 공식이 있긴 한데, 책 쪽은 잘 모르겠어염. 역시 흥행의 비결은 복잡하다는.
 

  왜 새해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신년계획을 세우는 걸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하얀 종이에 또박또박 번호까지 매겨가며. 하나, 새해에는 운동하겠습니다. 두울, 새해에는 영어 공부하겠습니다. 세엣, 새해에는 해외로 떠나겠습니다. 네엣, 기타 등등… 레파토리 하나 변하지 않는다.

  동굴 벽에 사냥감을 그리던 고대를 지나 클릭 한 번으로 한우를 주문하는 21세기에 이르렀건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의식ritual이 필요한 모양이다. 새해-묵은해의 구분이 인위적인 숫자놀음에 불과할지라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한 해가 시작되었음을 스스로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도 신년계획은 세워야 한다. 그렇다면 왜, 매년 똑같은 계획만 세우는 걸까?

  운동, 좋지. 이왕 사는 인생 건강하게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몸짱’까지 된다면 두말할 것 없겠다. 영어 공부는 필수. ‘글로벌’ 시대, 영어는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해외여행도 물론. 언제까지나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살 수는 없잖아? 결국 우리의 신년계획은 한 마디로 압축된다. 바로 ‘자기계발’. 시중에 깔려있는 그 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외치고 있는 그것 말이다.

  물론 자기계발은 중요하다. 일찍이 공자님도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지 않던가. 문제는 모든 자기계발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 우리 모두는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신년계획은 오직 ‘경쟁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행복도 충만도 성공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듯. 

  문화평론가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는 이런 우리의 무의식을 분석한다. 좀 더 많은 자유를 주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강박적으로 자기계발 서적을 소비하며 ‘스펙’과 ‘경력’ 관리에 몰두하는 개인은, 결국 권력과 자본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고․신체․행실을 변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도래한 실패는 자기책임과 자기실현의 문제로 환원된다. 결국, 우리의 무반성적인 신년계획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기계발 논리의 극단은 이경숙 위원장의 ‘어륀지’ 발언에서 드러난다. ‘어륀지’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한국인은 경쟁력 있는 세계시민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까? 이런 걸 보고 요즘 친구들은 ‘열폭’(* ‘열등감 폭발’을 뜻하는 인터넷 조어)이라고 한다. 광화문 광장의 꽃밭 이름을 ‘플라워 카펫’이라 붙인 것 또한 마찬가지. 자격지심도 그런 자격지심이 없다.

  6호선의 ‘디지털미디어시티’ 역은 또 어떤가. 본래 수색에 있어 수색 역이었던 곳이 ‘상암DMC’가 들어서며 슬그머니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원의 소설 <수색, 그 물빛 무늬>도 <디지털미디어시티, 그 물빛 무늬>라고 개정판을 내야 하나? 사실 ‘상암DMC’란 이름부터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이다. ‘디트로이트 메탈시티Detroit Metal City’의 약자인가? ‘니가 내 치즈를 옮겼니? Did you Move my Cheese?’를 줄인 건가?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자기계발서 열풍을 주도했던 초대형 베스트셀러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이후 10년. 치즈를 훔친 범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건가? 사라진 치즈에 집착하기보단 진취적으로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나는 게 건강한 삶의 자세라고는 해도, 일단 범인은 잡아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2010년, 새로운 나의 신년계획은 이렇다. 말도 없이 치즈를 집어간 범인을 잡아내기. 모르긴 몰라도 부단한 자기계발을 통해 새로운 치즈를 찾으라며 우리 등을 떠밀었던 이와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 월간 인물과 사상 2010. 1




이 글은 순전히 상암DMC 때문에 쓰여졌다. 언젠가부터 DMC, DMC 하는 얘기가 종종 들려왔지만 그 이름의 실체를 안 것은 수색역이 '디지털미디어시티' 역으로 바뀐 후다. 그 전에는 정말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인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식해서 죄송합니다)

"Did you Move my Cheese?"는 사실 억지다. 왠지 우디 알렌이 떠올라서 한번 써봤다. ("글쎄 그 녀석이, 유대인이라고 나를 차별하는 거야.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더니 이렇게 묻더라고. 'Did you eat?'" "그건 그냥 밥 먹었냐는 얘기잖아" "아니지, 잘 들어봐 "디드유잇? 디쥬잇? 뒤쥬잇? 쥬이싯? Jewish eat? 유대인도 먹냐는 얘기잖아.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지?")

나의 계획 : 2010년에는 징징대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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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자유랑자 2010-01-04 04:38   좋아요 0 | URL
ㅜ_ㅜ 이것참 큰일이네요.
그렇지만 꼭 '부득이'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우겨 보겠습니다! ㅜ_ㅜ

비로그인 2009-12-3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D님께선 아직도 배가 고프시고.

활자유랑자 2010-01-04 04:38   좋아요 0 | URL
아직도 졸려요. 햅삐 뉴 이어

고랑이 2009-12-31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색역이 디지털미디어시티 역으로 바뀌었군요. 한 10년 후에 보면 굉장히 촌스러운 역 이름이 될 것 같은데..

활자유랑자 2010-01-04 04:39   좋아요 0 | URL
지금도 촌스럽지 않나요? ;

gaebab- 2010-01-0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제 홍세화 선생님 강연을 들으러 디지털미디어시티 역에 갔었더랬죠. 근데 택시기사님들도 아직 그 역 이름을 잘 모르시더라고요.. 어쨌든 디지털미디어시티,는 길어서 짜증이 나요. 수색역은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자전거를 몰고 한가로이 다녔던 동네로 기억하는데, 다행히 수색역은 경의선 노선에 그 이름이 살아 있어요. 어제 강연 들으러 갔던 큰 빌딩(~스퀘어)은 어차피 수색역이란 이름과도 분위기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활자유랑자 2010-01-12 11:2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동네가 완전히 변해버렸지요.
성산동-북가좌동-응암 일대에서 30년을 산 제 입장에선... 좀 슬퍼요. ㅜ_ㅜ

오른쪽에앉았던유부남 2010-02-1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연씨 글 너무 재미있음! 센스쟁이!

활자유랑자 2010-02-16 19:31   좋아요 0 | URL
보고 싶어요 T.T
 

  서른 살 이후에도 삶은 계속 될까? 스무 살 무렵의 내게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아마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시간이 햇빛처럼 공짜였던 시절. 외국의 펑크 밴드들은 서른 넘은 어른은 믿지 말라며 악을 써댔고, 나는 노래에 맞춰 머리를 흔들곤 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머리는 가벼웠으니까. 유일한 문제라면 서른 넘은 어른 따위는 내 주변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 정도? 조금 실망한 나는, 대신 스물다섯 넘은 복학생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학교 앞 술집들을 전전하던 밤, 짤랑대는 잔돈을 추렴해 술을 사들고 학교에 오르면 먹다 남은 중국집 접시와 파란 소주병을 앞에 둔 복학생 형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제 때 자르지 않아 뻗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의 그들은 철학과 선배들이었다. 말장난을 좋아했던 선배들은 우리를 반겨 맞으며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곤 했다. 인생은 뭐라고 생각해? 너는 왜 사니? 어차피 사람은 죽는데 인생은 무슨 소용일까? 하는 물음에 글쎄요, 뭐 그냥 사는 거죠, 어차피 밥 먹으면 다 똥 되는데 그래도 먹잖아요? 하는 심드렁한 대답이 이어졌고.

  지리한 문답 끝에는 대개 선배들의 인생 설교가 이어졌다. 저 마다의 개똥철학엔 유행처럼 냉소가 녹아들어 있었다. 설교 다음 순서는 바로 노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청계천 팔가’니 ‘전화카드 한 장’이니 하는 노래들을 흥얼거리기 시작하지만, 선곡의 마지막은 언제나 김광석이었다.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자니 이미 제대한지 오래고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부르자니 아직 파릇파릇했던 형님들이지만 다행히 김광석은 히트곡이 많았던 것이다. 또 하루 멀어져 가는 그 새벽에, 떠나간 내 사랑은 ‘으어디에’ 있는지, 그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물었다. 그 사랑의 행방을 알 리 없는 순진한 새내기는 그저 뻐금뻐금, 담배 연기나 보탤 수밖에.

  그럴 때면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생각나기도 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새벽, 내 볼에 까칠한 수염을 비비던 아버지의 시큼한 냄새가. 그런 새벽엔 선배도 아버지도 모두 우습고 또 쓸쓸해보였다.

  선배들이 권해주던 책들이 생각난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 요수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 신입생의 눈높이에 맞춘 것인지는 몰라도 수준 높은 추천은 아니었던 셈이다. 유행하는 소설 혹은 고등학교 필독서. 그럼에도 내 독서편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은 있었으니, 철학사나 한 번 공부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물어오는 내게 한 선배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뭐, 렘프레히트도 괜찮고, 윌 듀란트도 괜찮고 네가 맘에 드는 거 아무거나 봐. 러셀 철학사만 빼고.” 왜냐고 묻는 내게 선배가 대답했다. “완전 제 멋대로 쓴 소설이거든.”
 
  러셀을 읽든 읽지 않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서른 넘은 어른을 믿지 말라던 펑크 밴드는 서른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되었고, 한 달 후면 나 역시 서른이 된다. 시간은 더 이상 공짜가 아니고 시끄러운 음악을 듣지 않는 내 머리는 무거워진지 오래다. 그 시절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인터넷 서점 MD라는 것으로 먹이를 벌며, 서른 살이 넘건 넘지 않건 믿을 사람과 믿지 못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서른 살 이후에도 삶은 계속될까? 누군가 지금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아마 한숨부터 쉴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삶이라 부를 수 있는지, 나는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우습게도 이런 내게 위안을 주는 것은 러셀의 책이다. 냉소 반, 호기심 반으로 마침내 집어 든 <행복의 정복>에서, 러셀은 깐깐한 노인네의 말투로 지극히 상식적이며 건강한 삶에 대한 믿음을 피력한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 역시 서른 살이 되면 인생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쉰여덟이 된 지금은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웃을 뿐이다.

  문득, 지금껏 한 번도 그 선배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므헌지가 되어 당신 곁으로’ 가고 싶다던 그들은 서른을 무사히 넘겼을까? 러셀의 서양철학사가 새로이 완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직도 말장난을 좋아하고 술자리의 끝엔 노래를 부를까? 그렇다면 나는, 서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린 친구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알 도리 없는 나는 그저 뻐금뻐금, 담배 연기나 내뿜을 수밖에.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12





"이제 입학식까지는 열 세 시간이 남았어"



짧은 금발, 하얀 피부 가득한 주근깨가 영락없는 개구쟁이 꼬마 가르만은 겁이 난다. 내일이면 학교에 가야하지만, 아직 글도 쓸 줄 모르고 다른 아이들처럼 이가 빠지지도 않았고 자전거 타기나 물속에 머리 넣기도 못하는 가르만은 그래서 궁금하다. 어른이 되면 괜찮을까?

주름진 얼굴에 틀니를 한, 커다란 가슴이 부드러운 할머니들에게. 순회공연을 떠나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빠에게. 예쁜 정원을 가꾸고 가르만의 도시락과 셔츠 단추를 챙겨주는 엄마에게, 가르만은 묻는다. 할머니는 아빠는 엄마는, 그러니까 어른은 "겁나는 게 있나요?"

저마다의 대답 속에서 가르만의 여름은 어느덧 끝나 간다. 작은 참새가 백 마리도 넘게 살고 있는 뜰 가장자리와 울타리 사이의 비밀 공간에서 죽어 있는 참새를 땅에 묻으며 가르만은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북두칠성을 지나 하늘나라로 떠나겠지. 하지만 우선 지렁이가 사는 땅에 묻혀 흙이 되어야 해'

여름의 마지막 저녁, 필통을 정리하고 책가방을 정리하는 가르만. 마음도 키도 한 뼘쯤 자란 가르만은,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올해 첫 낙엽을 바라보는 가르만은, 혹시 빠질 것 같은 이가 있는지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가르만은, 여전히 겁이 난다. 여섯 번째 여름은 너무도 빨리 갔고, 이제 입학식까지는 열 세 시간이 남았으니까.

두려움도 결국 삶의 일부분임을 에둘러 말하는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가방을 다 싼 후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선 가르만의 뒷모습이다.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여섯 살 꼬마이지만 삶과 죽음, 두려움과 성장을 짊어진 한 사람으로서 그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좋은 책이 늘 그렇듯, 작은 가르만의 이야기 역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어린이가 읽을 책을 고르는 어른들에게 책을 권해주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한 사람의 직업인인 나를. 얼마나 많은 '좋은 책'들이 어른들의 눈에 걸러져 정작 아이들에게는 가닿지 못할까 두려워 종종 위축되는 나를.

그래서 꼬마 가르만의 앙상한 어깨의 떨림이, 그 작은 속삭임이 따뜻하다. 할머니도 아빠도 엄마도 가르만도-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가슴속에 펄렁거리는 나비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금정연(2007-10-09)

이제 서른 까지 9시간이 채 남지 않았고,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이 글을 올리고 담배를 피러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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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09-12-3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10대 때에는 거울처럼 지냅니다. 선생님, 부모님, 연예인, 좋아하는 사람들을 따라하고 지내죠. 자꾸 비춰보고.
20대 때에는 유리처럼 지냅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빛을 반사하듯 튕겨내기도 하고, 맘에 들면 때론 흡수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부딪히다 깨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지냅니다.
그렇게 여기 저기 치이고 깨어지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힘들고 지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곤하고. 깨지지 않고 조금씩 편하게 지내는 것. 그러다보면 나이에 ㄴ자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
광석형님 라이브 콘서트 앨범 중에서 「서른 즈음에」끝나고 나오는 말 중에서 생각나는대로 복기해봤습니다. 「이등병의 편지」가 군대 시절보다 제대한 후에 더 절실하게 들렸듯이, 아마 광석형님의 노래도 마흔이 되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전 요즘 김훈 작가님의 이 말이 계속 맴돌더군요. "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서른 축하드립니다. ^.^

활자유랑자 2010-01-04 04:51   좋아요 0 | URL
너무 호들갑 떨어서 민망한 서른 살의 아침이에요.
30대 때에는 무엇처럼 지내는 건지 궁금해요. 깨지지 않고 조금씩 편하게 지내는 것?
그렇다면 종이처럼 지내는 걸까요. 다만 그 내용에 책임을 져야하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기인 2009-12-3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동갑이시네요 ^^; 글 잘 읽고 있습니다.
ㅋ 이제 6시간 쪼금 더 남았습니다.

활자유랑자 2010-01-04 04:57   좋아요 0 | URL
이제 마흔을 향해 달려가는 건가요? 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k 2009-12-31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른 이후의 삶이란 '더이상 김훈과 지젝을 모순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서른을 사십분 남겨놓고서.

활자유랑자 2010-01-04 05:18   좋아요 0 | URL
갑자기 인생이라는 것의 무게가 실감 나는 이유는 뭘까요? >_<

어떤하루 2010-01-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여름, 홍대에서 08학번 후배와 술을 마시던 날이 생각납니다.
"언니, 내가 서른 살의 직장인과 술을 마시게 될 줄은 몰랐어요!" 웁스..
그 친구는 저보다 꼭 열 살이 어렸습니다 ㅋㅋ
올해는 09학번을 불러다 단둘이 술을 마셔야겠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머라 말할까요? 후훗.

어떤 선배가 되어야하는 것일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참 고민스러운 문젭니다.. ㅋ

활자유랑자 2010-01-12 11:26   좋아요 0 | URL
세상에, 08학번 아는 후배가 있다는 게 신기해요!
제가 학교 다닐때도 최고 높은 선배는 93학번이었거든요.

가끔씩은 후배들이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죠.
"그때 형이 이래서 내가 이렇게 된거야" 뭐 이런.
저는 이렇게 얘기해요. "웃기시네"

다락방 2010-01-1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인문MD님! 그러니까 이제 '겨우' 서른살이시군요!! 오호~

활자유랑자 2010-01-18 00:2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희 본부장님은 "너 지금와서 *** 하기에는 너무 늙었어"라고 하시던데요. 힁

삶은계란 2010-01-2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아홉도 버거운데 서른이라니...) 서른이 조금 덜 막막하려면 스물아홉엔 무엇을 해야하나요?

활자유랑자 2010-01-26 14:43   좋아요 0 | URL
노는 게 남는 거란 말이 있다죠.
다른 건 모르겠고 왜 안놀았나는 생각만 가득하다는. ㅎㅎ
 

  찬바람 불면 ‘개미와 베짱이’ 생각난다. 콧물이 나오듯 자연스레, 따뜻한 방안에서 웃고 있는 개미 가족과 창밖에서 떨고 있는 베짱이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누구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이 우화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고작해야 싸구려 전기장판 속에서 “5분만 더~”를 외치는 것이 우리네 겨울 풍경일지어니.

  몇 해 전, 소설가 김영하도 칼럼을 통해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스크린쿼터를 지키려는 영화인들을 베짱이로, “예술이 밥이냐 돈이냐?”를 외치는 생활인들을 개미로 놓고 베짱이의 편에서 예술을 옹호한 것이다. 전적으로 옳은 주장이지만, 그런 비유는 조금 위험해 보인다. 우리는 개미도, 베짱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일하는 우리는 베짱이보다 행복하고 개미보다 불행한 셈이다)

  ‘개미와 베짱이’의 결말을 생각해 보자. 낡은 외투를 입고 먹이를 구걸하는 베짱이와 그를 외면하는 개미. 결국 베짱이는 작은 바이올린을 안은 채 숨을 거두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위반한 개미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따뜻한 겨울을 만끽할 뿐이다. 여느 동화처럼 그 이후로도 오래도록 행복하게…. 게으른 자(루저 혹은 잉여)는 죽는 게 당연하다고, ‘쉬크한 듯 무심하게’ 말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 베짱이를 가리켜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2009 스프링 메이크업 룩은 ‘핑크 라이트 컬렉션’이다” 같은 느낌으로)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 칭한다. 이때 베짱이는 법적인 ‘예외상태’에 놓인 존재에 다름 아니다. 죽이는 일이 권장되진 않지만 죽여도 무방한 존재,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 ‘프런’처럼 잉여로 취급되는 ‘벌거벗은 존재’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조지 레이코프의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우화의 비유를 통해 게으른 베짱이는 죽어도 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부인할 수도 있다. “나라면 베짱이를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테야!”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다음 질문. “만약 내가 베짱이가 된다면? 그때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끝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운,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중 누군가는 개미가 되고 나머지는 베짱이가 된다는 것. 비참하게 죽지 않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해야 한다는 것. 행여 베짱이가 된다면, 우리를 죽이는 것은 다름 아닌 개미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 매고(완벽한 ‘S자’를 그리는 개미허리처럼!) 자식들을 ‘국제중’, ‘자사고’, ‘명문대’에 보내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우리를 개미와 베짱이로 나누는 것일까? 개미나 베짱이가 아닌, ‘인간’으로 사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이 지금, 학계에선 ‘지미 추’ 보다 더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아감벤이 그의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쉽게 답할 수 없는, 그러나 눈감을 수 없는 질문이 여기에 있다.


- 무비위크 405호



엄살과 무리한 개념화로 가득찬 이 글을 다시 보고 있으려니 닭살이 돋는다. 개미허리가 정말 완벽한 'S자'를 그렸던가? 그냥 8자 아닌가…. 아감벤을 '지미 추'에 비유한 것은 모르는 사람 자꾸 얘기한다고 욕먹을 일이 두려워서다. 나는 '지미 추'를 모르지만 그냥 귀동냥으로 명품 구두를 만든다는 것 정도만 알고 넘어 가듯이, 그렇게 슬쩍 물을 타보려 했단 말이다. (아감벤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겨울, 따뜻한 방안에서 벽난로를 쬐는 것은 나의 오랜 로망이다. 유치원에서 배운 거라곤 그것밖에 없으니. 일종의 과거애착이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베짱이의 인생을 살고 싶어 했고, 자아 분열은 그렇게 시작된다…. 베짱이를 받아 들일 거냐는 질문은 그래서 우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의 베짱이조차 방치해 온 것이다.

언어의 힘은 아주 세서, 우리는 마치 개미 아니면 베짱이가 되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유치원에서 그렇게 가르쳐주기 때문이고, 누군가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간단하다. 열심히 일하는 개미가 되어 가끔 베짱이를 도와주면 되지 않겠는가. 베짱이로 살기는 아무래도 좀, 힘들 것 같으니까. 그런 사고방식에 대해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한다. "선줄로 아는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개미도 베짱이도 아니다. 인생은 O, X 퀴즈가 아니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글은 '열폭'에 다름 아니다. 더 많이 가진 개미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 베짱이 처럼 당당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짜증인 것이다. 요즘 남자들은 다 애송이라고 렉시가 그랬던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이렇게 노래한 건 조용필이었겠지. 귀뚜라미나 베짱이나, 솔직히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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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09-12-3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김훈을 정말 사랑하시는 알라딘인문MD님~
>.,<

활자유랑자 2009-12-31 15:46   좋아요 0 | URL
앗, 걸린 건가요. 이런;
 

  찬바람 불고 낙엽 지는 계절이면 나는 이문세 노래를 흥얼거린다. ‘가을이 오면, 눈부신 아침 햇살에 비친 그대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물론 거울을 보며 부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을은 대개 시리게 마련이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역시 마찬가지. 이를테면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어버리듯. ‘지나온 날들이, 가슴에 사무’친다고.

  지나온 날들이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깊이 스며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다’라는 사전의 정의대로.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리며, 너무 가까워 보지 못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에, 깊이 스며드는 것은 언제나 어제일 수밖에. 구체적인 추억이 아니라도 좋다. 강렬했던 희망 혹은 절망 혹은 무엇이라도. 일단 지난 후에야 사무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찬바람 불고 낙엽 지는 데야. 

  내 짧은 인생에도 사무침은 차고 또 넘치지만, 요즘 특히 사무치는 것은 지난 이십대의 삶이다. 피식, 실소를 내뱉을 어르신들도 계시겠지만. 스물아홉의 가을이란 그런 계절이 아니던가요? 주먹 틈으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시간을 흘려보내고 어느새 빈손, 이 된 것 같은 쓸쓸함. 그러니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 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조차도 모르게.

  우석훈 박사를 만난 건 그런 날이었다. 찬바람 불고 낙엽 지는, 대학 캠퍼스에서. 이십대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준 인터뷰이와, 그 이십대를 이제 보내야 하는 인터뷰어는 그렇게, 인터뷰를 시작한다. ‘88만원 세대를 위한 새 판짜기’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라는 제목에조차 사무쳐하는 인터뷰어는, 이미 제대로 된 인터뷰어는 아니었던 셈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명명에 마음 아파하는 이십대들을 바라보며, 자신 역시 마음 아팠다는 우석훈 박사. 속칭 <88만원 세대 2>로 불리는 새 책에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사실 단순하다. 괜찮다고, 너희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그러니 쫄지 말라고, 죽지 않는다고.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너희들이 일단 모여서 무엇이든 함께 한다면, 새로운 상상력들이 터져 나올 거라고. 그때 이미 변화는 시작된 거라고. 이미 책에서 읽은 내용이지만 믿지 못해 재차 묻는 인터뷰어에게, 그는 인내심을 갖고 다시 말한다. 그것이 비록 게토와 다를 게 없다 하더라도, 이십대들이 연대하는 게토라면, 결국엔 그곳에서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할 거라고.

  또 하루 멀어져가는 이십대를 아쉬워하는 인터뷰어는, 문득 궁금하다. 앞에 있는 이 마흔 두 살의 남자는, 친구는커녕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이십대들을 어떻게 철석같이 믿을 수 있을까? 그가 믿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성질이다. 그것은 인권에 대한 믿음인 동시에 인간의 한계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것들을 박탈당한 상황에서 이십대들이 얼마나 더 참을 수 있겠냐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는 덧붙인다. 지금 이십대들의 미학적 감성이, 이 추한 상황들을 계속 참고 넘길 수는 없을 거라고. 

  계란이 깨질까 조심스레 웅크리고 품고만 있다 이제는 그 계란이 썩어버린 게 아닌지 불안한 인터뷰어는 더 묻고 싶었지만, 자꾸자꾸 캐물어서 확답을 받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데, 보따리 내놓으라고 따지는 것은 예의가 아님을 알기에.

  그 대신 생각. 지나간 이십대는 여전히 사무치지만, 그렇기에 다가올 삼십대는 좀 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아직은 막연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터뷰는 계속 되었지만, 질문을 하고 답을 기록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 생각을 했다. 미안해요, 우석훈 박사님. 하지만 그게 박사님이 바라신 거 아니었나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생각은 정리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쫄아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손아귀에서, 꽉 쥐인 채 그저 목구멍만을 걱정하는 스물아홉의 나는 여전히. 그 대신,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조금 바뀐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런 노래를.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우후, 돈보다 더 귀한 게 있는 걸 알게 될 거야, 인생이란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해, 나나나나 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나나나나 우 얄미웁게!

  그러니 혁명은, 이렇게 노래처럼.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11
(혁명은 노래처럼…)




이 글은 일종의, 뮤지컬이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것도 좀 촌스러운. 하필 이문세인 이유는,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지하상가에서 처음으로 사달라고 조른 테이프가 이문세 6집이었다. 엄마는 사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으니까.

그렇다면 왜 우석훈인가. 본격실존MD(웃음)의 입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우석훈의 책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석훈은 참 말하기 좋은 사람이다. 인터넷에 우석훈 석자를 넣으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일이다. '88만원 세대론'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우석훈의 캐릭터로 인해 '물타기' 되는 듯한 느낌까지 받게 된다.

세대론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정서'를 건드린다는 점이다. 보수언론은 이를 이용해 변희재의 실크세대론으로 물타기를 시도하며 20대 vs 386세대의 구도로 몰아가려 했다. 그들이 영리한 증거다(변희재가 영리하단 얘기가 아니다). 이론적으로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냉소와 무시는, 그 정서의 진폭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세대론과 계급론 중 어떤 것이 옳은가? 올드보이의 대사처럼, 질문이 틀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세대론의 한계 또한 분명하다. 같은 이유다. 정서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것. 대개의 정서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가 씁쓸한 뒷맛 만을 남기는 것. (이때의 뒷맛은 체념이다. 에효, 더러운 세상 닥치고 취업준비나 해야지…)

공저자인 박권일의 의도(세대론을 통한 우회?)와 달리 우석훈은 처음부터 명확하게 '정서'를 노렸다. 그가 혁명이라는 단어를 굳이 되살리려 애쓰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그의 후속작업이 정서를 넘어설 수 있을까? 씁쓸한 뒷맛을 잊고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 글쎄. 그럼 답은? 알라딘이 업계 1위를 정ㅋ벅ㅋ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사건은 원점으로….

일기예보에 따르면, 양과 염소로 나누어 잘못된 '세대'를 갈라주실 신은 당분간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물론 이것은 <88만원 세대>의 논의와는 아무 상관 없다)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작은 틈이다. 정체된 상황을 뚫고나갈, 작은 송곳 같은 것. 말은 좋다만. 인문/사회 담당MD의 딜레마의 단편이다.

아름다운 형식미를 위해 이문세를 다시 불러 보자면, 헝크러진 머리결은 이제 빗어봐도 빗기질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파마를 하거나, 다른 곳으로 가 박박 밀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당면 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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