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불고 낙엽 지는 계절이면 나는 이문세 노래를 흥얼거린다. ‘가을이 오면, 눈부신 아침 햇살에 비친 그대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물론 거울을 보며 부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을은 대개 시리게 마련이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역시 마찬가지. 이를테면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어버리듯. ‘지나온 날들이, 가슴에 사무’친다고.
지나온 날들이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깊이 스며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다’라는 사전의 정의대로.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리며, 너무 가까워 보지 못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슴에, 깊이 스며드는 것은 언제나 어제일 수밖에. 구체적인 추억이 아니라도 좋다. 강렬했던 희망 혹은 절망 혹은 무엇이라도. 일단 지난 후에야 사무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찬바람 불고 낙엽 지는 데야.
내 짧은 인생에도 사무침은 차고 또 넘치지만, 요즘 특히 사무치는 것은 지난 이십대의 삶이다. 피식, 실소를 내뱉을 어르신들도 계시겠지만. 스물아홉의 가을이란 그런 계절이 아니던가요? 주먹 틈으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시간을 흘려보내고 어느새 빈손, 이 된 것 같은 쓸쓸함. 그러니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 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조차도 모르게.
우석훈 박사를 만난 건 그런 날이었다. 찬바람 불고 낙엽 지는, 대학 캠퍼스에서. 이십대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준 인터뷰이와, 그 이십대를 이제 보내야 하는 인터뷰어는 그렇게, 인터뷰를 시작한다. ‘88만원 세대를 위한 새 판짜기’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라는 제목에조차 사무쳐하는 인터뷰어는, 이미 제대로 된 인터뷰어는 아니었던 셈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명명에 마음 아파하는 이십대들을 바라보며, 자신 역시 마음 아팠다는 우석훈 박사. 속칭 <88만원 세대 2>로 불리는 새 책에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사실 단순하다. 괜찮다고, 너희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그러니 쫄지 말라고, 죽지 않는다고.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너희들이 일단 모여서 무엇이든 함께 한다면, 새로운 상상력들이 터져 나올 거라고. 그때 이미 변화는 시작된 거라고. 이미 책에서 읽은 내용이지만 믿지 못해 재차 묻는 인터뷰어에게, 그는 인내심을 갖고 다시 말한다. 그것이 비록 게토와 다를 게 없다 하더라도, 이십대들이 연대하는 게토라면, 결국엔 그곳에서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할 거라고.
또 하루 멀어져가는 이십대를 아쉬워하는 인터뷰어는, 문득 궁금하다. 앞에 있는 이 마흔 두 살의 남자는, 친구는커녕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이십대들을 어떻게 철석같이 믿을 수 있을까? 그가 믿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성질이다. 그것은 인권에 대한 믿음인 동시에 인간의 한계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것들을 박탈당한 상황에서 이십대들이 얼마나 더 참을 수 있겠냐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는 덧붙인다. 지금 이십대들의 미학적 감성이, 이 추한 상황들을 계속 참고 넘길 수는 없을 거라고.
계란이 깨질까 조심스레 웅크리고 품고만 있다 이제는 그 계란이 썩어버린 게 아닌지 불안한 인터뷰어는 더 묻고 싶었지만, 자꾸자꾸 캐물어서 확답을 받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데, 보따리 내놓으라고 따지는 것은 예의가 아님을 알기에.
그 대신 생각. 지나간 이십대는 여전히 사무치지만, 그렇기에 다가올 삼십대는 좀 더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아직은 막연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인터뷰는 계속 되었지만, 질문을 하고 답을 기록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 생각을 했다. 미안해요, 우석훈 박사님. 하지만 그게 박사님이 바라신 거 아니었나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생각은 정리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쫄아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손아귀에서, 꽉 쥐인 채 그저 목구멍만을 걱정하는 스물아홉의 나는 여전히. 그 대신,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조금 바뀐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런 노래를.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우후, 돈보다 더 귀한 게 있는 걸 알게 될 거야, 인생이란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해, 나나나나 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나나나나 우 얄미웁게!
그러니 혁명은, 이렇게 노래처럼.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11
(혁명은 노래처럼…)
이 글은 일종의, 뮤지컬이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것도 좀 촌스러운. 하필 이문세인 이유는,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지하상가에서 처음으로 사달라고 조른 테이프가 이문세 6집이었다. 엄마는 사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으니까.
그렇다면 왜 우석훈인가. 본격실존MD(웃음)의 입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 우석훈의 책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석훈은 참 말하기 좋은 사람이다. 인터넷에 우석훈 석자를 넣으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일이다. '88만원 세대론'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우석훈의 캐릭터로 인해 '물타기' 되는 듯한 느낌까지 받게 된다.
세대론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정서'를 건드린다는 점이다. 보수언론은 이를 이용해 변희재의 실크세대론으로 물타기를 시도하며 20대 vs 386세대의 구도로 몰아가려 했다. 그들이 영리한 증거다(변희재가 영리하단 얘기가 아니다). 이론적으로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냉소와 무시는, 그 정서의 진폭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세대론과 계급론 중 어떤 것이 옳은가? 올드보이의 대사처럼, 질문이 틀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세대론의 한계 또한 분명하다. 같은 이유다. 정서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것. 대개의 정서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가 씁쓸한 뒷맛 만을 남기는 것. (이때의 뒷맛은 체념이다. 에효, 더러운 세상 닥치고 취업준비나 해야지…)
공저자인 박권일의 의도(세대론을 통한 우회?)와 달리 우석훈은 처음부터 명확하게 '정서'를 노렸다. 그가 혁명이라는 단어를 굳이 되살리려 애쓰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그의 후속작업이 정서를 넘어설 수 있을까? 씁쓸한 뒷맛을 잊고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 글쎄. 그럼 답은? 알라딘이 업계 1위를 정ㅋ벅ㅋ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사건은 원점으로….
일기예보에 따르면, 양과 염소로 나누어 잘못된 '세대'를 갈라주실 신은 당분간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물론 이것은 <88만원 세대>의 논의와는 아무 상관 없다)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작은 틈이다. 정체된 상황을 뚫고나갈, 작은 송곳 같은 것. 말은 좋다만. 인문/사회 담당MD의 딜레마의 단편이다.
아름다운 형식미를 위해 이문세를 다시 불러 보자면, 헝크러진 머리결은 이제 빗어봐도 빗기질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파마를 하거나, 다른 곳으로 가 박박 밀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당면 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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