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업데이트 된 네*버 지식인의 서재(참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다)에서 김훈 선생의 인터뷰를 읽었다. 김훈은 자신의 서재를 가리키며 말한다.
"여기는 내 서재라기보다는 막장이에요. 막장. 광부가 탄광 맨 끝까지 들어간 데를 막장이라고 그러잖아요. 광부는 갱도의 가장 깊은 자리인 막장에서 곡괭이를 휘둘러서 석탄을 캐지요."
저작권법도 강화된 마당에 이렇게 인용을 하고 있자니 조금 쫄리긴 하지만 나에게도 할 말은 있다. 실은 저 '막장'의 두 번째 뜻은 대학시절 내가 이미 써먹었던 것이다. 무료하던 복학생 시절, '막장'(요즘 쓰이는 그 뜻 그대로) 동무들과 순진한 1, 2학년들을 꼬셔 만든 연극학회의 이름이 바로 '인생막장™'이었다. 증거도 있다.
"지금은 ‘인생막장’이라는 학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명색이 국문과인데 연극 관련 학회가 없다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해서 작년에 복학하면서 제가 만든 학회에요. 이름이 이상하다느니, 정말 막장 같다느니 하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학회원 26명으로 정원 130명인 국문과는 물론이고 인문대 내에서도 가장 큰 학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생막장’이란 이름은, ‘막장’의 두 번째 뜻 즉 ‘갱도의 끝에서 광물 등을 캐내는 행위’에서 따왔습니다. 누군가 닦아 놓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삶의 끝에서 순전히 스스로의 손으로 삶을 개척하자는 거창한 뜻을 담고 있지요. 연극과 영화를 보고, 세미나를 하면서 지금은 2학기 때 올릴 창작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서' 중에서. 알라딘 1급 극비문서고 보관)
결국 130명 중 26명이 왕십리 보단 대학로에서 술 먹길 선호했다는 ㄷ뜻인데, 어쩐지 오그라드는 손발 때문에 자꾸 오타가 난다. 손가락이 오그라들다 못해 손바닥을 찌를 지경. 손끝이 무뎌진 탓으로 다행히 피는 나지 않고 있다. 그래. 결국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게 다 무뎌진 손 때문이다. 그렇다면 손은 왜 무뎌지는가? 맨손으로 '막장' 짓을 했기 때문이다.
음, 다시 말해야겠다.
언제나 벽에 부딪히는 인생. 그래도 살겠다고 맨손으로 그 끝을 파온 탓이다. 29년 동안 그런 짓을 하다 보면 손톱에 때가 끼는 정도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어쩐지 나는 '갱도의 끝에서 광물 등을 캐내는 행위'라는 국어사전의 뜻에서(국어사전 인용도 저작권 법에 걸리는가?) 어떤 도구도 생각할 수 없다. 나에게 그건 언제나 맨손을 뜻한다. 그리하여 '인생막장™'을 공포公布할 때 나는 이런 말을 했던가.
"우리가 혼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파봐야 얼마나 파겠습니까? 그러니 혼자 파지 말고, 같이 팝시다"
그래서 지금도, 이상한 이벤트를 올려 치고 나가려는 타서점 MD들에게 나는 (속으로)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같이 팝시다, 좀. 물론 이때 강세는 '좀'에 있다. (BGM : '좀'비 떼가 나타났네 - 타바코 쥬스)
아… 바로 또 무뎌졌다는 증거를 제출하고 마는 철저한 실증주의라니. (죄송합니다)
네일 아트라도 받은 것처럼 가만히, 손끝을 들여다 보니 어쩐지 지독하게 씁쓸한 기분이 든다. 막장(2번뜻) 끝에 막장(인터넷 용어) 온다고 했던가.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지금껏, 내 마디가 굵은 손으로 파온 게 과연 무엇일까가 문득 궁금해졌다. 성난 얼굴로 돌아보지 말라고 했던가. 하지만 나는 성나지 않았다. 조금 지쳤고, 그래서 그 막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조금 돌아보고 싶을 뿐이다. 내가 파온 것들을. 회한 없이, 다른 무엇도 없이.
물론 그것을 온전히 믿을 필요는 없다. '인생막장™' 1대 학회장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 중의 하나는 스타니슬랍스키 선생의 <배우 수업>이니까.
언젠가의 나는 메쏘드 연기를 하는 연기파 배우를 꿈꿨고, 지금의 나는 메쏘드 연기를 하는 연기파 생활인이 되었다. 모두들 그렇듯이.
*
내 가장 오랜 기억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세 살이나 네 살 무렵의 새벽. 진달래며 개나리가 가득한 배경에 멜빵에 청베레를 쓰고 있는 나와, 꽃들이 점처럼 박혀 있는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곱게 땋은 사촌 누이의 모습(지금은 모 출판사를 다니고 있고, 최근 1년간 살이 좀 쪘다). 군산. 외갓집의 뒷산이다. 사실 뒷산이란 표현이 얼마나 맞는 지는 모르겠다. 피난민인 외조부모가 살던 집은 그 자체가 산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토끼 할아버지, 토끼 할머니라 불렀다.
내 가장 오랜 극장의 추억에도 토끼가 등장한다. <꾸러기 발명왕>의 주인공은 어린 나이임에도 꽤나 영리해서, 비커와 스포이드가 가득한 실험실에서 동물을 커다랗게 만드는 '성장촉진제'를 발명해 낸다. 집채만한 토끼를 타고 즐거워하던 홍만이. 외조부모는 결국 토끼를 잡아 먹었다. 그리고 나는 앙고라 조끼를 선물 받았던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은 영원히 토끼 할아버지, 토끼 할머니로 남았고, 홍만이의 커다란 토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두번째로 오래된 극장의 기억은 그로부터 3년 후, 엄마와 함께 외가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동시상영관에서 케빈 코스트너의 <언터쳐블>과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대니 드비토의 <트윈스>를 보게 된 나는 세상 모든 규제의 무용성을 이미 알았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언터쳐블>은 일곱 살 짜리의 눈에도 단연 최고였으니까.
다시 사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 사진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 하여 내 가장 오랜 기억은 사진의 형태를 한 채로 다시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셈이다. 그것은 이중의 기억이고 엄밀히 말하면 가장 오랜 기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사진을 꺼내 보이며 어른들이 내게 했던 말들, 내가 그 사진을 보며 상상했던 것들, 그리고 다시 그 사진을 꺼내어 보던 때의 심상이 함께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가장 오랜 기억에 대한 추억이라 부른다.
기억은 어떤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추억은 어떤 것을 추억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기억이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잘 말려진 나뭇잎 혹은 곶감처럼, 어떤 기억만이 추억이 될 수 있다. 때론 기억이 아닌 것이 추억되기도 한다. 다른 이의 추억을 빌어 온 경우가 그렇다. 그것을 우리는 욕망이라고 부른다. 욕망은 결국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가장 오랜 기억을 추억하듯,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욕망한다. 그게 어떤 사람인지는 물론 기억나지 않는다.
존 버거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만화가였다. 나는 만화책을 보며 한글을 깼다. 집에는 언제나 어깨동무, 소년중앙, 보물섬, 만화왕국 같은 잡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내 가장 오랜 만화책의 추억에서 하얀 카우보이와 검은 카우보이는 운명적인 대결을 펼친다.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던 검은 카우보이는 마지막 대결에서도 사악한 잔꾀를 굴려, 광활한 서부의 지는 해를 등지고 선다. 타는 듯한 역광에 당황한 하얀 카우보이는, 그럼에도 묵묵히 총을 꺼내 운명에 맞선다.
결국 승리하는 것은 하얀 쪽. 닦고 조이고 기름친 하얀 카우보이의 길고 날렵한 권총에 햇빛이 반사 되며 순간적으로 검은 쪽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전설처럼 구전되어 오늘에 이른다.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셔 노노노노노"라는 검은 카우보이의 마지막 절규가. 시간은 흐르고 관점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실은 하얀 쪽이 악당이었을지도 모른다.
말을 곧잘 하게 된 이후로 마감일이 다가오면 전화통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아버지 안 계시니?"
"아빠 업뗘요"
그 어느 편집자도 내게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낼 수는 없었는데, 실은 바로 옆 방에서 파일롯 잉크에 펜을 담궈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어머니는 그 옆에 앉아 연필로 그려진 밑그림을 잠자리표 지우개로 지우고 계셨지. 패밀리 비즈니스family business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가 그린 만화 중 내가 유일하게 온전히 기억하는 것은 보물섬에 그렸던 "명탐정 셜록 홈즈" 뿐이다. 서핑 중에 찾아 낸 위 그림은 아버지의 것이지만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책일지는 너무 뻔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지만. 위인전. 그때나 지금이나 생활인들은 생활을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하는 법이다.
가끔은 궁금하다. 그에게 생활이 먼저였고 예술이 나중이었는지, 예술이 먼저였고 생활이 나중이었는지가. 생활을 위해 선택한 만화가 어느새 예술로 무섭게 다가온 것인지, 예술로 선택한 만화가 어느새 다가온 생계의 무게에 짓눌렸는지가 몹시도.
이 친구라면 지금 내가 말한 것만 가지고도 자리에 앉아 그럴듯한 추리를 해내지 않을까?
나는 지금 황주리가 그린 김훈의 티셔츠를 입고 있다. 황주리는 김훈을 리본이 달린 검은 중절모에 민소매 남방을 입은 불독으로 그리고 있다. 김훈은 그 밑에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고 썼다.
김훈을 개로 표현한 것이 황주리 씨의 선택인지 김훈의 요청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참 그럴듯 하다. 개는 슬프다. 개는 그 슬픔을 외면할 줄 모른다. 그럼에도 개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슬픔은 슬픔이고 사는 것은 사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늙은 개 같은 김훈 선생은…"
나는 또한 11년 동안 나와 함께 자랐던 개 한 마리를 기억한다. 녀석의 이름은 꾀보였다. 그 이름이 정말로 어울리는 작은 바둑이. 그 이후로도 우리 집에 잠시 머물던 개들의 이름은 대부분 꾀보였다. 어떤 녀석도 1대 만큼 똑똑하지는 않았다. 다시 개가 생긴다면 녀석을 훈이라고 불러 볼 생각이다.
막내 외삼촌은 서점을 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 산골에서 도망치듯 상경한 삼촌은 여러 돈벌이를 전전한 끝에 결국 서점을 차렸다. 30년 전의 일이다. 집과 서점을 왕복하며 나는 자랐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월간지가 저물고 격주간지가 새롭게 부상했다. IQ 점프, 소년 챔프… 하지만 그 잡지들은 우리 집에 배달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챔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신 나는 선데이 서울을 보았다. 일요일은 물론 평일에도. 모리씨의 노랫말처럼. "Everyday is like Sunday!"
신문수, 윤승운, 김수정, 김진 등의 이름이 기억난다. 그렇다고 만화책만 본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창비아동문고.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사자왕 형제의 모험>,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책들을. 권정생 선생의 책은 사실 조금 황당했던 기억이 먼저다. 뭐 이런 이야기가 있나? 싶었으니까.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아버지가 '낭기열라'라는 제목의 만화로 연재하기도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원작보다 못해 실망했다고 밖에…
<즐거운 무민 가족> 시리즈는 정말로 즐거웠다. <꼬마 유령 캐스퍼>는 또 어떻고! 무슨 이유였는지 엄마가 생색내며 사주셨던 옛날 이야기 책들도 있었다. 세 권으로 된 책에서 '꾀보'라는 이름을 수없이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솝우화나 그림동화를 비롯한 세계명작동화는 물론이다. 그림책은 단 한 권도 읽은 기억이 없다.
뭐니뭐니 해도 내가 가장 사랑했던 책은 지경사 어린이 문고로 나왔던 심경석 선생의 책이다. <대머리산>, <학교는 밤마다 이상해>, <배꼽장군> 같은 제목의 책들. 아이들이 나와서 놀고, 모험을 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노는 이야기를 나는 매일 읽었고, 밤이 깊었고, 엄마가 불을 끄면 이불 속에 손전등을 켜고 마저 읽었다. 지금은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불을 켜놓고 자고 있다.
물론 21세기에는 책을 많이 읽은 아이가 똑똑해진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버렸지만, 20세기의 어머니는 '영재' 보다는 '오복'을 더 중시하셨던 것이다. (아... 눈 좋은 건 오복이 아니구나. 하지만 엄마는 이빨도 잘 닦으라고 하셨단 말이다)
어머니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 나는 똑똑했고, 특히 이과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우리집에는 언제나 내 발명에 필요한 재료들이 넘쳐 났는데, 정기적으로 아버지가 전화기를 집어 던져주신 덕이다. 요즘말로 하면 '츤데레'. 과학상자 같은 건 사줄 생각도 안하는 무심한 아버지로 보이지만, 실은 부끄러워 하셨던 것이다. "너, 너, 너 발명하라고 전화기 집어던진 건 아냐!"
내 가장 위대한 발명은 부셔진 전화기의 꼬불꼬불한 선 끝에 끊어진 이어폰의 플러그를 연결했던 일이다. 어머니는 역시 잔소리를 했지만. 아마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본 에디슨 엄마도 속 좀 터졌을 거다.
아무도 없는 오전을 틈타 나는 마침내 완성한 세기의 발명품을 들고 TV 앞에 섰다. 아침마당 같은 프로가 작은 스튜디오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숨을 고르며 떨리는 손을 진정시켜야 했다. 나는 그 발명의 위대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런 생각을 왜 여태까지 아무도 못했을까?" 물론 천재는 흔한 것이 아니다.
한참이나 머뭇거린 나는 드디어 작은 손짓을 했다. 나에게는 작은 손짓일 뿐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손짓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내가 만든 수화기-이어폰을 14인치 금성TV의 단자에 꽂은 것이다. 그것은 이런 논리에 의해 만들어졌다.
1. 수화기를 통해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도,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도 있다.
2. TV의 이어폰 단자에 이어폰을 꽂으면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말을 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3. 만약 말을 할 수 잇는 수화기를 그곳에 꼽으면 전화처럼 그곳에 말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태초에 신의 목소리를 들은 아담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나는 당황할 TV 관계자들에 대한 미안함을 인류에 대한 공헌과 인류애에 대한 믿음으로 억누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는 말했다. "아, 아, 들립니까?"
그로부터 8년 후, 나는 문과에 진학해야만 했다.
실은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이런 이야기였는데. 미안 꾀보.
고학년에 접어 들며 읽는 책들이 조금은 다양해졌다. <논리야 놀자>를 읽으면서는 논리란 것이 정말 시시한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논리란 것이 결국엔 쥐를 구석으로 몰듯 다른 모든 가능성들을 제거한 채 하나의 답으로만 몰아가는 것 아닌가?" 물론 정확히 이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혜>, <빵장수 야곱> 같은 책들은 재미있었다. 아버지가 데려간 극장에서 쥐라기 공원을 보고 놀란 가슴은 소설 <쥐라기 공원>으로 진정할 수 있었다.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디오에서는 으스스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로빈 쿡을 선전했고, 누나들은 <닥터스>를 읽었으며, 아무도 내가 <7막 7장>을 읽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세상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과 <재미있는 수학여행> 시리즈였다. 배꼽이 누워서 감자를 먹을 때 찍어 먹을 소금을 올려 놓기 위한 기관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그 놀람이란…
중학교는 그야말로 질풍노도, 주변인, 제2의 탄생의 시기였다. 나는 그 말들을 1학년 도덕 교과서에서 배웠다. 도덕 교과서는 오히려 순진한 아이들을 주변인의 길로 꼬시고 있었다. 교과서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나는, '야설'과 미야자와 리에의 작품집 <산타페>를 택했다. '천사의 오후 3'니 '동급생'이니 하는 게임들도.
나는 지금 거리를 두고 그 시기를, 5.25인치 디스켓에 담겨 있던 중학교 시절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가장 부끄러운 일은 <7막 7장>을 읽은 일이다.
컴퓨터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는 "헬로 PC"니 "마이컴"이니 하는 잡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돈이 드는 일은 아니었다. 삼촌네 서점에서 집어 오면 되었으니까. 그 일은 내게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사실을. 허리 높이까지 쌓인 잡지들 속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나는, 지금도 쌓이는 신간 사이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도대체, 왜 아무도 진작 내게 이런 말을 안해줬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