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빛이 있으라 하시메 빛이 생기고, 빛과 어둠을 나누메 낮과 밤이 되었다. 비비디바비디부, 라고 덧붙였는지 기록은 말해주지 않는다. ™ 등록이라도 해두시지… 여하간 성경의 '창세'가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TV를 통해 쏜 눈빛 만으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 있는 마당에, 구태여 신이 입을 벌려 창조를 명할 이유가 뭔가? 말의 권능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 역시 말을 한다. 신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특성. 벌이 아무리 화려하고 정교한 춤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돌고래가 초음파로 낄낄 대며 농담을 해도, 그것은 언어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신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라는 노래가사는 심각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 따르면 최초의 말은 "빛이 생겨라!" / "빛이 있으라" / "Let there be light" / "光よ. あれ" 정도 되겠다. 하지만 그것은 신의 말씀. 그렇다면, 처음으로 인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무얼까? 성경에 기록된 아담 최초의 말은 이브를 향해 내뱉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셰익스피어의 조상 답다!)는 말이지만, 이미 아부지 하나님 손을 잡고 날짐승, 들짐승의 이름을 붙여 주었으므로 첫 말은 아니다.

난생 처음 언어를 가진 생명이 탄생했다면, 그가 처음 내뱉은 말이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에게는 옹알이일 뿐이라도, 인류에게는 기나긴 수다 정도는 될 터. 그런 말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어쩌면 성경에 차마 기록할 수 없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방송에서라면 '삑' 처리를 했을, "아놔-" 같은 추임새가 동반되는, 인류가 오늘까지도 매일 빼먹지 않고 하는 그런 말.

코맥 매카시의 <로드>에도 나오지 않던가. 묵시록을 걸어 창세기로 나아가는 부자의 여정에서.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삑삑삑)냈다. (삑삑) 오늘 아침에 (삑삑)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삑삑삑!)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다윈에 따르면 우리의 유전적 형제는 유인원, 보노보나 침팬지인데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 없음에도 인간 자식들만 제 잘났다고 떠들어 대고 있으니 도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진화의 갈림길에서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 유인원 형제들과 인류. 그렇다면 과연 어느 순간에 인간은 인간만의 특성이라고 믿어지는 '언어 능력'을 장착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다시 어떻게 '진화'했을까? 다시 말해, 최초의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언어 없이 생각하지 못한다. 인간의 인식능력과 언어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진화의 어느 과정에서 최초로 언어 능력을 획득한 친구들을. 무수한 이미지의 파편으로 이루어졌었을 그의 사고가, 오늘 우리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을. 그 친구들은 서로 언어로 소통할 수 있었을까? 언어능력이 없는 다른 동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금쯤 무섭고, 어리둥절하고, 의기양양하지만 초라한, 그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생각 되는데.

이것은 분명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오랜 시간동안 언어학계에서 공식적으로 금지 되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인 촘스키 할아버지께서 '보편문법'이라는 한 단어로("언어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며, 그 능력은 보편문법과 함께 인간 유전자에 내장되어 있다") 모든 상황을 일축시켜 버리셨으니, 일종의 불문율이 될 수밖에. 말의 권능이란 때론 얼마나 강력한지!

하지만 인지과학자, 생물학자, 유전학자,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힘입어, 이제 언어의 진화는 탐구 가능한 학문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매력적인 연구 분야로 떠올랐고 한다. <언어의 진화>는 바로 그런 역사를, 그 과정 속에서 서로 대립해 온 여러 주장을, 그리고 그것들이 각각 모이고 다시 나뉘며 지금까지 쌓아온 연구의 지평을 보여준다. 아주 쉽고, 흥미롭게.

직접 요리한 음식이 맛이 없듯, 내가 쓴 '책소개'는 언제나 재미 없지만, 이 글만 보고 <언어의 진화>를 포기하면 속상하다. 무척, 재미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언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에 다름 아니고,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저 유명한 명제처럼, 인간과 함께 언어 역시 진화해 왔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서사적 구조들은 '언어의 진화'를 반복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이란 말입니다. 책장을 넘기는 손을 절로 떨리게 만드는.

혹시라도 '인간과 언어의 제문제'에 관심있는 당신을 위해 <언어의 진화>와 더불어 함께 바벨탑을 쌓을 몇 권의 책을 추천하자면
















* 바벨탑에 깔려 분열증세를 보인다 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만, 모쪼록 독서의 계절이니까요.



맨날 듣는 소리가 페이퍼 길게 쓰지 말라는 말이지만, 그래도 지젝 책은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다. 실은, 할 말이 별로 많진 않다. 군침은 돌지만 손도 못대고 입맛만 다시는 참이기 때문인데, 첫머리에 써있는 지젝의 말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언젠가 내가 신나게 떠들고 있던 방 안에서 바디우의
(설상가상, 내가 빌려 준) 핸드폰 벨이 울린 적이 있었다.
그는 핸드폰을 끄는 대신 공손하게 내 이야기를 끊고는
통화음이 잘 안 들린다며 좀 조용히 이야기해 줄 수 없냐고 했다.
이것이 진실한 우정의 행위가 아니라면 나는 뭐가 우정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바디우에게 헌사한다.

* 오른쪽에 있는 작은 표지는 최근에 출간된 바디우 입문서. (바디우 자신이 공인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함께 읽으면 더욱 좋아요♥


* 어느덧 가을, 어떤 책들 읽으시나요?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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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라의 생각
    from tzara's me2DAY 2009-09-09 18:35 
    '가을, 당신이 읽어야 할 최고의 인문교양서 <언어의 진화>' http://ow.ly/oBYl
 
 
2009-09-10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5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1 2009-09-1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문MD님의 길게 쓴 페이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지시가 있다는게 안타깝군요. 말씀하신 것 처럼 독서의 계절입니다. 눈 앞에 수 많은 책을 쌓아두고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은 또한 가을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람이 너무 좋아져서요.
추천해 주신 책은 가을이 가기 전에 꼭 읽어 보겠습니다. 그럼 모쪼록 좋은 하루 되세요.

활자유랑자 2009-09-15 15:43   좋아요 0 | URL
하핫. 그런 '지시'가 있었던 것까지는 아니에요. :)
저도 요즘 정말 하루종일 책만 읽고 싶어서 죽겠어요 ㅜㅜ

뒷북소녀 2009-09-16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짧아지는 인문MD의 페이퍼가 아쉬운걸요!^^
문학MD가 가을 타는 사람에게 추천한 책과 함께 꼭 읽어볼게요. :)

활자유랑자 2009-09-18 00:57   좋아요 0 | URL
언젠가 꼭 스크롤바가 깨알 같아질 장문의 대하 페이퍼를...
가을 타는 사람이 직접 추천한 책이니까 틀림 없겠죠. :)

황주희 2009-09-1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페이퍼를 보면 그 사람의 70%는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지요.
긴 페이퍼이지만 재미있으므로 지지하지요.
장장익선(長長益善) 흐흐

활자유랑자 2009-09-18 00:59   좋아요 0 | URL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에 따르면 100% 라던데...
아무래도 장황한 성격이라 장황하게 밖에는 설명이 안되나봐요. T.T

홍대 ㄱㄱ? 2009-09-1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진이 아주 귀엽네요.
홍대 ㄱㄱ?

활자유랑자 2009-09-28 16:56   좋아요 0 | URL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