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영국의 가수, 모리씨의 얘기다. "젠장할 일요일, 나는 공동묘지 입구에서 너를 만났지. 키츠와 예이츠가 네 옆에 서 있었어. 하지만 너는 이길 수 없을 걸. 내 옆에는 오스카 와일드가 있으니까" 이런 환장할 가사로 80년대, '옆구리에 가시가 박힌' 소년소녀들을 울렸던 스미스의 보컬리스트이자 작사가.
모리씨의 거대한 에고 덕에 위태롭게 굴러가던 밴드가 예정된 파국을 맞은 후,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한 기자가 물었다. "스미스의 재결성 소식은 없나요?" 모리씨는 되물었다. "스미스라고? 지금 내게 스미스란 말라버린 강바닥의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떠올리게 할 뿐인데?"
나는 이렇게 묻는다. "하루키라고?"
…
그렇게 됐다.
"은유라든가, 인용이라든가, 탈구축(脫構築)이나 표본조사 따위"가 아닌, 그냥, 하루키. 村上春樹라고 쓰고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읽는 심플한 하루키. 누구나 어느 순간 하루키를 읽고 또 다른 순간 하루키를 내려 놓는다. 그 뿐이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겐 각각의 '무라카미'와 각각의 '하루키'가 존재하고, 또 다시 그 각각의 조합이 무한대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군가는 다시 하루키를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 경우라면 나는 '208번'째와 '209번'째의 하루키에 대해 말해야겠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하루키인 것이다.
***
어느 남성지의 편집장은 이런 제목의 글을 썼다. <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꽤나 생색이라도 낸다는 듯이. 나는 그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의 마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건 사랑하지만 좋아하진 않는 대상에 대해 말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말하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 좋아하지는 않는 사랑이라면 더더욱. 좋아한다는 것은 순수한 즐거움이지만 사랑은 즐거움만은 아니고, 때론 즐거움이 없는 사랑도 존재하는 것이다. 명태와 동태와 황태가 다르듯. 물론 일반론이다.
하루키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혹은 3학년의 일이다. 나는 슬펐고, 궁금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무엇을 잃어버린 건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를 읽었고, 라디오헤드의 '크립'을 들었다. 혹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상실의 시대>를 읽었고, 라디오헤드의 '크립'을 들었는지 모른다. 그러자 슬프고, 궁금해졌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하고. 무엇이 먼저였을까? 물론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 되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그런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양을 둘러싼 모험>, <댄스 댄스 댄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태엽갑는 새>, <렉싱턴의 유령>, <스푸트니크의 연인>, <화요일의 여자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세라복을 입은 연필>, <랑겔한스섬의 오후>, <꿈에서 만나요>, <슬픈 외국어>, <밤의 원숭이>, <먼 북소리>,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 <중국행 슬로보트>, <빵가게 습격>, <TV 피플> 같은 것을 읽고
라디오헤드의 '마이 아이언 렁', '더 트릭스터', '펀치드렁크 러브식 싱얼롱', '하이 앤 드라이', '페이크 플라스틱 트리', '나이스 드림', '저스트', '불렛 프루프..아 위시 아 워즈', '블랙 스타', '스트릿 스피릿', '파라노이드 안드로이드', '엑시트 뮤직(포 어 필름), '카르마 폴리스', '노 서프라이지즈', '하우 캔 유 비 슈어?' 같은 것을 들으며 10대를 보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학교생활은 지루했고 음악은 끝내줬으며, 책은 거의 경이롭기까지 했다. 시간은 참 더디게 흘렀다.
몇 명의 여자애를 좋아했고, 몇 명의 여자애를 만났다. 그 아이들이 꼭 겹치지는 않았다. 한 여자는 나를 만나던 도중 당시 나의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를 만나던 도중 다시 지금 나의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마치 솜씨좋은 DJ가 교묘히 레코드판을 갈듯. 언젠가 나는, 지금 나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무슨 생각으로 그 애를 만났던 거냐고 물었다. 친구는 대답했다.
"그런 거지. 나도 한 번 여자를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근사한 대답이다. 좋은 이유는 아니지만 좋은 대답. 세상엔 그런 것이 존재한다.
그런 시절이었다. '섹스가 산불처럼 공짜'였던 시절, 이라고 하면 물론 거짓말이고. 아직 겪어 보지 못한 일들이 산 속의 이름 모를 나무들처럼 늘어서 있던 시절. 우리들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으면서 무언가 잃고 있지 않을까 끊임 없이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십오 년에 걸쳐서 정말로 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버려 왔다. 엔진이 고장난 비행기가 중량을 줄이기 위해서 화물을 내던지고, 좌석을 내던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엾은 스튜어드를 내던지듯이, 십오 년간 나는 모든 것을 내던져 왔고, 그 대신에 거의 아무것도 몸에 붙이지 않았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그러니까 우리는, 엔진이 고장난 비행기도 아닌 주제에 무엇인가를 버리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했다면 그것은 곧 다시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하루키의 친척쯤으로 여겨졌던 무라카미 류도 말하지 않았던가. "무언가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무언가를 잃음으로써 사라진다" 그런 식으로.
물론 그때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가 <상실의 시대>를 살았다면, 그것은 '상실에의 예감으로 가득찬' 혹은 '상실에의 열망으로 가득찬'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계시록'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했을 뿐이다. 새파란 어린아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버렸다. 껍질을 깨고 나온 애벌레가 껍질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듯. 그리고 다시는 껍질을 생각하지 않듯. 그래서 나는, 엄마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 하루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렵다, 고. 지금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
작고 멋진데다 조용한 카페에 어느 날부터 사람이 북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 참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하루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개나 소나. 애시당초 나에겐 카뮈가 그르니에의 책에 붙였던 그 유명한 서문처럼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할 수 있는 아량 따윈 없는 것이다. 정어리는 정어리고, 카뮈는 카뮈다.
언젠가부터 나는 하루키를 광산에 비유하며 그런 스노브를 정당화했다. 어떤 광산이 있다. 광물들이 무진장 많은 것만 같던.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러쉬'해오고 이내 광산은 바닥을 보였다. 더이상 내줄 것이 없어졌단 말. 물론 그 말은 틀렸다. 적어도, 그 광산에서 직접 캐낸 광물로 만든 무언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면, 그렇게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나는 그것을 김연수 작가에게 배웠다. 물론 김연수를 읽은 게 하루키 때문은 아니었지만…
대신 레이먼드 카버, 스콧 피츠제럴드, 커트 보네거트, 레이먼드 챈들러, 무라카미 류(이름 때문에)를 읽지 않았던가.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하루키가 아니었다면, 갯츠비는 그저 기무타쿠가 선전하는 왁스로만 알았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세상은 훨씬 단순하고 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하루키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아직 내가 버리지 못한 하루키는 이런 모양이다.
각각의 책에 대해서라면 하고 싶은 말이 꽤나 많다. 밤을 샐 수도 있다. 뭐, 딱히 으시대는 건 아니지만…
대신 지금은 없는 책을 말해야겠다. 내가 알고 있는 하루키를 말하는 데에는 그걸로 충분하다. 기준은 두 가지다. 1) 지금 내게는 있지만 알라딘(을 비롯한 서점)에는 없는 책. 2) 한 때 내게 있었으나, 이 자리에 없는 책.
먼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김춘미 역, 한양출판사 : 참 멋대가리 없는 표지이지만, 처음 읽었던 하루키 책이고 가장 많이 읽은 책이기도 하다. 사실 내게 저 책은 세번째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다. 처음 산 한양출판본은 친구에게 빌려주었다 돌려받지 못했고, 두번째 문학사상사본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것 참.
<화요일의 여자들> : 이 빨갛고 두꺼운 책의 가격은 고작 6,000원! 나는 돈 없는 중학생이었고, 경제발전과 함께 이 책 역시 사라져버렸다. 시간은 흐르고 책값은 오른다. 어쩌면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의 유일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김난주 역, 열림원 :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 책 중의 하나다. 아무래도 나는 '문학성'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책 역시 한 때 내게 있었으나 사라졌고, 얼마 전 알라딘 중고샵을 통해 다시 구입했더니 도서관 딱지를 달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다. 나는 책의 상태나 밑줄 같은 것에는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하다. (중앙M&B판의 <먼북소리> 역시 김난주 번역이다. <국경>과 <먼북> 모두 현재 팔리는 문학사상사판은 역자가 다르다)
이 자리에 없는 책들 중 첫째로 꼽고 싶은 건 한양출판의 <양을 둘러싼 모험>이다. 현재 팔리고 있는 문학사상사판의 제목은 <양을 쫓는 모험>이고, 나는 과거의 제목이 더 좋다. 딱히 감상적인 이유는 아니다. 그저 '둘러싼'이란 부분이 말할 수 없이 근사한 것이다.
실은 얼마 전, 고등학교 때 <양을 '둘러싼' 모험>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친구의 신혼집에 들른 일이 있다. 그 집의 화장실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우습게도 <양을 '쫓는' 모험>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떤 것은 변한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것이다. 변한 것이 슬픈 것인지, 변하지 않은 것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몇몇 부분은 여전히 근사했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
조금 있다가 머리맡의 전화가 울렸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내 가슴 위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전화 벨이 네 번 울리고 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 당장 이리로 와주지 않겠어"라고 상대방이 말했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어느 정도로 중요한데?"
"와보면 알아"라고 그는 말했다.
"어차피 양에 대한 이야기겠지"라고 나는 시험삼아 말해 보았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수화기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어떻게 알고 있지?"라고 그가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양을 쫓는 모험이 시작되었다.
- <양을 쫓는 모험> 중에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것이 있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와 <하루키 소설 속에 흐르는 음악> 그리고 <승리보다 소중한 것>에 대한 이야기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다시 읽은 건 충주경찰학교에서였다. 나는 전경이었고, 육군훈련소에서 이송되어 받은 2주간의 보충교육 중 하루는 가족과의 면회에 배정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필요한 것이 없냐는 엄마의 말에 "서점에서, 하루키 책, 무! 라! 카! 미! 하! 루! 키! 그래, 하루키. 아무 거나 그 사람 책. 몇 권이든 꼭!"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1분이 1년 같았던 시간이 지나고(평균적으론 1분이 2시간 같았던 훈련소 생활이었다) 마침내 나타난 엄마의 손에 들려있던 것이 바로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와 <하루키 소설 속에 흐르는 음악>이었다. 나는 적이 실망했다. 하필이면, '달라진 하루키'의 단편집과 소설도, 하루키가 쓴 책도 아닌 어정쩡한 책이라니! 마지막 '벌꿀파이'에서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실은 얼마전에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다시 읽었다. 김연수 때문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하라는 말에 스페인 여행 길에 들고 왔다며 당당하게 추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이런 글을 쓰게 된 건, 김연수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내 문장이 김연수 탓은 아니다…
오랜 만에 읽는 하루키는, '달라진 하루키'는, 어쨌든 하루키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이제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든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작품들을 어떻게 돌아 보고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또 찾으려 했는지도.
'벌꿀파이'만 해도 그렇다. 언제나 나는 그것을 주인공이 회상하는 '20대 초반' 부분에 집중해서 읽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30대 중반'인 현재 시점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나는 30대 중반이 전혀 아니다.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 오른쪽 발에서 왼쪽 발로 무게를 이동하듯, 아주 자연스럽게. 그 경험이 하루키의 몇몇 책을 내게 다시 읽게 했고,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껏 의식도 하지 못한채 얼마나 하루키의 주인공처럼 살려고 했던가, 하는 갑작스러운 깨달음.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말해야겠다. "29년이나 인생을 살아오며 나는 무엇하나 몸에 지니지 못했지만 그래도 교훈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살 수는 있어도(번개를 일곱 번 맞을 확률이라 하더라도),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 수는 없다. 전혀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갑자기 나이를 훨씬 더 먹은 기분이 든다.
"어때, 멀리까지 왔다는 게 조금 실감이 나?"
"아주 먼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야" 하고 고무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시마오 양은 고무라의 가슴 위에다 손가락 끝으로 무슨 주문처럼 복잡한 무늬를 그렸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야" 하고 그녀는 말했다.
-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중에서
***
이 두서 없고 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까.
<해변의 카프카>는 재미 없고 <어둠의 저편>은 수준이하라고, <도쿄 기담집>은 아직 읽지 않았고 당분간 읽을 생각도 없다, 라고…? 아, 가혹하다. 그건 너무나도 가혹하다…
대신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직 끊이지 않은 '하루키의 유산'('위대한 유산'이라고는 아직 하지 않기로 한다)에 대한 것.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지난해 여기저기서 들리던 샤이니의 노래. "누난 너무 예뻐"서 "하지만 이제 지쳐" 가는 샤이니 친구들은 난데없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라고 노래했는데, 놀랍게도, 그 출처는 바로 하루키였다!
사실 내가 눈이 가는 것 그 윗 문장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가 되기도 하고 혹은 행복한 부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부분. 그러니까 나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인생에 대한 부분. 뭐, 가끔은 그런 생각도 나쁘지 않다. 너무 과하지만 않다면…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딸깍!
OFF.
잠깐만, 잠깐만. 뭔가를 빼먹은 것 같은데?
아! <승리보다 소중한 것>에 대한 얘기. 작년 여름, 문학MD님께 선물 받은 책이다. 저 책이 출간 되었을 때 우리는 마라톤을 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고, 실제로 10km를 뛰기도 했다. 단 한 번이지만… 우리는 10만원 내기를 했고, 내가 졌다. 그러니까 저 책은 10만원인 셈이다. 아직 읽지는 않았다. 10만원 짜리 책을 쉽게 읽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혹시 누가 반값(5만원)에라도 산다면 조금 생각해볼 의향은 있다. 되도록이면 파는 쪽으로…
***
정말 마지막으로, 하루키와 같이 있는 친구들을 소개하겠다. 간단히 말해 '일본소설' 분류.
무라카미 류와 하루키, 다자이 오사무와 나쓰메 소세끼, 다카하시 겐이치로와 미야자와 겐지, 미루야마 겐지가 있다. 고려원에서 나온 <일본대표단편선 1, 2, 3>은 3권 해서 헌 책을 3만원 가까이 주고 구입했던 것 같다… 뭐, 한 권에 10만원 짜리 책도 있는데.
저 자리에 있었던 책들을 떠올리는 일은 물론 가능하다. 온다 리쿠,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 미시마 유키오, 유미리 등등. 사실 일본 소설 칸이 두 칸이나 되는 건 비율상 맞지 않다. 그래서 온다 리쿠가 버려진 것인데, 결국 한 칸으로 줄이지는 못했다. 이런 경우에는 역시 책을 늘려서 두 칸을 이중으로 꽉꽉 채우는 게 가장 간편하다… 어처구니 없지만 낭비되지 않고 있다, 라는 느낌이 필요한 것이다. 직장생활이랑 비슷하다… (그래서 오늘도 보관함은 미어터지고)
<라스 만차스 통신>은 끌리는 제목이라 중고샵에서 구입하고 아직 읽진 못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참 오랜만에 읽은 재능있는 일본 신인 작가의 소설. 가장 최근에 합류한 책은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으로, 처음에는 <마츠모토 세이초 초걸작 단편 컬렉션>으로 읽었다. (얼마나 걸작이길래…?) 이런! 이야기가 또 길어지려고 하고 있잖아!
어쩌면 나는 이 글에서 왕가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지 모른다. <중경삼림>이나 <아비정전>, <타락천사> 같은 영화들에 대해서. 하지만 나는 도서MD일 뿐이다.
대신 이런 문장으로 끝내야겠다.
MD로서, 진심을 담아.
와타야 리사, 꼭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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