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책을 쌓는 계절이다. 땔나무를 쌓아두던 옛 사람들처럼, 추위를 견디기 위해. 롤랜드 에머리히의 <투마로우>에도 나오지 않던가. 빙하기를 보내기 가장 좋은 장소는 도서관이다(그러니 책이 나무를 베어 환경을 파괴한다는 주장은 사태의 한 측면만 보는 것이다. 정말 빙하기가 닥친다면 인간이 태울 것은 책밖에 없다!). 설령 난방비 대란이, 빙하기가 오지 않아도 좋다. 쌓아올려진 책은 그 자체로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니. 쌓여진 책 사이에선 웃풍도 견딜만 하다.
당신이 종이책 아닌 '이북' 매니아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이북 단말기에 발열기능이 없다고 해도(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울에 책을 쌓는 가장 큰 이유는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 때문이니까. 일 없는 겨울이면 모닥불에 둘러앉아 우습고 슬프고 놀라운 이야기로 추위와 밤을 이겨내던 선인들의 기억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자고로 겨울은 일을 하지 않는 계절이고, 그 시간들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또 퍼졌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다고 하니,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은 겨울인 셈이다. 일하는 시간이 아닌 일하지 않는 시간.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따뜻한 이불을 나와, 쌓인 책을 뒤로하고 일터를 찾는다. 뭐, 어쨌거나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책소개가 시작됩니다. 자신의 책은 그저 뒤에 쌓아둔 채, 존경해 마지않는 독자제위 여러분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전하려 40km 를 뛰어간 페이디피데스도 아니면서 이렇게. 아직 이 세상은 따뜻한 모양?
* 집나간 개념, 확실하게 찾아 드립니다! <개념어총서 WHAT!>
실용 최우선의 시대(가만보자... 올해가 '실용 2년'이던가?)를 살아가는 요즘. 인문MD로 산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알라딘이야 인문 독자 분들이 계셔주는 까닭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언젠가 윤상이 왜 미국에 계속 안계시고 오셨냐, 라는 질문에 "제가 여기서나 윤상이죠…"라고 대답했듯, 요즘 세상에 인문은 알라딘에서나 인문인 것이다. 말하자면.
문과대를 나온 탓에 주변을 둘러 봐도 별 기술 없는 직장인이 대부분이지만 "요즘 뭐 재밌는 책 없수?"라고 물어 오는 건 대학원 공부하는 후배 뿐이다. 슬픈 일이다. '개발자' 혹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친구들만이 간간히 일 배우는 데 필요한 책들을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어올 뿐…
가끔 매맞을 각오를 하고 '인문학을 읽어라', '인문학이 블루오션이다'(?), '인문학을 읽어봐 넌 키가 커지고…'(??) 같은 말들을 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냉소. 루저남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물론 종종 구원의 눈길도 존재한다. 장화신은 고양이 같은 촉촉한 눈들은 대개 이렇게 되묻곤 한다.
"그래… 나도 읽고 싶어. 근데 뭐부터?"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 가만히 그 사람의 성향, 취향 등을 곰곰 따져보고 있자면 그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지금이라면 대답할 수 있다. 조금 늦었지만 이렇게.
"네네, '개념어 총서'를 읽으시면 됩니다. 개념이 군대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거든요.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심지어 인문학/철학에서도 필수랍니다. 아, 물론 저도 읽어야겠지요. 인문학/철학은 몰라도 일단 회사생활을 하고 있으니… 저는 몰랐는데 윗분들이 싫어하시네요(해맑은 웃음). 혹시 동생이나 후배가 군대 가면 미리 좀 사주세요. PX에는 아직 안파는 모양이더라고요."
이미 '리라이팅', '달인' 등의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책들을 선보여왔던 출판사의 책답게 작지만 충실하다. 가격도 6900원 ~ 7900원으로 착하기 그지 없고, 이건 비밀인데, 정가 35,500원이 30,000원으로 출간 된 특가 박스세트는 한정판으로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에이, 그럼 낱권으로 구입하면 되지요. 책이 중요하지 가격이 중요하겠어요?
1차로 출간된 다섯 권이 다루고 있는 '개념어'는 각각 재현, 권력, 공, 내재성, 주체다. "아니, 쉬운 책처럼 이야기하더니 무슨 이렇게 어려운 단어들로 책을 만들었어?"라고 혹시나 물을지 모르겠다. 그건 전반적인 학술용어의 번역 문제에 해당하므로 여기서 답할 성질은 아닌 것 같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읽고 나면 '재현'이란 개념어가 옆집에 살던 재현이 보다 친근하게 느껴질 거라는 것. 차근차근 개념어를 정복해가다 보면, 어렵게만 보였던 인문학 책들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진짜에요.
<재현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채운 님의 동영상 인터뷰를 보시려면 '여기'를 눌러주세요.
* 책장에 꽂지 않곤 도무지 견딜 수 없어!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콜렉션 세트>
총 제작기간 5년, 제작비 4억에 원고지 3만 6천여매의 명실상부한 '인문학의 블록버스터' 기획을 보며 드는 생각은 크게 두 가지다. "헉, 갖, 갖고 싶다"와 "근데 다 읽을 수 있을까?"가 그것.
기존의 <프로이트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카잔차키스 전집>에서 좀 더 진일보한 디자인이 갖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고지 3만 6천여매 = 책으로 9,300여 페이지 = 25권'을 앞에 두고 두려움이 드는 것 또한 당연지사. (더군다나 소설은 한 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난방비에 겨울옷 장만에 각종 연말 술자리 및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에 얇아진 지갑을 둘고 울상짓는 당신. 우리 모두는 겨울에도 도리 없이 먹이를 구하러 일터를 어슬렁거리는 직장인일 뿐 아니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에코와 함께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렇게 멋진 책을 어찌 곁에 두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에코와 함께라면 난방비 걱정도(책이 많은 곳에 있으면 빙하기가 와도 끄떡 없다는 얘기를 위에서 했던가?), 겨울옷 걱정도 뚝인 것이다! (외출을 자제하고 이불 속에 누워 한 권, 한 권 에코를 읽는 기쁨이란…)
물론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가슴엔 삼천원쯤, 호주머니 속엔 자신만의 도덕률쯤 갖고 있게 마련. 그 중에는 분명 '읽지 않은 책이 이렇게 넘치는 상황에서 더 사들이는 것은 죄악이다!'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도덕률은 아주 꼬깃꼬깃하게 이미 구겨져 있어 세심하게 펴야만 하겠지만… 그럼에도 읽지 않은 책을 쌓아두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여전히 존재하는 당신을 위한 에코 박사님의 일화.
수많은 장서로 가득 찬 유명한 '에코의 서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개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그 질문은 물론 순수한 경탄이 아닌, 압도적으로 보이는 책에, 지식에 대한 두려움이다. 에코 박사는 단지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우리가 이미 읽은 책으로 가득한 서재는 '나 이 정도 읽었네'의 과시일 뿐이다. 당신이 그것을 건성건성 읽었는지, 훌훌 읽었는지, 전혀 다르게 읽었는지,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그렇기에 당신 자신을 가장 잘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아직 읽지 않은 책, 그러나 읽으려는 책이다. 물론 움베르토 에코를 읽으려하는 당신은, 나쁜 사람일리 없는 것이다.
*
에코 박사님이 보고 계셔 (부담 갖진 마세요…)
* 시리즈만 책이냐! 잘 빠진 단행본 한 권, 백 시리즈 안부럽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조금 미안한, 한 권 한 권 마다 하고 싶은/해야 할 이야기가 넘치는 책들. 하지만 어쩌겠어요. 시간은 짧고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 걸. 사람의 목숨은 물론 소중하지만, 타이타닉 호가 침몰 할 때에도 구명선에 모두 다 태울 수는 없었잖아요? 안타까운 마음 금할길이 없지만, 품위 있는 인문MD라면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해야겠다.
"여러분, 여러분을 '책탑' 꼭대기에 쌓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라고 따뜻한 방구들에 누워 커피나 홀짝이면서 당장 읽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다만 눈밝은 독자들이 알아봐 주시길.
오늘은 여기까지.
* 고맙습니다. 이번 주는 만만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