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이 돌아왔다. 이미 인터뷰까지 진행한 마당에 (인터뷰 보러가기) 이렇게 서두를 떼는 일이 좀 겸연쩍긴 하지만. 허나 지난 인터뷰엔 '생태 경제학 시리즈'를 받아보지 못했던 탓에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이야기만 가득하니, 좀 쑥스러워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우석훈이 돌아왔다, 고.
<생태요괴전>과 <생태페다고지>의 '생태경제학 시리즈'는 말하자면 우석훈의 '전공 과목'이다. 실제 파리 유학시절 전공했던 분야인 동시에,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담긴 시리즈란 말. 야심차게 동시출간한 것으로 모자라 한 권은 청소년용, 한 권은 성인용(?)으로 나누어 낸 것만 봐도 파이팅을 엿볼 수 있지 않나. 원래 계획은 4권 동시출간에 박스세트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뒷 이야기는 더더욱…
드라큘라전, 좀비전, 프랑켄슈타인전, 생태요괴전, 동방불패전, 마시멜로전, 여고괴담전, 개발요괴전 등으로 나누어진 각 장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주는 <생태요괴전>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그만의 개념화와 스토리텔링. 논란 혹은 호불호는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 우석훈은 단연 발군이다. ('요괴전'이라는 말이 들어간 사회과학 서적을 내 MD 경력에서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싶다)
<생태페다고지>는 제목 그대로 '생태교육학'이다. 꼭 선생님이 아니어도 좋다. 부모 혹은 언젠가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선남선녀(?) 하다못해 교회 중등부 선생님이라도. 이 사회의 교육이, 그리하여 미래가 걱정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장 흐뭇한 장면은 지금 당장 이 책을 구입해 모두 읽고, 한 권은 아이에게/제자에게/후배에게/동생에게 건네주는 모습이겠지만… (땡스투는 필수…)
반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한 마디로 <88만원 세대 : 실천편>이라 할 수 있겠다. 잔뜩 쫄아있는 우리 20대들에게 다시 한 번 말을 거는 우석훈의 메시지는 사실 단순하다. 괜찮다고, 너희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쫄지 말라고, 죽지 않는다고.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너희들이 일단 모여서 무엇이든 함께 한다면, 새로운 상상력들이 터져 나올 거라고. 그때 이미 변화는 시작된 거라고.
이거 뭐, 다같이 책상 위로 올라가서 "오, 선장님-" 이라도 외쳐야 하는 걸까?
물론 그렇게 냉소적일 필요는 없겠다. 가뜩이나 쌀쌀한 가을인데. 지난 인터뷰에서 '악마의 변호사' 역할을 맡은 인터뷰어는,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아무런 생산수단도 갖지 못한 20대들이 단순히 함께 모인다 해도, 결국 '게토'랑 뭐가 다른가요?" 그는 대답한다. "그것이 게토라도, 20대들만의 게토를 만들면, 그곳에서는 분명히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그리하여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간혹 이렇게 되묻는 이들이 있다. "무슨 말 하는진 알겠다. 다 좋은 말이다. 그래서 당신의 대안은?" 그건 참 한심한 일인데, '기계장치의 신'이 대안을 주던 시기는 이미 그리스 시대에 끝나지 않았던가? ('유행하던 시기'라고 정정해야겠다) 대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 적어도 이들은 책을 통해 새로운 목소리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시크한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다. 아무리 댄디하게 차려입고 버스를 타도 요금은 내야하는 것처럼.
그래도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의 실천방안을 하나 소개하자면 그것은 바로 '진'이다. 다른 말로는'마을'. 진짜로 시골에 삼삼오오 모여 농사나 지으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공동체 의식, 그러니까 '연대'다. 아…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
그렇다. 그것은 케케묵은 이야기가 맞다. 잘개 쪼개진 욕망의 조각들에 휘감겨 살아가는 20대들은 이기적이고, 이 사회의 문화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지 모른다. 결국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해야하는 것이다. 경제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므로. 네 친구도 먼 미래의 적일 뿐야, 라고 언젠가 김종서는 노래했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찍이 홉스는 자연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이 부분은 분명 흥미로운데, 홉스의 주장은 그것의 타계를 위한 국가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21세기, 우리에겐 분명히 국가라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물론이고, 자연 상태에도 협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온통 이기적인 생물들로 가득해보이는(뜨끔!) 지구상에서,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해답은 로버트 액설로드의 고전 <협력의 진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내에 뒤늦게 번역 된 <협력의 진화>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제목 그대로, 자연 상태에서의 협력의 진화이다. 어떻게? 게임이론을 통해. 그렇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게임이론이다. 게임이론의 목표 또한 대립과 경쟁 상황에서의 필승전략 수립만은 아닌 것.
상황은 간단하다. 흔히 알고 있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 두 명의 죄수 A, B가 잡혀 각각 따로따로 심문을 받는 상황이다. A와 B 모두 협력해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둘은 경범죄로 1년 미만의 형을 살고, A와 B가 각각 상대방을 배신하면 둘 다 3년의 형을 산다. 하지만 A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동안에 B가 배신하고 A의 죄를 이야기하면, A 혼자 죄를 뒤집어 써 5년 형을 살고 B는 석방된다.
이것이 딜레마인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은 상대가 죄를 뒤집어 쓰고 나는 석방되는 것. 그렇다면 나는 배신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상대방도 배신을 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그렇다면 3년을 살게 되고, 3년 보다는 협력해서 둘 다 1년 형을 받는 것이 낫다. 하지만 이 때 상대방이 배신한다면 나만 5년 형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배반.
협력의 경우 1년을 살거나(상대도 협력), 5년을 살아야 하지만(상대가 배반) 배반의 경우 0년을 살거나(상대는 협력), 3년을 살면(상대도 배반)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이론이란 결국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것 아닌가? 요즘들어 우리사회에 게임이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이런 심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로버트 액슬로드는 프레임을 바꾼다. 단발로 그치는 죄수의 딜레마가 아닌,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나를 배신/협력했던 저 친구와 다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반복해서. 직장동료와 애인과 거래처와 동네사람들과 만나듯이, 그렇게.
그리하여 그는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를 바탕으로 한 대회를 열고, 세계 각국의 게임이론 전문가들을 초대한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게임이론 전문가들은 나름의 전략/규칙을 갖고 있는 프로그램을 출품하고, 프로그램들은 돌아가며 각각 1:1 로 일정한 수의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한다. A와 B가 100게임, C와 D가 100게임, 다시 A와 C가 100게임, B와 D가 100게임 이렇게 A, B, C, D, E… 이때 A와 B가 협력하면 3점, A와 B가 서로 배반하면 1점, A가 협력하고 B가 배반하면 각각 0점과 5점을 주는 것이다.
다양한 전략들이 출품 되었다. 무조건 협력만 하기도 하고 무조건 배반만 하기도 하고, 협력하는 척 하다가 가끔씩 배반을 하기도 하며 배반으로 상대를 떠본 후 상대의 반응에 따라 대응하기도 하고, 일단 협력으로 시작하지만 상대가 배반하면 끝까지 배반으로 보복하기도 하는 각양각색의 프로그램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전략이 우승을 차지했을까? 영리하게 상대의 등을 쳐먹는 전략이 아무래도 우승을 차지했을 것 같다. 왜, 주변에도 그런 사람 있잖는가. 친한척 하며 쏙쏙 빼먹고 정작 필요할 때는 입을 닦아 버리는 사람. 어른들 말로도 그런 놈들이 잘먹고 잘산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놀랍게도
우승을 차지한 것은 '팃포탯'이라는 전략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Tit for Tat. 즉 팃에는 탯, 탯에는 팃.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후손인 셈이다. 일단 협력으로 시작한 팃포탯은, 상대가 협력하는 한 계속해서 협력한다. 하지만 상대가 배반하면, 그 즉시 다음 게임에서 배반하여 복수한 뒤, 일단 복수를 했으니 다시 협력한다. 상대가 계속해서 협력한다면 팃포탯도 지속적인 협력을, 계속해서 배반한다면 끝없는 배반의 메아리가 울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 단발적 죄수의 딜레마 상황과 다른 것은 협력의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는 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협력은 3점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협력할 때 배신하면 5점이지만,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무조건 협력만 하는 바보는 아니었고, 따라서 적절히 협력할 줄 모르는 프로그램이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점수는 상호배반인 1점이다. 그래서 그들이 가끔 봉을 만나(?) 5점의 점수를 적립해 놓아도, 그 외에는 줄곧 1점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많은 협력을 통해 3점을 쌓아놓은 신사적인 프로그램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협력의 중요성을 일단 체크~
(여기에 진화의 개념이 들어가면, 결국 팃포탯의 성공적인 생존전략이 자연선택을 통해 확산되고 배반적인 규칙들은 떨어지게 된다. 실은 생태학적/생물학적 모델을 사용해 이것을 설명하는 부분이 책의 백미다. 물론 백미를 여기에 옮길 순 없다. 저도 땅파서 책 파는 건 아니니까요… 쿨럭)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 중 하나는 '안정성'이다. 안정성이란, 어떤 한 '사회'가 한 전략을 구사하는 개체들로 가득차 있는 상황에서, 다른 전략을 가진 개체가 그 사회를 침투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근데 나는 지금 책을 전부 요약하고 있는 것인가?) 결론을 말하자면 여러 전략 중 총체적 안정성을 지닌 전략은 두 개 뿐이다. 바로 팃포탯과 언제나 배반을 선택하는 '올디'.
팃포탯이 99개 있는 사회에 다른 규칙을 가진 프로그램이 들어왔다고 생각해보라. 그 친구가 충분히 협조적이지 않다면, 그래서 시작부터 배반을 구사한다면 처음에는 5점을 가져갈 것이다. 각각의 개체와 10게임 씩 진행한다고 했을 때, 그 다음 게임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점수는 1점이다. 10게임이 끝난 후 그가 얻는 점수는 14점. 그와 경기했던 팃포탯은 9점을 얻는다.
그리하여 그가 나머지 98개의 팃포탯과 각 10게임 씩의 모든 경기를 끝낸 후 얻는 점수는 14*99 = 1386점이다. 반면 팃포탯은 그와의 경기에서 9점을 얻지만, 나머지 98개의 팃포탯과의 경기에서는 30점을 얻으므로, 그들이 기록하는 점수는 9+(98*30) = 2949점인 것이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비신사적인 전략은 도태된다(협력적인 전략으로 바꾼다). 이것이 바로 자연선택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배반하는 '올디'의 사회는 어떻게 총체적 안정성을 갖는가? 마찬가지로 올디가 99개 있는 사회에 팃포탯이 들어갔다. 올디는 첫게임 부터 배반하고, 팃포탯은 협력한다. 마찬가지로 10게임 씩 진행한다고 했을 때, 올디가 얻는 것은 5점 + (1점*9게임) = 14점이다. 반면 팃포탯이 얻는 것은 0점 + (1점*9게임) = 9점이다. 올디끼리 게임했을 때 그들은 모두 1점 * 10게임 = 10점을 얻지만, 팃포탯은 항상 9점 밖에 받을 수 없으므로, 그 사회에서 팃포탯은 도태된다.
자,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여기까지 읽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손 좀 들어보실래요?)
지금 우리사회가, 설령 '올디'라고 해보자. 그래서 사회의 '뉴비'(* 뉴비지터 : 신참을 뜻하는 인터넷 신조어)인 우리 20대들은 선택해야만 한다. 위에서도 살펴 보았듯, 올디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다른 전략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88만원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도 올디가 되어버리자니, 너무 서글프다. 그래서 바로 케케묵은 연대가 중요한 것이다.
총체적 안정성을 지닌 이기적 배반자들의 집합체인 '올디 사회;라고 할 지라도, 5%의 팃포탯 무리가 침투하면, 도태되지 않은 채 자리를 잡고 동등하게 게임할 수 있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다고? 95개의 올디가 있는 사회에 5개의 팃포탯이 들어간다고 하자. 하나의 올디가 얻을 수 있는 점수는 (14*5) + (9*94) = 916 점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팃포탯이 얻을 수 있는 점수는? (30*4) + (9*95) = 975 점이다! 만세! (* 팃포탯 끼리는 매번 협력 3점*10게임*4개체 이고 올디와는 10게임에 9점*95개체)
* 10/22 추가 : 올디가 얻을 수 있는 점수는 모딕 님이 지적해주신 대로 (14*5) + (10*94) = 1010 점입니다. (본문과는 반복되는 게임의 수 등 변수의 차이가 있어서 이 경우에 팃포탯 5%는 약간 부족하네요;) 아무튼 기조는 마찬가지라 수정은 하지 않고 오류만 밝힙니다.
그렇다. 액슬로드가 말하는 것은, 우석훈이 20대들에게 말하는 것은, 팃포탯의 연대를 만들라는 것이다. 괜히 쫄지말고, 너도 같은 '올디'가 되지 말고, 같은 '팃포탯' 친구들과 뭉쳐서, 이 사회에 새로운 목소리를 내라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햐나고 물을 필요 없이. 이미 게임이론으로 Q.E.D.- 증명 끝! 했듯이.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고급영어로 표현하자면-
"Are you Tit for Tat? I am Tit for Tat, too! Let's make some fun!"
(죄송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아니라 MD인 거죠…)
핵심요약정리에 익숙한 20대 동지 여러분들을 위해, 이 긴 페이퍼를 이 만큼 읽어주신 데 대한 보답으로 팃 포 탯 전략의 핵심을 마지막으로 공개.
1. 질투하지 마라
2. 먼저 배반하지 마라
3. 협력이든 배반이든 그대로 되갚아라
4. 너무 영악하게 굴지 마라
협력과 협상, 설득에 대한 게임이론이 더 궁금하다면 <가위 바위 보>를 읽으면 좋겠다. 액슬로드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 받아, 좀 더 다양한 사례에 접목시킨 책이라고 하겠다.
팃포탯 전략에는 사과가 필요 없지만(절대 먼저 배반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인간이기에 많은 실수를 하게 마련. <사과 솔루션>은 바로 그때 필요한 책이다.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는 윈-윈 소통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한 마디로 사과 매뉴얼이다! (사과에도 매뉴얼이 필요하다! 좀 더 말랑말랑한 사과 매뉴얼이 필요하신 분은 이기호 연재소설 <사과는 잘해요> 참고…) 어쩌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사과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워킹 푸어>. 제목 그대로 열심히 일하지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즉,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협력이고, 우리가 마침내 협력해서 목소리를 낼 때,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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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평소와도 다르게 잔뜩 '이론적인' 이야기를 써버리고 말았는데 사실 이 자리를 위해 준비되었던 것은 걷는 사회학자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였다. 그 페이퍼의 첫 머리에서 인용될 예정이었던 것은 바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한 대목.
오랫동안 정처 없이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은 어떤 도취감에 휩싸인다.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걷는 것 자체가 점점 더 큰 추력을 얻게 된다. 그에 반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상점, 자그마한 바나 웃음을 던지는 여자들의 유혹의 힘은 점점 더 작아지며, 다음 골목, 저 멀리 으슥하게 우거진 나뭇잎들, 어떤 거리의 이름 등의 자력에는 점점 더 저항하기 힘들게 된다.
곧 배가 고파온다. 그러나 허기를 가라앉힐 수 있는 수백 가지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금욕적인 동물처럼 그는 미지의 구역을 배회하다가 결국 지칠 대로 지쳐 자기 방으로, 그의 방이지만 왠지 서먹서먹하고 그를 차갑게 맞이하는 방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에 빠진다.
-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중에서
서먹서먹하고 차갑게 맞이하는 방에서, 이렇게. 끝.
* 다음 페이퍼의 주제는 '근대 문학의 종언 - 한국 문학에 더이상 대작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 스티븐 J. 굴드 이론을 중심으로'가 될 예정이었지만 예고 없이 바뀔 예정입니다.
* 고맙습니다. 이번 주도 만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