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침대로 들어가려는데, 어이, 하고 오랜만에 그것이 찾아온다. 나는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맞아들인다. 아무도, 절망을 내쫓을 수 없다.
우리는 마주하고, 천천히 말을 주고받는다. 잘 지냈어? 별 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 절망은 그렇게 말하고, 친근한 몸짓으로 내 무릎을 톡 톡 친다. 침대에 들어가 얌전히 베개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내 무릎을.
오래전에 잊어버린 일이 몇 가지나 떠오르고, 나는 불쑥 나타난 그 기억의 선명함에 어쩔 줄 모른다.
예를 들면 쓰기 교과서.
황록색 표지에 커다란 장미꽃이 촌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추악하다고 생각했다. 추악하고, 품위가 없다고.
그 무렵, 품위가 없다는 말은 아빠의 입버릇이었고, 우리집에서는 결정적인 경멸을 뜻했다. 하지만 어린애들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교과서 표지를 가지고 품위가 없다고 하면, 그런 말을 한 어린애야말로 품위가 없는 셈이 되었다.
우리 엄마는, 수업과 공책이란 말에 경의를 표하는 마지막 엄마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 경청하거라." 하고 늘 주의를 주곤 했는데, 나는 '경청'을 오래도록 '긴장'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쓰기 교과서를 추악하다고 생각했다. 추악한 것은 한 번 보고 나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촌스런 장미꽃 그림.
나는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것만큼 초등학교가 품위 있는 장소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한번으로는 차라리 모르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 무렵, 나의 조그만 머리는 지금보다 훨씬 모순으로 가득했다.
이제 갈게.
절망이 말한다. 절망은 어린 시절 얘기를 좋아한다.
그럼 또 보자. 잘 자고.
절망이 그렇게 말하고 나간 후에야 나는 겨우 잠든다.
<67~ 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