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두시
1
밤 열두시는
혼자시키는
떡볶이 1/2인분과 순대 1/2인분이다
그것도 다 식은 채로
한 접시에 나란히 나오는 것이다
순대는 고추장에 닿지 않으려고
한사코 한쪽을 지키고 있고
떡볶이는 순대 쪽으로 진물을 흘리고 있다
순대 먼저 먹을지
떡볶이 먼저 먹을지
밤 열두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2
밤 열두시는
밥 한 공기를 시켜
당신과 내가 나눠 먹는 일이다
그러다 밥 속에서 눈썹이 나오면 눈썹을 떠내어
몰래 식탁 밑으로 숨기는 일이다
당신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엔
붉게 수술 자국 생겨나고
사과나무 하나 뽑혀나간 것 같은 구덩이는
두 사람이 걸어온 밤길처럼 물컹하다
반찬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안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밤 열두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詩 이병률
한동안은 성실했다. 계획표에 써 있는대로 움직였다. 스트레스를 받는 시각도 기쁨을 느끼는 시각도 매일 같은 시간이었다. 밤 열두시가 되면 어김없이 자야했다. 몸이 그렇게 기억하도록 만들었으므로 그래야했다. 그래도 밤 열두시에 자기엔 뭔가 허전했다. 침대에 누워 그날 읽고 싶은 책들을 꺼내 읽었다. 스탠드를 켜놓고 라디오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가끔 무작위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메모하기도 했다. 추억이 생각나면 책을 덮고 그 추억으로 깊이 들어갔다. 무안하고 창피했던 기억보다 행복하고 아쉬웠던 추억이 더 많이 떠올랐다. 밤 열두시는 그렇다.
올 가을의 목표는 '단촐한 서가'이다. 오랜만에 알라딘 중고샵에 스무권의 책을 보냈다. 거의 채 1년도 되지 않은, 손때가 묻지 않은 책들이다. 정들기전에 보냈다고 하면 너무 구차한가. 어떤 책은 몹시 귀하게 여겼던 책이었는데 판매 목록에 넣었다. 오랜만에 그 책을 펼쳤을 때 저자가 내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조잘조잘...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서워서 이별했다. 다이어트가 필요한 서가이다. 너무 많이 소유하려했던 티가 난다. 서가 맨 아래 한 칸이 비었다. 그 텅 비어있음이 매력적이다.
에릭 호퍼의 책은...나의 무지와 건망증과 제멋대로의 성향을 드러내는 구매 목록이었다. 에릭 호퍼를 에드워드 호퍼로 알았던 것이다. 와. 에드워드 호퍼가 자서전도 썼구나! 했던 것이다. 그가 그가 아니었다. 득도 있다. 덕분에 몇 년 전부터 보관함에 있던 책을 구해냈다. 에릭과 에드워드씨 모두 좋다.
몹시 힘든 여름을 보내던 어느날 **동 서점에서 덥석 집어든 <어머니 수난사>는 책더미에서 구했다. 어떤 날은 서가에 책을 정리하여 넣는 것도 힘들었던 것이다.
엔, 그녀에게 받은 <꿀벌의 언어> 는 자꾸 벌꿀의 언어라고 말한다. 벌꿀과 꿀벌, 에릭과 에드워드, 비슷한듯 다르다. 벌꿀은 꿀벌들이 채집한 꿀을 일컫는 것이고 꿀벌은 꿀을 채집하는 벌들이다. 어쨌든 책은 달다. 그녀가 여러번 이메일에서 언급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야금 야금 꿀단지 꿀 먹듯 읽고 있다.
곧 서가에 넣고 싶은 책들. 망설이고 있는 건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이...책들이 있어서다. 책들이 줄 서 있다. 미쓰요의 책들이야 무조건 영순위이지만 조금 참고 있다. 전작주의자가 되는 것이 조금은 두려워졌다. 실망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닮을 것 같아서다. 미쓰요처럼이 아니면 다른 작가의 책들을 읽지 않을 것 같아서다. 슈이치씨의 신간들은 해마다 가을에는 꼭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아르헨티나 할머니>와는 조금 다르길 기대하는 <무지개>는 망설여지면서도 기어코 구입하게 될 것 같은 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