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시간이 저물고 있다. 잘가라, 2009.   

우리 동네에 익숙해졌고 어두운 밤이 무섭지도 않다. 지난 가을에서야 나는 귀신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났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무섭냐는 질문에 나는 늘 귀신이라고 말했다. 머리 풀고 흰 옷 입은 캐릭터로서의 귀신이 나는 제일 무서웠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봐 갑자기 천장에서 거꾸로 매달린채 나타나 메롱할까봐 문 틈 사이로 통통 뛰다 스윽 들어올까봐... 무서웠다. 귀신 캐릭터는 순전히 어린 시절에 주워들은 소문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에서 연유하고 있다. 심장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만큼 공포를 느꼈고 공포는 지금까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랬던 귀신을 극복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꿈이나 현실에서 귀신은 내 앞에 나타난 적은 없다. 순전히 내 상상이고 허상이다. 공포 욕망이다.  


올해 가을 나는 조금 성장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쑥스럽지만 귀신에 대한 공포를 물린친것은 내 인생의 수확이다. 한밤중에 문득 귀신이 생각나도 나는 결코 무섭지 않다. 혹 거기 있거든 날 방해나 하지 말아줘요, 라고 속삭이는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두어달 전엔 끔찍한 귀신 꿈을 꿨는데 곱씹어 생각해보니 재밌다. 귀신은 머리를 풀었으나 긴 생머리가 아니었다. 막 셋팅롤을 하고 온 것처럼 굵은 웨이브진 머리였고 길고 늘씬한 손톱은 네일샵에 다녀온 것처럼 빨간 메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나를 놀래켜주려고 문 뒤에서 스윽 나타났지만 놀라지 않았다. 흰색 셔츠형 잠옷은 섹시했다. 엄마에게 귀신을 말하면서 나는 웃기까지 했다. 내 마음의 어떤 겹을 물리친거였다.  


서울에 살 때는 결혼을 했어도 결혼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부모님이 지척에 있었고 나는 그저 조금 먼 방으로 옮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울을 떠나 이곳에 살다보니 이제서야 결혼한 느낌이 난다. 나, 유부녀구나 싶다. 나, 아줌마라고 불리어도 되는구나 싶다. 나, 독립해야 하는구나 싶다. 처음으로 김치를 담갔던 날 김치 담그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다. 재도전하기 매우 겁나는 메뉴 중 하나다. 그래도 한겨울에 먹는 동치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엄마가 보내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도전하기로 결정. 동치미 재료를 준비했다. 엄마는 아주 쉽다며 응원했다. 나도 아주 쉬울거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을 맞추고 며칠을 돌보고 푹 재웠다. 결과는 '내가 잠든 사이 엄마가 담가놓고 간 것 같은' 엄마표 동치미가 완성되었다. 나날이 점점 더 엄마표 동치미 맛이 난다. 곰소에서 사온 소금도 한 몫 했다. 그야말로 놀.라.운.동.치.미의 탄생이다!   

 



나의 첫, 동치미  



적절한 소금의 맛, 삭히는 소금의 맛은 오묘하다. 놀라운 동치미와 올해의 시간이 가르쳐주었다. 나는 흠뻑 소금의 시간에 들어갔다. 열정열정열정 오기오기오기 질주질주질주... 소금의 시간은 무엇이든 두 배 세 배의 욕망을 요구했다. 나는 서툴렀고 자주 징징거렸다. 소금의 시간은 곧 끝났다. 소금기가 쫙 빠지니 담백해졌다. 무서운 귀신, 지나친 열정과 욕심, 우연한 행운을 소금의 시간에 두고 왔다. 나는 열정적이지만 적당히 뜨겁다. 욕심은 있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연한 행운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다. 만약 행운이 온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필연이 되도록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몹시 다사다난했던 한 해는 진정한 소금의 시간이었다. 새해에는 모두에게 놀라운 동치미의 탄생처럼 잘 삭힌 소금 맛이 나는 시간이기를 기대한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9-12-31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2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02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음식 맛은 객관적 평가가 중요하다고 보여집니다 플레져님...
자 주소 불러드립니다...동치미 한 박스 부탁합니다 착불로 보내시면 됩니다.=3=3=3

플레져 2010-01-02 14:03   좋아요 0 | URL
동치마라~~ 후후~
동치미는 있지만 그건 없어서 이를 어쩐다...ㅋ

Mephistopheles 2010-01-02 14:50   좋아요 0 | URL
수정했으니까 이제 보내주세요 동.치.미.

플레져 2010-01-04 12:25   좋아요 0 | URL
항복.
아주 맛있을거라 상상해주세요.
메피님이 먹어봤던 최고의 맛을 상상해주세요. 플리이즈...ㅎㅎ

stella.K 2009-12-3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것 한 사발 후루룩 마셔보고 싶네요.
무는 또 얼마나 아삭할까요? 아흑~
플레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플레져 2010-01-02 14:04   좋아요 0 | URL
장담하지만 몹시 아삭합니다 ㅎㅎ
스텔라님, 건필하시고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해피뉴이어 ^^

2010-01-18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