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매일 짧게나마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라기 보다는 그날의 소소한 기록에 불과한 일들이다. 그날 통화한 사람, 오랜만에 문자 안부를 주고 받은 사람, 인터넷 주문한 상품, 라디오에서 들은 노래 제목, 새로이 알게 된 단어의 뜻, 그날 마신 커피의 양, 다음달 카드지출내역서 등등을 짧게 기록하고 낙서한다. 갑자기 적어야 할 메모도 다이어리에 다 쓴다. 그러면 그 계좌번호는 어디있지? 그사람 연락처는 어디있지? 할 필요 없이 다이어리를 찾으면 된다. 오늘 아침엔 제법 긴 일기를 썼다. 일기도 쓰고 짧은 기록과 낙서를 할 수 있게 된 건 올해 받은 제법 묵직한 다이어리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수첩, 양장본 사이즈의 다이어리를 애용했었다. 내가 직접 날짜를 써야 하는 만년 다이어리 형태였다. 그러나 올해 선물받은 다이어리는 날마다 한 페이지씩 올해의 날짜가 새겨져있고, 그 한 페이지는 그날치 나에게 주는 여유처럼 느껴져 기록할 맛이 난다. 다이어리를 후루룩 넘기다보니 올해 내 앞에 다가올 날들이 참 많고, 고맙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이들었다. 모든 것이 다 고맙고 감사하다. 캄사!!

 

 

어제는 눈발 날리는 가운데 산책했다. 트레이닝복에, 패딩조끼에, 장갑에, 모자에 눈발이 그득그득 쌓였다. 돌아오는 길엔 눈발이 내 앞으로 들이쳐 얼굴은 고스란히 눈을 맞았다. 그게 다 얼굴의 반을 가려주는 마스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마스크가 보이기엔 좀 요상해도 한여름엔 자외선 차단 해주지 (과연...) 추운 날엔 보온효과도 커서 늘 애용한다. 마스크는 늘 내가 놓아두던 자리에 놓아두곤 했다. 한 며칠 산책을 걸렀더니 마스크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웬만해선 물건을 잘 잊어버리지 않는 편이다. 특히 매일 사용하는 일상 용품은 눈에 띄는 곳에 두어 잊어버릴 수도 없다. 첫번째 마스크를 잊어버렸던 날의 아득함이 떠올랐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일몰 직전의 늦가을 산책로는 풀숲에서 기기묘묘한 소리가 들린다. 새들의 움직임이 빤하지만 해질 무렵의 소음은 괜한 오싹함을 선사하기도 하여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와 통화를 하면서 나는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통화는 할 수 있지만 먼 곳에서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 대한 예의 같아서 마스크를 벗고 통화를 했다. 마스크는 내 귀 한 쪽에 걸려 있었고 바람은 여전했다. 십 여분쯤 통화를 했을까. 통화를 마친 후 마스크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내 손때가 묻은 소지품은 가치로 따질 수가 없다. 사소한 소지품이어도 그것이 사라지고나면 잠깐의 균열과 불편함이 생긴다. 당장 새것을 마련할 수는 있어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길을 잃은 그레텔의 두려움을 껴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빠른 걸음으로, 뛰거나 걸으면서 내 뒤에서 따라오던 산책객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산책로에서 산책하는 이들은 거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시선이 마주쳐도 금세 외면하고 자신의 리듬으로 되돌아갈 줄을 안다. 내가 마주친 산책객들은 다섯 명의 여자들이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나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읽은 것 같았다. 하필이면 그들 모두 그 흔한 산책객의 필수품인 마스크를 하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마스크를 못 보셨나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게 왠지 유난스러워 보여서, 그녀들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결국 나는 마스크를 찾지 못했다. 그건 두고두고 어떤 안타까움을 주었고 산책로에 나설 때마다 한동안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마스크는 금세 장만했지만 손때가 묻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아쉬움이 오래 남았다. 그나저나 내 두번째 마스크는 또 어디로 간걸까. 패딩 점퍼 주머니도 뒤져보고, 심지어 침대 밑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없다. 얼른 약국으로 가 새 것을 사야하는걸까. 끙...

 

 

 

마스크만 잊어버린 게 아니었다. 읽었던 책 제목도, 내용도 잊어버렸다. 읽은 책을 또 주문하고 말았으니. 그것도 열흘 간격에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했다.

 

 

바로 이 두권이다. 문제의 두 권의 책. 
재미있게 읽었다. 독서 중 인상깊은 구절을 따로 메모해두기도 했다. 그런데 책 검색의 검색 꼬리를 따라가다가 이 책들이 몹시 신선하게 와닿아서...목차까지 확인했음에도 덜컥 주문을 한 것이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여러번 읽어도 좋으니까, 다시 또 읽고 있다.

술꾼의 품격도 다시 읽어도 좋다. 다만, 이 책은 날이 풀린 후에나 읽어야겠다. 

(아, 그러고보니 술꾼의 품격을 페이퍼에 올린 적도 있는 것 같다.........ㅠㅠ)

 

 

 

이주은의 글은 편안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그림과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림과 잘 어울린다. 그녀의 책들을 다 소장하고 있다. 읽고 있으면 이주은이 말하는 그림과 다르게 또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글의 모양새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사라지기만 하는 것 같지만 아주 새롭게 무언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기억은 잊혀지는 특성보다 불현듯, 새삼, 문득 떠오르는 성질이 더 짙다. 어떤 일과 연관하여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면 그날은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셜록 시리즈>를 보면서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언니는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언니는 늘 셜록과 괴도 루팡 사이에서 귀여운 갈등을 하곤 했다. 누굴 더 좋아해야할까! 나와 제법 터울이 났던 언니는 혼자만의 갈등을 즐겼고 결국 루팡을 선택했다. 대신 셜록이 살던 집 주소 베이커 스트리트 221B를 언니의 책상에 이름 붙였다. 그 시절 언니의 책상은 아주 컸다. 작은아버지가 학창시절 쓰던 책상이었다. 나는 언니가 학교 간 사이 그 책상에 누워, 아니 베이커 스트리트 221B에 불량하게 다리를 꼬고 누워 세계명작동화를 읽거나 잠이 들곤 했다. 책상은 나의 놀이터였고 어린 나에게는 과분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언니의 책상 이름을 떠올린순간...내 안에는 더 많은 기억들이 잠들어있다는 걸 알았다. 기억은 언제든 나를 찾아올거라는 생각에 문득 내일이, 미래가 기대가 된다. 올 한 해의 날짜가 꾹 꾹 새겨져있는 두툼한 다이어리의 날짜가 새삼 설레는 것도 다 그때문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2-0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12-02-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쏙 들고 손에 챡 감기는 다이어리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요!
작년 연말부터 올해까지 다이어리 산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결국 대충 타협해서 쓰고 있습니다 ^^;

플레져 2012-02-02 22:08   좋아요 0 | URL
연말이면 다이어리 고르는게 연중 행사에요 ㅎㅎ
맘에 드는 다이어리 고르셨어요?
쓰다보면 곧 정이 들거에요^^

icaru 2012-02-0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늘 부르짖고 다니는 모토가 그것인데요, '기록 좀 하자고!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니까, 기억이 지좋을대로 사실 왜곡해버리는 횡포도 막을겸사...' 그러나 전, 기록을 잘 안 하네요. 못하는거지요 ㅎㅎ
셜록 시리즈라 하시면, 시즌2가 시작된 BBC 드라마를 말씀하시는 것일려나? ㅎ 명절에 시즌2 2부까지 봤거든요. 플레져님은 유년 시절도 멋지구리~해요!! ㅎ 기억력도 좋으시구..
이주은 씨는 알라딘에서였나, 어디에서였나 인터뷰 기사를 읽었었는데 그의 프로필에서 주부로서 일상을 고단하게 살았구나, 하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이주은 씨 글이 플레져 님에게는 그렇구나! 이렇다하게 읽은 책이 없으니, 꼭 읽어봐야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문체나 글 스타일을 안다는게,,, ㅎㅎㅎ 저도 있거든요. 잘 읽히고, 내 주파수와 잘 맞다고 생각되는 문체!
아무튼, 다른분들 속삭이셔서 저도 비밀글로 속삭일까 하다가, 내용 중 은밀한 부분이 없으므로 통과--!

플레져 2012-02-02 22:10   좋아요 0 | URL
제가 얼마전에 정말 아주 멋진 스토리가 떠올랐거든요. 어떤 막연한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생각이 안나는거에요 ㅠㅠ 그게 정말 엄청난 화력을 갖고 있는 장면같았다며 미련을 못 버리고 틈만 나면 그 장면을 떠올리려고 애쓰다...지쳐가요...흑.
이주은씨 인터뷰를 찾아봐야겠어요 ^^ 이분의 문체가 무지 편안해요. 정든 친구가 읽어주는 느낌 ㅎㅎ
담엔 은밀한 부분도 섞어주세요 ㅋㅋ

2012-02-07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14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