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점심상  

잠깐, 광화문 어디쯤에서 만나 밥을 먹는다
게장백반이나 소꼬리국밥이나 하다못해 자장면이라도
무얼 먹어도 아픈 저 점심상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 별달리 상처될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
캐나다? 계곡? 나무집? 안데스의 단풍숲?
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지그시 목을 누르며
밥을 삼킨다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너한테는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들끼리
가까이하는 일도 큰 죄야, 심지어 죄라구? 

너는 다시 어딘가에서 넥타이를 반쯤 풀며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누르고
나는 어디, 부모 친척 없는 곳으로 가볼까?
그때, 넌 왜 내게 왔지? 

너, 왜라고 물었니? 
C'est la vie, 이 나쁜 것들아!  
나, 어디 도시의 그늘진 골목에 가서 
비통하게 머리를 벽에 찧으며...... 

다시 간다  

詩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프렌치 토스트에 딸기잼을 듬뿍 바르고 햄 한 조각 넣어 씹어먹는 아침상. 배경음악도 아닌 배경수다처럼 틀어놓은 티비에선 올여름 휴가를 함께 하고 싶은 연예인들을 꼽는다. 남편이 묻는다. 자기는 누구랑 휴가를 가고 싶어? 스크램블 에그를 한 입 가득 넣고 남편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나, 혼자. 어느덧 나를 닮아 애교가 늘어버린 남편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기는 나와 함께 휴가를 가고 싶다고, 뻥, 일지도 모를 접대용 멘트를, 철철, 흘린다. 어디에서 보았더라. 나처럼 말한 대다수의 여자들을 본 적 있다. 그들은 일상에 지치고 시들어버린 여자들이었다. 여름 초입부터 두 달 동안, 지금까지 쭈욱 힘들고 고단하고 시들고 피곤하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남들 다 가는 유럽 배낭 여행을 보며 엄마가 말했다. 너도 다녀와. 못 간 이유는 많았다. 갑자기 가려니 난감했고 엄마가 진즉에 떠밀지 않은 것이 야속했고 봐야할 영화가 수북했다, 그때. 나중에 가지 뭐 하고 말았는데... 그때 갔어야 했다. 아니면 그때 못 간 휴가, 지금 되찾아서 떠나고 싶다. 물론, 나 혼자. 혼자, 라는 것 때문에 이 시집을 꺼낸 건 아니다. 이 시집이야말로 어떤 구실에서든 내가 불쑥 꺼내볼 수 있는 진통제니까. 진통제를 스윽, 눈으로 맥주먹는 게처럼 스윽 빨아들인다. 심장이, 마음이 차가워진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나 혼자 가장 편한 신발을 신고 노트북과 <렛미인><완벽한 병실>을 들고 떠났으면 좋겠다. 아아. 막 상상하니까 막 행복해진다. 어쨌든 나도 어디로든 다시 간다.  

 

 

  

 

 

 

 

  


책그림이 있어야 멋있어지는 알라딘 페이퍼. 한밤중만 피해서 읽자 하면서도 꼭 잠자리에 들어서야 렛미인을 펼쳐보게 된다. 꿈자리가 사나울까봐 많이 읽지 못하고 접어버린다. 영화보다 더 좋을거란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디비디가 나오는대로 꼭! 자로 잰듯 소설 쓰는 여자 오가와 요코의 완벽한 병실은 집중을 필요로 한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꿔나가는 소설가의 재능을 훔쳐보며 마구마구 생성되는 건물들과 책상과 병실 침대를 상상한다. <임신캘린더> <약지의 표본> <박사가 사랑한 수식>과는 다르다. 언제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그 다음 작품이 참 좋은 작가중에 한사람.  

저녁은 좀 가볍게 먹고 싶다. 서늘하면 더 좋겠다. 오늘은 일년 중 가장 무더운 '대서'다. 어제 일식 이후에 시원해진 날씨. 대서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크크. 이대로라면 여름, 지낼만하다.   

 페이퍼 배경음악은 윤상 <소심한 물고기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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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7-23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오늘 플레져님은 요새 무얼하고 계실까 생각했는데 페이퍼가 떴어요. 너무 놀라워요! 문학동네 훔치고 싶은 책 10권 리스트 당첨자 보면서 '문학'하니까 플레져님이 떠올랐거든요. 반가워요! ^^

플레져 2009-07-23 23:13   좋아요 0 | URL
아. 반가워요, 마노아님. 그저 무심코 페이퍼쓰기를 눌렀던 것이 아니라 마노아님의 궁금증 호르몬 덕분이었던가보네요 ^^ '문학' 으로 저를 생각해주셨다니 너무 좋은걸요. 헤헤.

2009-07-23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3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07-2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핑 제목을 보고 이런 제목의 시가 올라와 있을 것 같다 싶었는데 정말 그렇네요. 박연준의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도 플레져님덕에 알게 됐었죠. 지금도 제가 그나마 가장 자주 펼쳐보는 시집이에요. (시를 잘 몰라요 ㅜㅡ)

그나저나 렛미인이 영화보다 더 좋단 말예요? 아아. 또 사야 된단 말예요? 휴..

밤과 이른 아침에는 서늘하니 잠도 잘 와요. 잘 자요, 플레져님.

플레져 2009-07-24 09:49   좋아요 0 | URL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
영화만큼 좋은 것 같아요. 좋은 영화는 좋은 원작이 있듯이 말이죠.
원작 소설을 매끄럽게, 액기스만 쏙, 뽑아서 간결하게 만들었다는 느낌.
돈.주.고. 사셔야 할텐데...1년 후 이벤트를 기다리기엔 좀 그렇죠? ㅎㅎ

Kitty 2009-07-2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플레져니임~~~~ 글 보니 넘 좋아용~~
남편분이 진짜 애교가 많으신 듯 ㅋㅋㅋㅋㅋ 너무 좋아보입니다~
저도 문학, 특히 한국문학하면 플레져님이 젤 먼저 생각나요!! ㅎㅎㅎㅎ

플레져 2009-07-24 09:50   좋아요 0 | URL
무뚝뚝한 나무 토막도 애교쟁이로 만들어버리는 저의 비결...은 없습니다만 ㅎㅎ 아마도 함께 한 시간 덕분에 서로를 닮아버린 것 같아요.
잘 지내신거죠? 한국문학하면 플레져! 이거이거 기분 최고인걸요 ^^!

2009-07-25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5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8 0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7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8 0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몸이 사라진 곳에서 더 찬연히 빛나는 정신, 마음 깊이 숭배합니다.

잊지않겠습니다.  


▦ 추모합니다, 노통.  

- 2009년 5월 2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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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5-29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모합니다.

2009-05-29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5-3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지 않습니다.

2009-06-23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9-06-25 23:50   좋아요 0 | URL
아. 시인님. 마음,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제가 구입해 읽겠습니다.
늘 건필하시고 좋은 시 많이 보여주세요 ^^
 

 

오후 세 시의 식사  


찻길가의 조그만 빵집
하나밖에 없는 조그만 테이블 앞에
소박하고 정갈한 정장 차림의
아직 늙지 않은 한 아주머니
테이블 위에는 보랏빛과 잿빛이
섞인 속살을 드러낸 케이크 한 조각
그리고 갈색 조그만 드링크 병

아주머니는 이따금 한 모금씩
드링크로 입을 적시며
달게 케이크를 베어 물었다
유리벽 너머의 거리에
비스듬히 등을 돌리고.  




  詩  황인숙  <리스본行 야간열차>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건 꽃보다 구준표 그리고 잔치국수다. 잔치국수를 먹고 나면 '맛있어 죽겠어'를 연발하게 한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잔치국수와는 좀 다른 국수일지도 모른다. 플레져국수라고 해야 할까. 화원 보다 꽃집이 더 정감있고, 베이커리 보다 빵집이 더 친숙한 것처럼 플레져국수 보다는 잔치국수가 훨씬 낫다. 레시피 라고 하기엔 쑥스러워서 만드는 방법을 간략히 소개한다. 재료 : 호박, 신선한 김장김치, 소면, 구수한 육수. 육수는 보통 육수와 비슷하다. 건새우, 양파, 대파, 다시마, 멸치등 냉장고에 있는 국물내기 재료를 모두 넣고 푹 우려낸다. 호박은 굵게 채 썰어 참기름 포도씨유를 넣고 살살 볶는다. 그사이 국수 삶을 물을 올려놓고, 호박이 다 익었을 때쯤 국수를 넣어 삶는다. 김장김치는 푹 익은 것보다는 잘 익은 정도가 좋다. 저 詩에서 처럼 아직 늙지 않은 아주머니 와 흡사한 느낌의 김치면 좋다. 1cm 크기로 채 썬 김치와 호박을 국수에 올려놓고, 육수를 붓는다. 호박을 좋아해서 호박은 아주 듬뿍 넣어 먹는다. 요즘 호박 값이 금 값 못지 않더라. 여러 군데 마트를 들러보면 싱싱한 호박을 파격 세일로 파는 곳도 있다. 비싼 호박이 장바구니에 두 개나 담겨있어 아쉬울지언정... 오후 세 시, 오후 일곱시, 오후 열 시에도 틈틈이 내 방식대로의 잔치국수를 맛있게 먹는다. 맛있어 죽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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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 2009-03-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란 지단, 김이 빠지면 무효!
(경상도식은 양념장을 해야되는데 : 매운 고추2+대파잘게썰고,마늘+국간장+진간장약간)
저도 주말의 한끼는 무조건 잔치국수. 이제 국수집 해도 될 경지에 올랐다나 뭐라나;

플레져 2009-03-12 18:15   좋아요 0 | URL
앗. 저는 국수나 만둣국에 김 들어가는 걸 싫어해요 ^^;; 김은 좋은데 뜨건 국물에 들어있는 김은 다 된 밥에 재뿌리는 느낌이랄까요. 계란지단은 귀차니즘으로 안하는거랍니다. 그야말로 내맘대로 국수 ^^!
(언제 한번 주문전화할께요! ㅎㅎ)

Mephistopheles 2009-03-1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이요!

세끼 밥 이외에 세시 일곱시 열시..이렇게 간식으로 국수를 드시는 걸까요?
아님 밥대용일까요?

마냐 2009-03-12 17:59   좋아요 0 | URL
저도 메피님과 똑같은 질문요 ㅎㅎ 오랜만에 뵙는데, 이 글만으로는 정말 행복하게 지내시는 듯 ㅎ

플레져 2009-03-12 18:25   좋아요 0 | URL
메피님, 음... 다섯끼 정도는 먹는 거 같아요. 제가 위가 작아서 한꺼번에 많이 못먹는답니다. 매우 불편한 위장을 갖고 있지요^^ 간식으로 하루에 두 번은 먹어요. 먹고 나면 든든해요. 취사량을 넘기면 괴롭지만...


마냐님, 반가워요 ^^
이 글의 크기만큼만 행복한건지도 모르겠어요................흑!

2009-03-12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tty 2009-03-13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읽는데 침이 그득;;; 저도 플레져님표 국수 먹고싶어욧~~~~~~~~~~~~ >_<
오후 열 시에 먹는 국수는 꿀떡맛이죠 ㅎㅎ
그나저나 플레져님도 위장 크기가 저랑 비슷하시군요!!!! 저도 위는 작지만 입이 궁금한건 또 못참아서 하루에 5-6번 정도 조금씩 야금야금 먹어요. 이렇게 하면 종일 배고프지는 않아서 좋은데 매번 양치질하기 귀찮아 죽겠어요;;;;

플레져 2009-03-13 22:39   좋아요 0 | URL
불량한 위장 때문에 사회생활 하기 힘들때가 종종 있어요 ㅎㅎ
야금야금 먹는 일이 때로는 너무 귀찮아요.
굶기도 하는데 결국 본능을 거스르지 못하고 먹어야 한다는 현실...
저두 양치질을 대여섯번은 하나봐요 -_-;

2009-03-13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7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4 0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3 0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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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나의 모습 또는 내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어떤 모습에 시기심을 느낀다. 청년 시절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나의 신체와 정신적인 신선함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적대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 같은 자기 시기심은 흔히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내가 예전에 그랬듯이 (또는 과거를 미화시키려는 우리의 성향 덕분에) 오늘날 힘과 아이디어로 넘치는 다른 사람을 시기하게 된다. 나는 오늘날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므로 그에게 적대적으로 대한다.  

35쪽  

 

 

비록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궁지에 몰고 가는데 성공하기는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도 모차르트가 작곡한 음악을 예전과 다름없이 높이 평가한다. 그는 여전히 감탄해 마지 않았고, 자신의 시기심을 동정심으로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해본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살리에리가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더라도 모차르트는 늘 자신의 천재성을 떠벌리기만 해서 결국 살리에리에게 수치심을 안겨준 때문이다.  145쪽  

 

무조건 나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본능적 시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구별해야할까. 어떻게 멀리해야 할까. 차마 고쳐줄만한 능력은 없고 나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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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3-0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악한 사람이라면 열등감을 증폭시켜 자폭시켜버리지 않을까요..^^

플레져 2009-03-04 13:34   좋아요 0 | URL
열등감은 맞는데 사악함은 잘 모르겠어요. 질투와 시기심을 비교하자면 질투는 그나마 시기심에 비하면 자신한테 이로운 거지만, 시기심은 결국 자기를 망치는 자폭, 맞습니다 ^^

stella.K 2009-03-0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전에 어느 출판사로부터 꽁자로 받고 결국 읽지 못했던 책이어요.
원래 어려운 건지? 나하곤 궁합이 안 맞는 책인지...
이건 딴 얘긴데, 나랑은 전혀 다른 타입이면서 사람에 대한 취향이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도 똑같이 좋아하는...
그럴 때도 꽤 힘들던데요?-_-;;

플레져 2009-03-04 13:36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 꽤 재밌게 읽었어요. 당연히 궁합이 안맞는 책이 있을 수 있지요. 남들 다 좋아해도 저는 데면데면한 책이 있더라구요. 그냥 그대로 둬야죠 뭐 ㅎㅎ 취향이 같을 수는 있을 거 같아요. 그건 진짜 '취향' 이니까 ^^
넘 신경쓰지 마셔요.

2009-03-04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4 1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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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3-0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아서 고쳐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말해도 자신의 고쳐야 할점에 대해 알지 못하는건 어떻게 하죠? 자기는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죠. 끙. 어려운 문제에요. 고쳐야할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집도 세요. 고치려 들질 않죠.
(저도 고집이 세요!!)


저는 뭐 이런 인간이 다있나 싶어서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위에 댓글다신대로 '취향'의 차이일수도 있는지라, 제가 좋아하는 한 친구는 제가 멀리하고 싶어하는 이를 굉장히 좋아해요. 이건 뭐 어떡해야할지.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건 제 안에 자리잡은 본능적 시기심인걸까요?

플레져 2009-03-08 23:50   좋아요 0 | URL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때로 좋으면 어떻게든 알기도 한다. 나로 말하자면 언제나 운이 좋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이곳에 왔을 리가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중에서...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타타타> 김국환 노래 중에서...

나쁜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일거란 생각이 저 글을 쓴 후에야 퍼뜩 스치더라구요. 내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찾는게 더 나을 거 같아요. (저도 고집이 세요!! 그러나 언제 고집을 부렸는지 잘 기억이 안나요 -_-;;)

다락방님의 시기심이라기 보다는 못마땅함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 조금 가벼운 배신감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희망적인 건 나와 맞지 않는 사람보다 나와 맞는 사람이 내 가까이에 있을 확률이 더 높아요. 이 부분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믿음이 맞을거라고 고집부리는 중입니다...ㅎ

2009-03-09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9 17: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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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서관에 가야겠다. 오랜만에. 점심은 도서관 매점의 쫄깃한 라면으로 때워야지. 루이보스 티를 우려서 보온병에 담고 새로 산 두툼한 레깅스에 털 안 빠지는 아크릴 니트를 입고 구두굽 소리가 적게 나는 부츠를 신어야지. 이게 얼마만의 도서관 여행인가!

아뿔싸. 오늘은 월요일이다. 도서관 휴관일.
문제는,,, 지난주 월요일에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거다.
월요일만 되면 도서관에 가고 싶다. 닫힌 도서관의 문을 거침없이 열고 밀린 문학잡지들과 오늘의 신문을 보면서 야금야금 활자들을 잡아먹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는데. 쩝.

 

2. 이십년지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초중고 동창생. 초등학교때는, 아니 국민학교때는 얼굴만 알던 동네 친구였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걔가 걔라는 사실만 알았을뿐 같은 반이 되기 전까지는 알면서도 모른척 지내던 친구였다. 같은 반, 앞 뒷자리에 앉자마자 그간의 모른체를 만회라도 하는 듯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친구는 늘 공부 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고 나는 친구를 따라 독서실을 따라가곤 했다. 친구는 모 투자신탁 차장. 나는 나. 우리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의 자리를 부러워하고 이 몸으로 죽을때까지 살아야 하니 건강하게 돌보자는 다짐으로 한 시간의 긴 통화를 마쳤다. 친구도, 나도 늙어가고 있다.

 

3. 영화 & 영화



사랑후에 남겨진 것들 & 어웨이 프럼 허. 두 영화는 쓸쓸하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집스러운 남편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아내가 다른 도시에 사는 삼남매 집에 방문하는 것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이미 자기 가정이 있고 자기 방식의 생활 패턴을 갖고 있는 자식들은 부모를 짐으로 생각한다. 세계 어느 곳이나 자식들은 살아있는 부모에게 냉담한가. 문득 손가락을 깨물고 싶어졌다. 아내는 일본의 그림자 춤 부토 무용수였으나 남편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그 춤을 꿈꾸었고 사랑하는 막내 아들이 근무하고 있는 일본에 갈 날만을 기다린다. 그녀는 문득 세상을 떠나게 되고 혼자 남은 남편은 일본으로 떠난다. 아내가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일본에서 부토 춤을 추는 18세 일본 소녀를 만난다. 부토 춤을 추는 덩치 큰 늙은 사내의 행보는 지금 부터다.

어웨이 프럼 허, 의 감동은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단연코 첫번째다. 영화를 본 날이 여름, 어스름한 주말 오후였던 것을 기억한다. 치매에 걸린 아내, 아내는 치매라는 세상에서 다른 환자를 돌보고 사랑에 빠진 듯 보인다. 그걸 지켜봐야 하는 남편의 마음은 사랑을 잃은 자의 표정과 같다. 그러니까 치매는 우리와 조금 다른, 어떤 세상이다. 요양원에 모셔야 하고, 자식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린다는 치매와는 다른,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될 세상이다. 사랑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세상이 치매다.

 



지난 여름, 언니 가족과 춘장대 해수욕장에 다녀왔다. 몹시 더운 날이었고 갑작스레 폭우가 친 날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유소는 정전이 되어 카드 단말기가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날밤, 심심한 가족들에게 중앙역, 을 보게 하였다. 14살, 18살이 끼어있어서 영화를 고르는게 쉽지 않았다. 이미 여러번 본 영화였으므로 나는 소파에 누워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영화 끄트머리에 눈을 떴을 때 언니 가족은 지쳐보였다. 그래도 끝까지 이 영화가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집과 아집에 지쳐 보이는 도라는 조슈에라는 소년을 만나고 소년의 불행에 본의아니게 뛰어들게 되고, 소년의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 소년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함께 모험한다. 결말은 짐작 가능하다. 소년과 나이든 여자의 만남은 가족 만들기의 전형이다.

이스라엘 영화 누들, 은 독일 영화보다 좀 더 거칠다. 히브리어의 투박함이 독일어를 외려 부드러운 언어로 보여주는데 인물들 사이의 대화나 표정, 제스처들이 쎄다. 이 영화는 모두 날이 선 상태의 사람들에게 집착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쩌다 떠맡게 된 중국인 꼬마의 집찾기, 엄마 찾기가 시작된다. 중앙역의 도라처럼 누들의 미리도 고집과 아집, 상처로 범벅된 인물이다. 화해라는 목표지점에 이르기까지 중국인 꼬마의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엄마를 찾을 것 같은 실낱같은 희망을 보게 되었을 때 중국인 꼬마 누들은 미리와 미리의 가족들에게 젓가락 사용법을 호기롭게 가르친다. 엄마라는 배경은 그렇게 힘이 세다. 가족이란 배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포뇨와 렛미인의 유사점은 없는듯 보이지만, 3초만 더 생각하면 금세 알 수 있다. 아기 물고기와 뱀파이어. 그들과 사랑에 빠진 소년들. 물고기는 변신하여 소년의 세계로 들어간다. 뱀파이어는 소년과 함께 열차를 타고 칙칙폭폭 미래로 나아간다. 어쨌든 해피엔딩. 포뇨는 목소리가 너무 귀엽다. 포뇨가 몸 담았던 초록색 양동이도 너무 귀엽다. 물에 빠진 세상은 생각보다 살 만하다. 모험과 호기심이 산소라도 되는건지 마냥 신나는 아이들. 그런데 언제부터 일본 아이들도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엄마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일까. 소스케가 엄마를 찾으며 엄마의 이름, 리사를 부르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만약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뱀파이어에게 나를 아주 세차게 차버리던지 아니면 나를 얼른 뱀파이어로 만들어 같은 종족의 선상에 서게 하던지 하라고 채근할 것이다. 그런데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나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징징거림일지도 모른다. 감동한 부분은 그 노인이다. 뱀파이어에게 마지막 피까지 헌사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그 노인. 마지막 내 남은 핏방울로 너를 살게 한 사랑이란, 두렵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상대의 악조건 혹은 불편한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것,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사랑, 참 어렵다. 순수한 사랑은 더더욱 어렵다. 그런 나이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나는 그런 사랑에 빠질까봐 두려워했다는 걸, 한 해가 저무는 시점에서 수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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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12-22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패션스똬일을 머리속으로 생각만 하셨나요? 아니면 다 실체화 시킨다음에 아치 월요일! 하셨나요?
2. 전...도서관에 가서 책을 본적이 전무합니다. 열람실에서 공부만했던 기억이..(피 튀기는 자리싸움은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3. "바시르와 왈츠를"도 시간이 되시면 한 번 봐주세요~~

플레져 2008-12-22 19:37   좋아요 0 | URL
1. 머릿속에서 완성! ㅎㅎ
2. 책 빌리는 재미도 좋구요, 구입한 신간 목록 훑는 재미도 있구요, 미처 못 본 책들 구경하는 재미도 좋아요 ^^
3. 아. 그럴게요! 정보 감사!

비로그인 2008-12-23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ET ME IN과 AWAY FROM HER, 제가 올해 건진 BEST입니다.(쓰고나니 영어 남발이로군요!) 아직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이 나요. 활짝 웃던 젊은 여자와 늙어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 어디서 난 돈이냐고 묻는, 거들먹거리는 무시하는 표정과 그 앞에서 무안해하던 초자연적인 여자아이의 얼굴.

플레져 2008-12-23 19:10   좋아요 0 | URL
막차에 올라타듯 렛미인 마지막회 상영을 보고 왔더랬어요. 햇살이 내리쬐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비슷한 날씨였죠. 무서운 장면은 좀 손가락을 가리고 보기는 했지만 안보면 참 억울했겠다 싶은 영화. 그런 영화를 만나는 재미가 관객의 재미겠지요 ^^ 초자연적, 이란 표현 딱입니다. 역시 주드님.

다락방 2008-12-2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웨이 프롬 허는 저는 별로였는데 Jude님과 플레져님에겐 베스트로군요. 그나저나 저 누들은 저는 다른 시각에서 좋았어요. 마지막에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고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고 나면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다른 생활이 행복하게 시작되느냐, 하면 그게 아니잖아요. 돌아가도 어김없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남아있죠. 바로, 형부요. 이제 형부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남자로서 드러낸 그 속내를.

같이 보던 동행은 울었어요, 누들을 보고.

이 근사한 페이퍼안에 누들이 있어서 반가운데요!
:)

플레져 2008-12-23 19:13   좋아요 0 | URL
미중년에 가까운 남자 배우의 외모가 몹시 맘에 들었던 탓도 있습니다 ㅎㅎ 나이든 남자의 얼굴이 다 그러했으면 좋겠단 생각도 했지요 ^^ 저두 누들 보고 울었어요. 눈물이 나올 줄 몰랐는데 뒤통수치듯 멍...해지더니 가슴에서 먼저 눈물이 흐르더라구요. 형부는 아무리 그래도 언니에게도 올인할거 같아요. 언니 캐릭터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연연할줄 알기 때문에 형부를 놓아주지 않을거 같아요. 우유부단한 형부는 기다렸다는듯 다시 언니에게로 고고씽... 하지 않을까 ^^

2009-01-16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