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열고 들어오다 늘 그랬듯 오른쪽 책장에 시선이 멈췄고, 무릎 쯤 닿는 거리에 꽂혀있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그 위로는 편애하는 일본 소설들이고 왼쪽에는 시집과 에세이, 오른쪽에는 국외 소설들이 거주하고 있다. 가끔 한눈에 들어오는 책들이 있으면 '그냥 꺼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읽는다. 서점 바닥에 앉아 책 읽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요즘엔 동경만경이 꽂혀있는 칸의 책들이 자주 눈에 띄고 주로 그 책장에서 하나둘씩 불러내어 무작정 내 놀이 상대로 맞이한다. 지난주엔 가와카미 히로미의 선생님의 가방이 생각나 꺼내 읽고, 내친김에 만화도 읽었다. 체온계가 장착되있는 것처럼 선생님의 가방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그 세계에 압도 당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로 스르르 스며들어가는 것 같다. 그런 느낌 때문에 서점 바닥에 앉아 책 읽는 놀이를 하듯 무작위로 꺼낸 책을 책상으로 모셔오곤 하는데 동경만경도 그랬다. 사랑이 언제 끝났죠? ... 정말 모르겠어. 라는 대사가 압권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일식> 을 인용하는 미오는 닿을듯 말듯하며 연인으로 지내는 료스케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인터넷 미팅 사이트에서 만났다. 시작이 그랬기 때문인지 둘은 연결되있지만 쉽게 연결을 끊고 지내고 접속한(=만난) 순간에만 뜨겁다. 사랑하는데, 먼저 사랑한다고, 죽도록 사랑하니 나와 같이 죽자 살자 하며 사귀어보자는 말은 판도라의 상자인듯 꺼내지도 못한다. 헤어지는 게 두려워서, 헤어짐 이후의 이별을 홀로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이게 사랑일까 하는 의심에 혼란스럽다. 낯선 서로가 만나 말하고, 웃고, 나누고 하는 일들에 공허를 느끼고 있다. 지금 웃으면 뭐해, 금세 헤어질걸. 지금 사랑하면 뭐 해, 난 결국 혼자인걸. 새로운 기기 발명이나 편리한 삶의 도구들은 새로울 것도 없는 시큰둥한 일상이 되어버렸고 독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 이슈가 되지 않는 세상에 살다보니 외려 내 삶이 이상하게 외로워져 버렸다. 내가 그에게 접속하지 않는 순간, 나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없는 것 같은 이상한 외로움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접속할 때만 연인. 사랑이 언제 시작됐지? 정말 모르겠어. 미오도 료스케도 대답은 회피하고 있다. 한때 친구들을 만나는 게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잘 만나 놀고 헤어져 돌아설 때의 느낌이 애인과 헤어지는 것처럼, 때로는 그 이상 막연히 쓸쓸했다. 애인이면 결혼이라도 하지 친구들과는 결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마음을 많이 빼앗긴 탓이었다. 이럴때는 제도권이라는 영역이 감정을 다스리는데는 괜찮은 것 같은데 미오와 료스케는 결혼은 커녕 사랑이야? 아니야? 로 밀고 당기고 당기고 밀고 있다. 그 말을 과연 누가 먼저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물음표가 많아지면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성격을 의심해봐야 한다. 사랑의 초입은 단순하고 무지막지한 구석이 있어서 사랑한다면, 일단 밀고 들어가버린다. 우왕 좌왕하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일시적인 강렬한 감정일 수 있다. 망설여지면 사랑하지 마세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멋있고 좋았나 싶게, 참 좋다, 고 잠깐 생각했다. 얘네 둘, 끝까지 이런다. 끝까지 막연한 감정을 시험한다. 긴자에서 만나기로 했던 두 사람은 서로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는다. 다음날 도쿄만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근무처에 있던 두 사람은 통화를 하며 서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끊임없이 서로를 탐색만 하던 미오와 료스케. 료스케가 미오에게 말한다.

 

"음, 만약에 말야, 지금 내가 여기에서 그쪽까지 헤엄쳐서 널 만나러 간다면...... 내가 너한테 싫증이 날 때까지 계속 내 곁에 있어줄래?"

"그게 머야. 너무 좋은 조건 아니야?"

".......자 그럼, 만약 내가 지금, 바다로 뛰어들어 도쿄만을 헤엄쳐 너에게...... 미오가 있는 곳까지 간다면, 날...... 끝까지 좋아해줄 수 있겠어?"

료스케의 말이 선명하게 미오의 귀에 와 닿았다.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뭔가가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를 '미오'라고 불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좋아. 만약 정말로 료스케가 거기에서 여기까지 헤엄쳐 건너오면 끝까지 좋아할게."

미오는 일부러 진지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약속 장소에 동시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필연같은 우연으로 느껴져서인지 료스케는 대담한 제안을 하고 미오는 대담하게 받아들인다. 대담한 실험이 없이는, 목숨과 불가능을 걸지 않고서는 빠지기조차 힘들어진 엘오브이이. 이것이 이별을 대신하는 프로포즈라면 씁쓸하지만 받아들이겠다. 때로는 이별이 사랑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사랑 고백이라면, 같이 헤엄칠 준비를 해야지. 그게 사랑 아니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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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1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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