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이가 은사님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나도 은사님께 느꼈던 바를 어떤이는 정갈하게 다정하게 적었다. 어떤이의 글에 비친 은사님은 청년이다. 오늘은 꼭 안부 전화를 먼저 드려야겠다.

지난 여름, 은사님은 여행을 하시던 중 내게 문자를 보냈다. 제자의 안부를 묻는 은사님의 바다가 그 깊은 연륜이 평화로워서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윗사람에 대한 공경심과 어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공경심보다 어려움이 몇 배는 더 크다. 윗사람과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되도록이면 그분들과 거리를 두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은사님과 먼 곳에 앉아야 편하고, 은사님과 두 번 정도 눈을 마주치는 정도가 편하다. 그 후로 은사님의 문자를 두어번 더 받았다. 나는 먼저 문자하는 것조차 은사님을 방해하게 될까봐 꺼려하고 있었다. 좋은 뜻으로 말하자면 은사님의 시간에 나의 문자가 모난 조약돌이 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말씀드려야 할 일은 메일을 보냈고, 간혹 전화를 드려야 할 상황에서는 바른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은사님과 전화 통화를 끊고 난 후엔 진땀이 나곤 했다. 지난 봄엔 은사님과 홍대앞 술집 노천에서 맥주를 마셨다. 은사님이 농담을 즐기고 (때로는 썰렁한 농담이었는데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제자들의 기를 세워주셨다. 그건 진짜 애정한다는 뜻이었다.  

문득, 은사님에게 혹은 윗사람들에게 나의 태도가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껏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에게, 두 팔을 벌린 사람에게 긴장하고 있는 태도는 예의 바름이 아니라 과잉 방어로 읽힐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시 어떤이가 쓴 은사님의 글을 읽는다. 은사님의 글도 읽는다. 거기에는 맑은 가을이 들어있다. 모카 브라운 느낌의 맑은 가을.
 



부디 - 심규선 (with 에피톤프로젝트)

오 부디 다시 한번나를 깨워
오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다시 나의 손을 잡아줘
이제 잡은 두 손을 다신 놓지마
제발


심규선에게 이런 고음이... 높고 화려한 계단이 있었다니. <선인장><꽃처럼 한철만 사랑해줄껀가요> 에서 들리던 음색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나는 파워 워킹을 하면서도 이 노래만 들었다. 아파트 로비를 통과할 때 오오- 부디-- 다시 한 번 나를 안고-- 오오-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우리 사랑했었던 날들... 노랫말이 가슴에 팍 꽂혀 도미노처럼 손에 힘이 풀렸다. 엘리베이터를 놓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뉴욕, 홍대 카페를 탐험한 <카페 탐험가>는 자유롭다. 뉴욕에서 짧은 기간 체류하며 카페를 순례했던 저자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각자의 일을 돌보는 뉴요커들이 왜 카페에 모여드는지는 예측한다. 좁은 공동주택에서 룸메이트와 공간을 나눠 쓰는 불편함이 그 이유다. 소음과 불편함 때문에 그들은 카페에서 자신의 일을 돌본다. 미드 <드롭데드디바> 에서 로펌의 변호사 킴이 해고를 당한 후 노트북을 펼친 곳은 카페다. 킴의 주위에는 킴처럼 홀로 테이블에 앉아 작업하는 이들이 비쳤다. 그런 풍경은 우리 동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담소하는 테이블과 일인 테이블이 공존하고 있다. 카페에 노트북 가방을 들고 들어가면 주인들은 '노트북 하기 좋은 자리'로 안내하니까. 소음 속에서 떠나는 나만의 시간은 묘미가 있다. 담소 테이블과 일인 테이블 사이에도 확실한 경계가 있다. 서로에게 방해되지도 방해하지도 않음. 우린 아주 개별적임.  

   
  커피가 단지 기호품 이상이 되면서, 카페에 가는 일도 일상이 되었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카페에 간다는 건 옛말이 되어버렸다. 아픈 다리를 쉬기 위해 혹은 책을 읽기 위해 그리고 당연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 우리는 카페로 간다. 카페는 단지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다. 커피를 매개로 하여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공간이며 문화를 누리는 곳이다.

카페는 내가 누리고픈 공간인 동시에, 일상의 남루함이 파고들 여지가 없는 환상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일상'을 찾아 카페의 문을 여는 것이다.

<카페탐험가>
 
   

 

<생각의 일요일들>은 일과가 끝난 후 침대에 누워 읽었다. 스탠드 불빛과 라디오가 동행했다. <타인에게 말걸기> 라는 소설집을 갖고 있는 은희경은 이제서야 타인들에게, 독자들에게 육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커피, 이야기는 이 책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품이다. 커피콩을 갈다...라는 행위로 작가는 하루를 열고 소설 작업을 시작한다. 어느날의 커피는 노동 후의 마무리로 일단락된다. 최근에 본 장면은 명절이었다. 며느리들은 온갖 일들을 다 끝낸 후 달달한 커피 믹스를 마셨다. 환경을 생각하며 아크릴 수세미와 천연 세제를 사용하지만, 커피를 마실 때만큼은 일회용컵을 사용한다. 그 순간만은 설거지에 대한 해방을 만끽해야 한다는 뜻으로.  

시애틀에서 쓴 작가의 글을 읽다가 <카페 탐험가>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렸다. 시애틀은 흐린 날씨와 높은 강수량 덕분에 커피 소비가 많은 도시라고 한다. 그곳에서 커피 문화, 커피 전문점이 발생한 건 괜한 우연은 아닌 것이다.  

   
 

비가 많이 오는 도시. 
자살률도 가장 높지만 독서율도 최고랍니다.
삶의 양쪽 날을 생각해보게 되는 흐린 날이네요.  

<생각의 일요일들>

 
   

시애틀, 커피...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탕웨이, 현빈의 <만추> 마지막 장면. 여자의 앞에는 유리 머그잔에 가득 채운 커피가 있다. 유리 머그잔은 두툼하고 꽤 크다. 커피는 가득 찼다. 엔딩 크레딧에 그 커피의 존재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던 건 그 커피의 존재감이 무지 컸기 때문이다. 아직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 에는 긴 기다림이 스며있다. 그가 올 것인지 오지 않을 것인지는 커피만이 알고 있다는 듯이.   

 

 
 좋아해  - 요조, 김진표.
 정말 좋아해 차가운 녹차맛 아이스크림  
 문득 떠나는 하루짜리 짧은 여행
 햇살 좋은 날 무심코 들어선 미술관
 그리고 너의 곁
 어떻게 지낼까 정신없이 살다가도
 거짓말처럼 보고싶고 그래
 너의 곁에선 하루가 참 짧았었는데
 기억하니  

요조의 음색은 가을 초입과 잘 어울린다. 이렇게 귀여운 노래를 부르며 가을로 들어간다. 가끔은 흥얼거린다. 오랜만에 노래 가사를 다 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우연치않게 들른 노래방에서, 아무도 작정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기어들어간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저 잔에 담긴 물처럼 - 박솔

 저 잔에 담긴 물처럼 나 그렇게 내 안에 담겨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저 잔에 담긴 물처럼 나 그렇게 너의 안에 담겨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심규선의 노래처럼 멋진 고음이 있다. 한동안은 조용하고 나긋한, 읊조리는 노래가 참 좋았다. 목청껏 내질러주는 노래, 매미처럼 사력을 다해 부르는 노래, 마음껏 높고 화려한 계단을 올라가는 노래가 귀에 쏙 들어온다. 그래서 박솔의 노래는 깔끔하고 듣고 있으면 동작을 멈추고 어딘가를 멀리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가을이 깊어간다는 뜻이다.    

9월 19일 월요일 새벽 5시 55분,우리 동네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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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9-2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플레져님. 플레져님도 심규선을, 부디라고 말하는 그 음성을 들으셨군요!

플레져 2011-09-22 11:18   좋아요 0 | URL
들었어요!
음 이탈이 아닐까,
연극 배우의 진지한 방백처럼 들렸어요- ㅠㅠ

stella.K 2011-09-2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나도 윗사람을 어려워하긴 하는데
그분으로선 그게 또 부담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은 영이 있어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안다잖아요.
플레져님은 저를
.
.
.
.
.
.
.
좋아하는 거 다 알아요.ㅋㅋ

플레져 2011-09-22 11:31   좋아요 0 | URL
오오- 들.켰.구나-ㅎㅎ

서툴러도, 실수해도 어려워하는 기색을 탈피해야겠어요.
또, 부담은 늘어만가고..:)

프레이야 2011-09-22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새벽하늘!!!
가을은 깊어갈 것이고 은사님에 대한 플레져님의 긴장은 조금씩 풀어지길 바래요.
(저도 사람에 대한 긴장을 잘 못 푸는 편이지만 그러다 느낌 받으면 난데없이 풀어져
속 다 보여버리는 헛똑똑이라지요.ㅎㅎ)

플레져 2011-09-22 20:10   좋아요 0 | URL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내일 다시 해야겠어요 ㅎㅎ 여전히 긴장은 바짝 조인 벨트처럼 풀어지질 않으니 어쩜 좋을까요.

2011-09-22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2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9-22 22:21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ㅎㅎㅎ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 플레져님^^

2011-09-22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3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1-09-2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가을이 깊어지는데....여름에 날뛰셔야 할 모기님들이 참 가을까지 부지런하게 극성인 요즘입니다. 더불어 참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일들이 첩첩산중이라 그런지 계절이 오던지 말던지한 요즘이네요...ㅋㅋ

플레져 2011-09-23 22:25   좋아요 0 | URL
잘 될거에요 메피님.
걱정 뚝! 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셔요 ^^

2012-02-01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햇살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낮은 어둠이 깔려있을때, 문득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진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오전의 전부. 9시부터 11시 57분까지. 그 사이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야무지게 먹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더 풍요로운 오전 시간을 갖고자 좀 더 일찍 일어난 적도 있으나 내가 왜 이리 일찍 일어났을꼬...하는 엉뚱한 상념으로 두어시간을 흘려보냈다.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시간의 아량은 2시간 57분이다. 2시간 57분 안에 대단한 일을 저지르고 싶어 종종거리기도 하는데 대개는 가만히 앉아 시간의 흐름을 애써 잊고 있을 뿐이다.  

아침부터, 실은 어젯밤부터 심보선 시인의 시를 읽느라 잠을 설쳤다. 아침형 인간이 자정 넘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불면 혹은 감상 (독서와 영화). 요즘엔 되도록 침대에 일찍 누워 이웃집 아이가 잠들기 전 책상에서 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의자를 질질 끌어 당겼다가 책상으로 밀어넣는 소리는 밤의 낭만인 것만 같았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로 한동안 나의 계절과 밤과 무력한 오후와 생기발랄한 점심을 사로잡았던 시인은 새 시집을 들고 불쑥 나타났다. 기별이라도 하지 그랬수, 라고 친숙하게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지만 시인과 나는 멀다.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울지도. 여섯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심보선 시인의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을 읽는다. 나만의, 어떤 즐거움의 묘미를 발견하고 싶어서 뒷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발문, 시집의 해설을 쓴 이의 이름이 띠용- 하고 눈에 밟혔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것처럼, 물컹물컹 촉감을 느끼는 것처럼 발문을 쓴 이가 잠시 심보선 시인을 멀리하고 (미안해요, 시인이여!) 예쁘장하게 나타났다. 심보선 시인보다 먼저 좋아했던 (애정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볼까나~) 진은영 시인이다. 진은영 시인이 심보선 시인의 시집 발문을 썼다! 시인들이 어떤 연유와 어떤 시스템으로 발문을 써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내게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나는 심보선 시인과 진은영 시인과 동시에 소개팅 하는 것처럼 (혼성 소개팅이라니!) 둥둥둥 두근거렸다.   

 

   
 

 심보선과 부자 아버지를 갖는 행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세상에서 제일 큰 저택을 구입할지도 모른다. 너무 커서 옛 연인을 초대해도 그 저택 안에서 결코 마주치지 않을 만큼 넓은 집. 그곳에서 가장 크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 몰래 망원경으로 살펴보면 그녀가 그와 사랑을 나누던 시절만큼 아름다운지, 아직도 무화과를 즐기는지 관찰할 수 있는 그런 집.  

  그렇지만 우리들의 진짜 아버지는 너무 가난해서, 혹은 유산 없이 돌아가셔서 우리는 그런 저택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거야. 낭만적으로 빛나는 장식과 가구 같은 말들로 채워진 언어의 저택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거리에서도, 허름하게 부서진 건물 안에서도 만나 연인이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하고 슬퍼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 우리가 최근에 알게 된 가장 가난한 이는 모리스 블랑쇼였다. 그는 언어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상실하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난했다. 그가 내린 문학의 정의 속에서 시인과 독자는 전 재산을 탕진하는 도박꾼처럼 모든 것을 잃는다.  

- 진은영의 발문 도입부-

 
   

 

<연보(年譜)>

나는 소설책보다는 시집이 더 좋아
나는 시보다는 작가 연보가 더 좋아
나는 언제나 무덤에 가까운 쪽에 매혹되니까  
(중략)

심보선의 시는 살아있음의 반대, 죽음의 연대와 하릴없는 혹은 할 일이 있으나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연한 시선으로 가까운 것, 먼 것을 그저 바라보며 조우하고 있다. 침울하고 우울한 죽음의 연대가 아닌 나의 일생이 쌓인 과거들의 집합소인 소멸이다. 상조 회사의 광고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지나온 생애의 누적된 일상, 상처와 노래 혹은 쓸모없이 지나버린 어느날들의 기록으로서의 엔딩 장면, 내가 지나온 과거다.  

<음력>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 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나는 그때 나의 이름을 어렵게 기억해내어
나에게 말했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야.
내일은 음력으로 모든 게 잊힌 과거야.
(중략)  

  

심보선 시인을 읽던 밤, 문득, 내가 아는 보선이가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보선이는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보선이는 덩치도 크고 키도 큰, 예쁘지 않은 부잣집 딸이었다. 나의 사춘기 시절엔 부잣집 딸은 무조건 이뻐야 한다는 편견이 지배하고 있었다. 보선이가 부잣집 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보선이는 가끔 생선 냄새를 풍기며 학교에 왔다. 나는 보선이의 부모가 찰진 진흙 밭에서 꼬막을 캐어 학교를 보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보선이의 감색 교복 재킷은 청결하지 않았다. 체크무늬 교복 치마는 풍성하고 비루했다.  

그리고 어느날, 10년 만에 보선이를 만났다. 보선이가 졸업 앨범 주소록에서 우리 집 전화 번호를 보고 연락을 해온 거였다. (10년 사이 이사하지 않은 나, 전화 번호도 바뀌지 않은 내가 어떤 유물처럼 느껴졌다) 보선이를 대학로 예일디자인학원 지하 에스프레소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에스프레소 카페의 단골이었다. 너른 실내는 나무 판자 바닥으로 깔렸고 짙은 네이비 2인용 소파와 짙은 초록색 테이블이 있었다. 아르바이트 생은 자주 바뀌었고 주인은 커피 리필에 관대했다. 진한 커피를 추출하던 정통 커피 전문점은 내 또래 아이들의 아늑한 아지트였다. 여러 개의 쇼핑백을 들고 와 쉬어가는 그녀들이 있었고, 지금은 죽어도 할 일이 없다는 게으른 표정의 그들이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곳에서 스터디를 하기도 했고 남자친구들을 만났으며 미래를 걱정했다.   

그 곳에서 10년 만에 보선이를 만난 건 위치 설명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보선이를 나의 세계로 무작정 데려와도 될까 하는 망상은 금세 거뒀다. 보선이도 나처럼 미래를 걱정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보선이는 중국 청도에서 유학중이라고 했다. 보선이는 가사 도우미와 함께 살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며 자랑했다. 내가 보선이와 친했던가. 보선이를 만난 후 보선이와의 친분 정도를 가늠하다니. 보선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껏 멋을 낸 보선이와 아저씨들의 구겨진 셔츠 주머니에서나 나올 법한 구겨지고 허름한 담배갑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빨리 보선이와 헤어지고 싶었다. 청도에서 삼각관계에 휘말려 멋진 사랑을 했다던 보선이의 연애와 그 허름한 담배갑은 어울리지 않았고 보선이의 고백마저 거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결국 그날 나는 보선이의 술 한 잔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선이는 검은색 벨벳 재킷에 검은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검은색 스타킹,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재킷에 받쳐입은 흰색 블라우스가 보선이의 마지막 순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보선이는 그 구겨진 담배갑을 검은색 가방에 넣고 청도에서의 러브스토리를 다 들려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나를 보내주었다.  

여전히 나는 의문이다. 보선이와 내가 친했던걸까. 보선이는 왜 그날 내게 연락을 했을까. 나는 왜 보선이를 만나러 갔던 것일까.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내가 아는 보선이와 심보선 시인은 아주 다르다. 그건 아주 자명한 일이지만 보선이와 아주 헤어진 것만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구겨진 담배갑을 (아! 정말 그 담배갑은 몹시 초라했다. 겨우 종잇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초라하고 누더기 같을 수가 있는지) 가방에 넣고 다니는 건 아닐까. <이 별의 일>에 기대어 보선이와의 질긴 기억을 '멸망' 모드로 기록하고 싶다. 그날, 보선이의 화려한 삼각관계에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언제나 누구에게든 말하는 입 보다 듣는 귀가 발달한 사람이고 싶었다. 비록 늦었지만, 늦게 보선이에게 이르는 말, 그때 넌 참 예뻤어. 주머니에 금화가 가득한 부잣집 딸처럼 풍요로워 보였고 깔끔했어. 나는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시인의 시를 읽으며 지내. 너는 어떻게 지내니? 졸업 앨범의 나의 주소록과 전화 번호가 바뀐 것처럼 나도 많이 변했어. 변했을 거라고 생각해. 너도 변했으리라 상상하며, 어두운 하늘에서 별이 초롱하게 빛나는 것처럼 너도 별처럼 빛나고 있기를.  

 

<늦잠>  

별은 어둠의 미묘한 순응자.
시간이 닦아놓은 밤의 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는 젖은 흙 위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잘 익은 사과 맛이 나는 발자국들을 찍으며.

나의 어느 쪽 귀에 더 많은 속삭임이 고여 있을까? 
내가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자는 쪽의 반대편.
당신이 메마른 숨결의 흰 가루를 떨어뜨리는 그 움푹 팬 곳.  

새벽의 결정, 입술에서 이슬로 옮아간다.
금화를 세어본 적 없는 당신의 손.
언제나 잘못된 시간의 열쇠를 아침에 건넨다. 

등 뒤에서 당신은 나지막이 묻는다.
"지금은 몇 시죠?" 

나는 생각한다.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눈동자를 이어주는 흙길.
녹슨 나침반의 떨리는 북쪽.  

오전 열 시. 
이제 일어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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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9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9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8-21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보선 시인이 아닌 플레져님의 보선 이야기가 잔잔하니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네요.
어디선가 별처럼 빛나고 계시겠지요. 님처럼요.^^
'눈앞에 없는 사람'은 급관심 가는 시집입니다.

플레져 2011-08-22 15:30   좋아요 0 | URL
불현듯 떠오른 그녀가 오늘도 행복하기를 기원해요...
날이 서늘해졌어요. 여름 감기, 가을 감기 조심하세요 :)
 

 1950년대 대한민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살인병기가 되어버렸다. 이유를 묻는다는 건 고귀한 질문. 그저 따라야만 하는 미친 상황에서 그들이 찾은 해법은 나의 동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것. 살아서 만나게 된다면, 그순간을 진정 맞이할 수 있다면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상대를 향해 공격하리라.  

자존심을 세워야 할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누군가의 생명을 빌미로 자존심 싸움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해야만 했던 그 시절,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지도에 선 긋기를 하며 머리를 쓰진 말았어야 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되어버렸다.

영화의 젊은 군인들 과거 이력은 아주 조금 짐작할 수 있다. 수혁(고수) 은 어눌하고 순진한 이등병이었다. 다른 이들 역시 그와 비슷할 것이다. 이제 막 세상을 알아야 할 나이었고 자기의 삶을 꾸려가야 하는 출발선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무엇을 했는지는 전장에선 중요하지가 않다. 그들은 처참할 정도로 살인 병기가 되어 움직여야만 했는데 그들 중 전쟁이 원하는 인물이 되버린 사람은 수혁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 싸운다. 거기엔 상하 명령이 중요하지 않다. 수혁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안다. 지도를 펴놓고 이쪽은 우리 땅, 저쪽은 니네 땅 하며 자존심 싸움을 벌일 때,  전쟁을 하는 이유에 대해 수혁이 찾은 해답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에서는 좀 더 새로운 전술이 도입되었다. 전투기 폭격으로 먼저 초토화시킨 다음 진군하는 작전이다.  185쪽.  

그러나 전쟁은 1951년 봄에 끝났어야 했다. 아니면 늦어도 정전협상이 시작되는 시점에서는 끝났어야 했다. 또는 1951년말, 한 달간 임시 휴전이 성립되었을 때 끝날 수도 있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모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기 위해 무려 159회의 회담이 열렸다. 그동안 쌓인 정전회담 관련문서만 해도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회담 기간 내내 양측은 누가 정전회담 기간중의 약속을 위반했는가를 놓고 줄곧 싸웠다. 276쪽.  


회담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싸움이 오가는 동안, 남 북한군과 유엔군, 그리고 중국군의 젊은이들은 38선 주변의 고지 위에서 수없이 다치고 죽었다.  277쪽.

 

오래전 어떤 인연으로 외국인 친구와 잠깐 교우한 적이 있다. 그녀는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었으면서 문득, 우리나라의 작가들이 분단국가에 사는 만큼 그 이야기를, 전쟁 이후의 삶, 전쟁 중의 삶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겪지 않았으므로 잘 모르겠다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부끄럽게도 그건 내 부모 세대가 겪은 일들이고 나는 관심 밖의 일이라는 생각만, 혹은 아무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저 웃고 말았다. 한참후에 그것 아니어도 지금은 너무 견디기 힘들다는 변명을 찾아내곤 흐뭇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나의 부모는 한국전쟁 당시 어린이였다. 엄마는 가끔 한강 다리를 건너고 난 후 다리가 폭격되어 뒤를 돌아볼 수조차 없었노라며 회상했다. 하도 많이 들은 이야기여서 이골이 나기도 하는데 엄마는 티브이에서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만 보아도 그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내가 알지는 못하였지만 알아야 할 이야기들과 조우한다. 방관 이나 외면 모드로 일삼기엔 가슴 한 켠이 쓰린 이야기.  

 

올해 3월에 터키에 갔었다. 앙카라 한국 공원에 들렀다. 국사 교과서에서 앙카라 한국 공원을 본 기억이 났다. 그저 부모 세대만의 일이라고 했던 어린 마음이 부끄러워 나는 입을 뗄 수 없었다. 나는 무관심하게 존재해도 내가 속한 땅의 역사와 흔적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공원을 지키는 아저씨는 한국전쟁에서 희생한 군인의 아들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중년의 사내였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 터키 참전 용사들의 이름과 나이를 훑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스물 한 살, 스물 세 살, 스물 두 살... 그 나이땐 몰랐다. 지나고보니 그 나이가 얼마나 어리고 어린 나이인지 이제는 안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가 몹시 얄팍했지만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젊은이로 살아가는 건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게 주어진 현실, 내가 처한 사회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서 나는 움츠러들었고 쥐죽은듯 지냈다. 그러다 문득 내가 할 일을 찾고 그쪽을 향해 뛰어가다보니 어느 정도 움츠린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왜 그들이 젊은이들을 그곳으로 보냈고,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좀 더 가슴이 넉넉해질지도, 시야가 뚜렷해질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알고 지나가야 하는 시절, 살아있는 자의 의무겠지만 그어느때보다 더 젊은 날은 그렇다. 그 시절의 젊은이도 지금의 젊은이도 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면, 어떤 것도 흘려보낼 수 없는 시절이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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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1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8-0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모르는 전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이산가족으로 80세가 다 된 친정아빠의 전쟁통 이야기를 가끔 떠올리는 정도에요. 터키의 젊은이들은 그렇군요.
아빠의 이야기는 대하소설감인데 그걸 그냥 묻혀야하는 (능력이 안 되니) 저는 별로 좋은
딸이 아닌 거 같아요.ㅠ
플레져님 그곳에도 비가 많이 왔나요? 여긴 이제 좀 멈췄어요.

플레져 2011-08-01 22:40   좋아요 0 | URL
서두르지 마시고 아버님의 말씀을 정리해두면 어떨까요?
지인 중에도 아버님의 전쟁이야기를 간직한 분이 있는데
그분도 늘 고민하시더라구요. 그냥 흘리기엔 너무 아깝고 귀하다고.

오늘도 비가 내렸어요. 스콜처럼 화르르 쏟아졌다가 햇빛이 쨍 났어요.
지난주부터 계속 그렇답니다. 지독한 비가 내리는 요즘이에요.

2011-08-01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1-08-0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자로 보아도 이렇게 짠한데 터키에서 마주친 그 젊은이들과 더 젊었을 그들의 흔적을 보는 순간 플레져님은 얼마나 울컥했을까요...

플레져 2011-08-01 22:42   좋아요 0 | URL
활자로만 보았던 전쟁 이후의 느낌을 손으로 만진 것만 같았어요. 아무런 느낌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아저씨를 뵙는 순간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너무 내 생각만 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어머니의 생일에 어머니의 집에 모인 삼남매. 어머니는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날거라는 걸 알고 삼남매에게 그동안 수집한 골동품들을 설명한다. 삼남매는 어머니의 소중한 유품인만큼 절대로 팔지 않겠다는 듯 어머니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하다. 어머니가 살던 집도 처분하라고 했을때 삼남매는 마치 해마다 어머니를 추억하기 위해 들를 것처럼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느날 세상을 떴다. 삼남매는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어머니가 남긴 골동품과 집을 알뜰살뜰하게 등분하여 나눈다.   

여름, 이라는 계절을 하나의 정서로 생각해본다. <8월의 길위에 버리다>를 쓴 이토 다카미는 여름이라는 계절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행동을 유도 한다고 했다. 그동안 움츠렸던 어깨, 구부렸던 등을 활짝 펴고 이제 나도 무언가를 즐기고 느끼고 살아야만 할 것 같은 시간이 여름이 아닐까. 여름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휴가 라는 정당한 쉼의 날들이 다가오는데 그때 우린 미뤘던 인연들과 해후하고, 그들과 즐거움을 만끽하려 한다. 여럿이 함께여야 마땅할 것만 같다. 명절의 의무감이나 책임감 없이 자유롭게 훨훨. 영화의 어머니는 그들의 말랑한 정서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는 듯 골동품의 가치를 설명한다. 어머니는 옳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삼남매가 알뜰 살뜰 유품을 나눴다고 해서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정서, 주검이 나설 소관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테니까.  

 

우리 엄마는 4남매를 낳았다. 가을, 겨울, 여름, 봄에 네 아이를 낳았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한 조각은 아픈 엄마다. 아이를 낳은 산달마다 어미는 아프다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 맞나보다. 오빠와 나는 저녁을 먹고 약국에서 엄마가 늘 먹던 약을 사오기도 했고, 언니들은 엄마를 대신해 소시지와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 밥상을 차리기도 했다. 내가 열살 때, 엄마는 그 해여름에도 아팠다.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엄마는 오빠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생일마다 수수팥떡을 만들어 이웃들에게 돌렸다. 수수팥떡을 정답게 나눠먹던 그 여름밤, 엄마는 결국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가족은 음식과 과일을 싸들고 가까운 계곡으로 놀러갔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가다가 문득 우거진 수풀 사이로 엄마의 얼굴을 보았는데, 핏기라고는 없는 얼굴색, 버석하게 마른 건조한 입술에 풀이 죽었다. 아이는 엄마의 건강과 울타리를 느끼며 자란다고 했던 것처럼 엄마가 아프니 계곡에 놀러가도 신나지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가 계곡에서 물장구치고 장난치는 걸 기꺼이 지켜보며 웃곤했다. 엄마가 노란 참외를 깎아 우리들 입에 넣어줬다. 나는 마치 자양강장제라도 먹은 것처럼 신나게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엄마가 수박을 썰어 우리들 손에 쥐어졌을 때 엄마가 이제 아프지 않은 것만 같아 안심했다. 그날 아빠가 찍은 사진에서 엄마는 4남매처럼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수박 한덩이를 든 둘째 아들은 얼마전 일가를 이룬 아내와 아내의 아들과 집으로 향한다. 어머니는 딸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딸은 호시탐탐 친정으로 들어와 살 궁리를 한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더이상 환자를 볼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가족에겐 무뚝뚝하지만 젊은 시절엔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를 들었던 아버지는 장남이 자신의 대를 이어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장남은 바다에 빠진 한 아이를 구하고 세상을 떴다. 둘째 아들은 우월한 형과 늘 비교 대상이었고,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서글픔을 조금씩 터트리고 있다. 그것은 때로 아이같기도 하지만 유치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아픔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이미 깊은 골과 갈등을 갖고 있는 보통의 가족들.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적나라할 정도로 뚜렷한 인간의 내면과 맞닥뜨린다. 연약한 인간의 육체에 그렇게 단단하고 깊은 감정들이 숨어있다는 건 슬프고 복잡하다. 어머니의 아픈 추억이 깃든 노래, 홀로 분노를 삭히며 듣곤하던 노래 '요코하마'가 울려퍼지던 밤, 아버지는 얼마나 찔렸을까. 어머니는 해마다 장남의 기일에 방문하는, 장남이 구한 소년 (이젠 어른이 된 그) 에게 겉으로나마 관대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분노를 갖고 있다. 둘째 아들이 이제 그만 소년을 불러도 되지 않겠냐고, 소년이 불편해하는 것 같다고 하자 어머니는 말한다. 고통스러우라고 부르는거라고. 미워할 대상이 없으면 너무 괴롭지 않겠느냐며 자식을 잃은 부모의 통한을 나지막이 고백한다.  

이 대목은 가족과 가족이 아닌 자와의 경계선을 드러낸다. 비록 갈등과 골이 패인 가족이지만 그들은 삭히고 감추며 표출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이 아닌 자, 소년에게는 관대할 수가 없다. 그는 내 아들을 잃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결코 세월이 흘러도 내 가족을 잃게 하였다는 죄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잠깐이나마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스물 한살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땐 정말 무지할만큼 나에 대해서 몰랐던 시절이다. 움츠러들지 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야무지게 살았어야 했는데.  

마코토처럼 타임 리프가 가능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아쉬운 게 아니라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저 자주 돌아보는 시절이 아닌가 싶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며칠전에 지나다 그런 글귀를 보았다. 최선을 다해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절망스러운 게 아닌가, 라는 뉘앙스의 글. 그러고보니 나, 요즘 참 최선을 다해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OST가 아주 훌륭하다.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비롯한 주제가들은 청량한 젊은날의 여름처럼 맑고 선명하다.  

 

 곧 8월이다. 뜨겁고 오싹한 (공포와는 다른 허무의 결정체로서의 오싹함) 고딕 소녀의 프랭키는 열두 살. 프랭키이면서 F재스민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소녀는 오빠의 결혼식을 앞두고 세상과 갈등하고 있다. 프랭키가 바라보는 결혼식은 두 사람이 어떤 멤버가 된다는 뜻이며, 어딘가로 떠나 그들만의 세상을 꾸려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랭키는 어떻게든 결혼식에 가고 싶어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프랭키와 늘 밥을 먹고 카드 놀이를 하는 배러니스 아줌마와 사촌 동생 존 헨리리는 프랭키를 걱정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가르치기도 하며 꾸짖기도 한다. 그래도 프랭키는 자신의 뜻을 굽힐 수가 없다. 여름의 풍경을 다양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는 카슨 매컬러스는 <슬픈 카페의 노래> 에서 처럼 허무한 사랑, 허무한 계절, 쓸쓸하고 고독한 정서를 노래한다.  

애어른 같은 프랭키, 혹은 F 재스민은 주옥같은 말만 한다. 주옥이, 프랭키가 좋다.  

"싫어. 왠지 설명할 순 없지만, 라디오를 다시 켜는 건 싫어. 지난여름을 너무나 생각나게 하거든." 

프랭키도 매력적이지만 배러니스 아줌마는 더 매혹적이다.  

"때로 나는 차라리 애초부터 루디를 몰랐더라면, 하는 마음이 될 때가 있어. 너무 응석받이가 되거든. 그리고 나중에 너무 외로워져. 저녁에 일 끝내고 집으로 걸어가노라면 작고 외로운 모과열매 한 개가 맘속에 들어앉는 것 같아. 그런 감정을 삭이려고 말도 안 되는 인간들하고 어울리게 되지." 

배러니스 아줌마는 네 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 아줌마는 지금 한 남자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는 자신을 설레게 하지 않으므로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오빠의 결혼식을 상상하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하는 열 두살 프랭키에게 배러니스 아줌마는 이렇게 말한다. 프랭키가 필요한 건 애인이라고. 그러나 프랭키는,  

"애인 필요없어. 어디다 쓰게?" 
"이 바보야 어디에 쓰긴. 영화를 보여달라고도 할 수 있지, 예를 들면. 이제 너 그렇게 거칠고 욕심많고 우악스러운 행동 좀 고쳐야 돼.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입고, 말도 상냥하게 하고, 행동도 여우같이 해야지."  

배러니스의 매력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그녀는 프랭키가 자신의 드레스에 칭송만을 원하자 '분명 잘못된 것에 대해 좋다고 말하라는 거잖아.' 라며 프랭키를 꾸짖을 줄도 안다.  

프랭키 혹은 F 재스민, 배러니스, 존 헨리의 여름 식탁에 초대 받으면 나도 마음껏 미치거나 이상한 사람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다.  

올 여름에 그들이 식사하는 방식은 늘 이렇게 진행되었다. 잠시동안 먹고 나서 음식들이 몸 안에서 퍼져 자리잡을 시간을 좀 주고, 조금 뒤에 다시 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163쪽.

  

  

 

 

 

 

 

 

프랑스 태생의 여자들 이야기다. 코코 샤넬, 제인 버킨, 까미유 끌로델, 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베이유, 이자벨 아자니, 세골렌 루아얄, 퐁파두르 부인등... 프랑스 사회, 이 세상을 뜨겁게 산 여자들이다. 그들의 일생을 요약하였으므로 가벼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페이지가 가볍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퐁파두르 부인 이야기를 읽다가 지난 겨울에 읽은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이 떠올랐다. 프랑스의 오브제들, 의자, 책상등 가구를 살피며 왕족의 이야기를 실었는데 꽤 흥미로웠다.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의 그림자처럼, 분신처럼 살았던 여인이었으나 그의 아내가 되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와 얘기를 나누기 위해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고 한다. 하여 그녀는 철학자들과 토론을 벌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사랑을 얻기 위해 지식을 습득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요...흑.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직업은 '레모네이드 소년' 이다. 이 소년은 카페 배달원으로 카페에서 초콜릿을 배달 시켜 마셨던 당시의 여유로운 생활을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가끔 상상한다. 레모네이드 소년이 막 내린 원두 커피, 얼음 동동 띄운 레모네이드 한 잔을 가져오는 일.           세노 갓파는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그들의 방을 세밀하게 그렸다. 어찌나 정밀한지 그걸 정말 손으로 그렸을까 싶은데 세노 갓파는 사진을 촬영하고 집으로 돌아와 세밀하게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들 중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책상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있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평등 욕망'은 여전히 건재한다. 바탕스는 평등으로의 탈출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감히 넘보지 못했던 것들을 바캉스 때엔 '질러도' 된다. 아니 질러야만 한다. 바캉스는 자신이 모든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 존재라는 자기 확인의 기회이기 때문에 그 어떤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만끽해야할 그 무엇이다.  -강준만, 고독한 한국인 41쪽.  

 

 

 

무더운 여름, 침몰한 서울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참 안좋다. 거실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워 서울 생각, 서울 걱정, 서울의 추억을 헤아리다보면 그 끝엔 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모아진다. 그래도 여름이니까, 가 아니라 아픈 생각을 지우려는 얄팍한 술수 때문이다. 난생 처음 조리를 샀다. 크림색 조리를 신고 나풀나풀 바다 구경하러 가고싶다. 거실 마루에 벌러덩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여름날의 평온한 오후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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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시간  

 

이관염을 앓고 있다. 귀와 코를 연결하는 관에 염증이 생긴건데 꽤 불편하다. 이비인후과에서 처방한 약이 있지만 별 소용이 없다. 의사샘은 신경쓰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한다. 시간이 흘러야 낫는다고, 예민하게 신경쓰면 빨리 회복되지 않을거라고. 신경쓰지 않기로 했지만 일상의 습관들이 작은 충돌을 일으켜 이관염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관염 증세가 있는 왼쪽 귀를 포함한 신체 왼쪽 부위가 말썽이다. 멍 때리는 증상이 심해졌고 단어도 퍼뜩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혹 치매 초기 증상인가 싶어 검색도 해봤다.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야호, 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메아리라고 하질않나... 커피를 마시러 전기포트 근처에 갔다가 보리차 한잔만 마시고 오는가하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 반납연기 신청을 하러 노트북을 켰는데 그것만 빼고! 엉뚱한 놀음만 하고 나오기 일쑤. 일주일째 나는 고장난 못난이 인형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서머싯 몸이 쓴 작가들의 이야기다. 제인 오스틴, 허먼 멜빌, 발자크, 스탕달, 브론테, 오스카 와일드.... 그들의 짤막한 전기와 함께 작품이야기를 썼는데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조미료 없어도 맛있는 진국을 먹는 기분이다. 서머싯 몸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작가가 어떤 인물인지 알면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31쪽  

오래 전 멋진 이야기를 쓴 작가들이어서 왠지 그들이 보통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보다는 그 자체로 위대한, 뛰어난, 불멸의 투사 같은 인상이 있었다. 작가들은 자기의 생을 열심히 살아간 보통의 사람들이었다고, 서머싯 몸은 말한다. 뮤지컬 극작가인 오은희씨는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5시? )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글을 쓴다고 했다. 98년쯤... 오은희씨의 뮤지컬이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작가이기전에 일상을 꾸려가는 생활인이라는 걸 강조하는 소박한 인터뷰가 간혹 떠오르는데 이 책에서도 작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자기의 삶을 다해 사랑한다. 만약 그들이 미지의 독자들을 위해,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쓴 글이라면 지금까지 명작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 당대의 이야기에 충실한 생활인의 자세에서 명작은 탄생한다.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독신이었는데 정신적 지주였던 언니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날에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종이에 그대로 옮겨 표현하는 게 편지 쓰기의 참된 기술이라고 늘 들어왔지만, 나는 이제야 겨우 그것을 습득했어. 이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언니에게 직접 말하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써내려왔어 - 80쪽  

제인 오스틴과 그녀의 언니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장 한 장 페이지 넘기는 게 아까웠다. 스탕달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다리까지 타고 밀담한 이야기나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아이들을 귀찮아하고 이모에게 키우게 한 이기적인 심성도 엿볼 수 있다.  

지난달 (아! 벌써 5월이 갔다) 엔 40여통의 손편지를 썼다. 오래 교우한 이들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였는데 손편지를 받은 그들이 무척 좋아해주었다. 감동을 주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은 그것 밖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뜻밖에 고마워하고 좋아라해주었던 그들이 참 고맙다. 6월에도 틈틈이 손편지를 쓰는 달이 될 것 같다. 미국에 사는 선배 역시 손편지에 대한 감동을 밝혔는데 너무 흥분되어 간단한 메일을 보내왔다. 선배와는 종종 메일을 주고 받는데 그에게서 받은 메일 중 가장 짧은 메일이었다. 그의 감동이 고스란히 느껴져 내가 더 위안을 받았다.  

 아껴읽고 있는 책이다. 아껴 먹는 것만큼 빨리 읽게 될까봐 조바심이 나는데 다행이 이 책은 아껴 읽으려 하지 않아도 느리게 읽게 된다. 지은이의 섬세한 관찰과 스케치, 책에서 만나는 아주 작은 폰트까지 뭐 하나 버릴 게 없다. 서울을 샅샅이 뒤져가며 쓰고 그린 책이다. 경복궁, 종로, 광화문등 서울을 누빈다. 서울. 서울을 떠나기 전엔 정말 몰랐는데 서울을 떠나온 뒤로 나는 아주 많이 그리워하는 도시가 서울이 되었다. 요즘에도 한 달에 서너번 이상은 가지만 갈 때마다 가슴이 찡하다. 나의 모든 걸 여기 다 두고 왔다는 생각에 화창한 서울의 날씨에서도 울적할 때가 더러 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라는 얘기를 지치지 않게 하는 친구들에게 요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움도 사랑이야. 꽤 멋부린 것 같지만 은연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서울을 떠나면서 내게 생긴 버릇 중에 하나는 비가 올 것 같은 날엔 꼭 우산을 챙긴다는 거다. 강우 확률 10% 라 할지라도 서울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가방에 우산부터 챙긴다. 집을 멀리 떠나온 것도 서러운데 비까지 맞으면 더 처량할 것 같아서다.  

 

 

 

 

 

 

 

 

 

서울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긴 하지만 딱히 서울로 한정짓지 않아도 될, 도시가 배경인 소설들이 묶여있다. <서울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은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가 정서적 시선의 서울을 그렸다면, 서울의 역사를 훑는 책이다. 딱딱한 인상은 있지만 서울이라는 땅에 세워졌던 무수한 공간, 건물 탐사가 인상적이다.  

서울이 고향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고향의 흥취를 느끼지 못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말에 수긍한다. 서울은 고향의 느낌 보다는 수락과 거절이 선명한 도시다. 오는 사람 안 막고 떠나는 사람 안 막는 도시. 톨스토이는 불행한 사람이 살기에는 도시가 낫다고 말했다. 끄덕끄덕... 하지만! 하고 외치고 싶지만 달리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이 살기에는 도시가 낫습니다.
도시에서는 이웃 사람이 사망한지 오래되어서 부패해도 아무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마다 공무, 대인관계, 건강, 예술, 아이들 교육에 신경쓰느라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고 항상 바쁘지요. 가끔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맞이해야 하고 이런 저런 사람을 방문해야 합니다. 또 이런 저런 것을 보고 들어야만 합니다. 사실 도시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두 세명의 저명인사가 있기 마련이지요. 자기 자신도 돌보기 바쁜 마당에 선생, 가정교사, 여자 가정교사 등 이런 저런 사람에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생활 자체가 공허해질 수밖에요.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아가면서 같이 사는데서 오는 고통을 덜 느꼈습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살고 있는 주인공의 말이다.

 

  

 

 

 

 

 

 


오전에 이비인후과에 다녀온 후 <제5도살장>을 읽었다. 독서를 눈과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귀로도 한다는 걸 알았다. 오른쪽 귀가 읽은 것을 왼쪽 귀가 흡수하지 못해 수많은 활자들이 왼쪽 귀 달팽이관에 고여있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꽤 슬프다. 커트 보네거트의 글이 블랙 유머로 정평이 나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진짜 까만 웃음만 주는 역설이랄까. 웃긴데 슬프다. 글도 내 귀도. 귀에 염증이 생기면 독서도 힘들다.  

파트릭 모디아노 읽는 여자! 라고 말하는 게 난 참 좋았다. <신원 미상의 여자>를 비롯한 크라상 처럼 뭔지 모르게 후딱~ 지나간 혹은 사라진 세련된 맛의 소설이니까. <슬픈 빌라>는 현재, 과거, 환상과 현실이 겹쳐져 있다. 염증을 앓고 있는 내 귀처럼 시간의 치유가 필요한 인물들이 우후죽순 떨어진다. 모디아노의 인물들이 내 왼쪽 귀 달팽이관에 우산 쓰고 서 있다. 처량맞게스리.  

<택시>는 내 좋은 친구에게도 선물하고 나도 한 권 샀다. 상을 받아도 될 만큼 택시를 많이 타는 택시광 작가 할레드 알하미시. 그가 만난 이집트 카이로 택시 운전기사와 나눈 이야기들이 콩트처럼 엮여있다. 짧고 담백하고 깊다. 사회, 정치적 비판자인 택시 운전기사들의 시선은 유쾌하고 슬프다. (또! 슬프다. 오늘 참 많이 슬프고 계속 슬프다 ㅠㅠ)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짧게 읽고 깊이 생각하게 하는 참 좋은 소설.  

동네에 여름꽃들이 활짝 피었다. 쪽빛 보라색 붓꽃 천지였다가 노란 금계국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개망초꽃밭도 예쁜 아가씨 아사 원피스처럼 피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6월이 왔다. 여름을 많이 타는 내게 6월은 선물같다. 아주 맑은 아침의 시간같은 6월을 부지런히 산책해야겠다. 

  

움직이는 여름

우리 동네 수변공원에 핀 금계국-  

 

붓꽃 (창포)  

 

풀꽃반지 장만! 어디서?  

 

<잔디당> 이라고... 우리 동네 들판에서 ^^;;  

 

모든 봉오리 진 꽃은 아름답다. 여름이다. 여름을 한번도 치유하는 시간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덥고 짜증나는 계절, 빨리 빨리 가버렸으면 좋을 계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맞이한 6월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고여있는 물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뜬금없는 다짐을 하고 싶어졌다. 계속 흐를 수 있도록, 야금야금... 움직이는 여름이 되기를. 모두에게,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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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1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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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1-06-0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제가 스맛폰으로 읽은 소설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는냐도 중요하지만 어떡해 사랑하는지가 더 중요한거야.'

이건 꼭 사람과 사람사이에만 통용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게 식물이건 동물이건 아니면 인간들이 창조한 공간이건 도시이건...^^

플레져 2011-06-01 19:11   좋아요 0 | URL
스맛폰이라고 하시니까 아주 맛있는 폰 같아요 ㅎㅎ

인용하신 구절에 형광펜 칠할게요.
무엇을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도 중요하다, 라는
어떤 작가의 말이 떠오르는 말입니다 :)

프레이야 2011-06-01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앓고 계시군요. 몸도 마음도 서서히 나으시기 바래요.
손톱이 너무 귀엽게 생겼어요. 풀꽃반지랑 잘 어울려요.ㅎㅎ
네, 저도 계속 야곰야곰 흘러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변해야 아름답다는 생각이 부쩍 들어요, 요즘.^^
6월의 첫날! 힘내요!

플레져 2011-06-01 23:10   좋아요 0 | URL
확성기에 귀를 대고 있는 이 느낌을 즐기려고...애쓰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나 즐긴다는 말은 제게 참 어려운 거 같아요 ^^;;
긴 손톱을 가져본지 너무 오래전이라서요, 조금만 길어도 싹둑- 잘라버려요.
매니큐어 칠한 예쁜 손들이 부러운 여름이에요.
프레이야님의 여름이 봄처럼 예쁘기를 기대합니다 ^^!

blanca 2011-06-0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꽃이 금계국이군요. 토끼풀반지(맞나요?) 낀 손이 참 이쁘네요. <택시>에 관심이 갑니다. 소설이군요. 어서 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플레져 2011-06-01 23:14   좋아요 0 | URL
노란 것이 참 이쁘지요? ^^
토끼풀 맞는 것 같아요... 고백하자면...저도 이름을 잘 몰라서 그냥 풀꽃반지로. 흑 ㅠㅠ 쾌유 빌어주셔서 감사해요. 내일이면 휙~ 나을것만 같아요 :)

야클 2011-06-0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증상만으로 보면 저도 때때로 이관염을 앓고 있었군요.
그런데 쭉 그림들 넘기다 꽃반지 낀 손사진에서 잠시 멈춰 한 3초쯤 바라봤다면 약간 느끼해 하시려나? ㅎㅎ

플레져 2011-06-01 23:15   좋아요 0 | URL
마침 제가 오이피클을 먹어서 느끼함이 덜했어요 ㅎㅎㅎ
이관염일땐 무심한 게 약이래요. 증상을 또 느끼시거든 쭉-무심하세요~~

Mephistopheles 2011-06-02 00:37   좋아요 0 | URL
아니 야클님....그건 바로...페.티.쉬.즘...? =3=3=3=3=3=3

다락방 2011-06-02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 예뻐요, 플레져님.
꽃반지 낀 손이 예쁘지만, 꽃반지 안껴도 참 예쁜 손이에요. 깔끔하고 청결해요. 군더더기 없는 손, 이라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꽃반지와 아주 잘 어울려요.

플레져 2011-06-02 12:32   좋아요 0 | URL
군더더기 없는 손, 와. 그렇게 말해주는 다락방님이 더 예뻐요. 좋아라~ :) 손이 예쁘게 보이는건 날씨 덕도 본 거 같아요.
약간 흐린 듯한 날에 사진 찍으면 잘 나오잖아요 ^^

2011-06-02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2 1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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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1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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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6-0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디당이라, 어디죠, 어디죠? 플레져님 동네라면 우리 동네에서도 멀지 않을텐데...
이관염, 처음 들어봐요. 신체 중에 불편한 곳이 있는데 신경 안쓰고 있기란 쉽지 않지요. 여름 오기 전에 나으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사진의 저 꽃 (제 맘대로 엉겅퀴라고 부르고 있는) 저도 어제 차 타고 가다가 무리로 피어 있는 것을 봤어요. 갑천 강변 따라 가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바로 어제인데도 그게 어디 가던 길이었더라 금방 생각이 안났습니다. 저도 이래요 ^^)

플레져 2011-06-02 16:50   좋아요 0 | URL
귀와 코를 연결하는 관이 있는데요, 거기에 바람이 통하지 않는거래요.
아침엔 반짝 괜찮았는데 지금은 또다시 웅성웅성...ㅠㅠ
어디 먼 곳으로 교신하는 것만 같아요. 도대체 내 귀는 어느 곳의 소리를 듣고 싶은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2011-06-10 0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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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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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16: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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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16: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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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2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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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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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3 2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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