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도시法 국회통과]지역 반응

 

이선우 기자 swlyk@cctoday.co.kr

 

▲ [열쇠쥔 우리당] 2일 오후 열린우리당 법사위원들이 한나라당 의원들이 점거 농성하고 있는 법사위 회의실에 들어가기 위해 열쇠로 문을 열려 하고 있다.
2일 국회에서 행정도시 특별법이 가결되자 충청권은 정쟁으로 인한 경제·사회적인 혼란에서 벗어나 차질없는 행정도시 건설과 국가발전을 위한 안정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충청인들은 행정도시 특별법을 둘러싼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의 국회 법사위 회의실 점거 농성을 지켜보며 가슴을 졸여야 했고 어렵사리 본회의를 통과한 후에는 하루빨리 어수선한 정국을 풀어주길 기대했다.

또 정부에게는 특별법에 따라 조속한 시일 내에 행정도시 건설을 위한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갈 것을 주문했다.

김수현 지방분권운동 대전본부 사무국장은 "국가 균형발전과 신행정수도의 궁극적인 건설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며 "2005년 연기·공주 토지매입, 공공기관 지방 이전, 혁신도시 건설과 같은 국가 균형발전 시책이 차질없이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전시의회는 성명을 통해 "다소 부족하지만 여야 대타협과 국가 균형발전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며 "정치권은 수도권 과밀해소와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행정도시 건설을 차질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황진산 시의회 의장은 "특별법 국회 통과는 신행정수도 건설의 첫 단계로 여긴다"며 "특별법이 통일시대를 대비한 새로운 국가 미래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창기 행정수도이전 범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대전대 교수)는 "여야 합의를 통해 특별법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생산적인 국회를 기대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행정수도로 가는 단계로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차질없이 진행하도록 여야와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특히 "정부는 행정복합도시 건설 추진 함께 수도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수도권 발전전략과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 공공기관 이전 계획을 빠른 시일 내에 확실한 일정과 대책을 발표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일부 시민들은 "국회 본회의 통과 막판까지 진통을 겪는 것을 지켜보며 앞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조차 순조롭게 추질될 수 있을 지 의구심이 든다"며 "정치권은 국민들이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반응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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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은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19세 손)인
재경 최국선(1631-1682)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1884-1970)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입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15가지 비밀>

1. 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위만을 갖는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 ..그것은 당신의 정치적 구조를 경험한
최진립의 뼈아픈 교훈으로, 벼슬을 하면 욕심의 끝이 없어 권력에 맛을 들이게 되고
결국에는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되어 권력 구조가
바뀌면 철저히 보복당해 가문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한국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노사관계를 실천한다.
3. 함께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간다.
4. 군림하지 않고 경영하는 중관 관리자는 세운다.
5. 양입위추라,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한다.

6.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
7. 때를 가려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린다.
8. 지나치게 재산을 불리지 않는다.
9.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한다.
10. 이루기 힘든 일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다.

11.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게 한다.
12. 자신을 낮춰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한다.
13.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한다.
14. 2등을 위해 1등만큼 노력한다.
15.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재산을 쌓아가는 기본>

최국선이 세 아들에게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이재의 원리는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하는 것 즉, 양입위출이
기본이다. 무릇 재물이란 한도가 있고 쓰기는 끝이 없으니 미리 들어올 것을 알아서
거기에 맞춰 쓰지 않으면 나중에는 견디지 못하고 자녀의 교육도 혼인도 시키지 못하여
가난한 사람이 되는 이가 많으니 두려운 일이다.

만승천자(1만대의 수레를 출동시킬 수 있는 천자)라도 재물을 절약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가 망하거늘 하물며 일반 사람의 집이야 절약하지 않으면 어디서 재물이
생기겠느냐. 풍년이나 흉년이나 가을에 거두어들일 곡식의 수량을 헤아리고 제사는
정성으로 하되 장만하기를 지나치게 하지 말고 부질없이 헛되이 소비하지 말며 의복과
음식을 너무 사치스럽게 하지 말되 마땅히 쓸 데는 아끼지 말라. 까닭없는 일에는
터럭 끝만큼도 허비하지 말고 의복과 음식을 보아 가며 하고 헛된 낭비를 하지 않으면
모자라지 않게 쓸 것이다.

항상 여유를 두어 질병에 약값을 없게 하고 쓸 일이 없거든 자손을 위하여 논발을
장만함이 또한 옳은지라. 가정을 일으키는 방법은 절약하여 쓰는 것 밖에 없느니라.
-전진문,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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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유주의 이념을 체계화시킨 사상가들과 이를 실천에 옮긴 행동가들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은 자유주의 사상가들 가운데 중요한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해서
보내드립니다.

1.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1899-1992)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론적 배경을 만든 인물
그가 죽기 몇 년 전에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것도 지켜보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하이에크의 아들 로렌스 박사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구요!"
이 때 하이에크가 한 말은 간단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자유주의는 개인을 과거의 모든 인습적인 속박과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개인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노력을 통해 복잡한 경제활동에 하나의 질서를 구축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시장경제였다.

이러한 자유로운 질서 속에서 인간의 재능이 자유롭게 발휘됨으로써 인간의 욕망이
신속하게 충족될 수 있었고, 생활수준은 놀라울 만큼 향상될 수 있었다. 자유사회에서
물적 성장이 이처럼 성공하자 인간은 더 큰 꿈과 야심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자유사회의 발전은 항상 '장기적'으로 실현된다는 점이다.
지지부진한 것으로 보이는 자유주의 정책과 경제성장에 대해 사람들은 초조감을 갖더니,
급기야 자유주의를 시급히 제거해야 할 하나의 장애물로 간주하게 됐다. 그들은 자유사회
에서만 나오는 자연발생적인 힘을 제거하려고 했으며, 비인격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시장기구 대신에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의식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는 경제계획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2. 루트비히 폰 미제스(1881-1973) 사회주의의 이론적 한계를 입증한 인물
인류가 비극에서 벗어나 희망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미제스는 자유주의(자본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주의는 일부 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물질적인 부를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목표가 추구되는 과정에서 개개인의 자유와 복지가
증진된다.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노동 분업은 동시에
개인을 봉건적인 속박에서 해방시켰으며, 사회의 부를 유지하고 증가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평화주의는 개개인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한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사회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을 때 자기 혼자서 안전한 길을 찾을 수도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지적인 싸움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 싸움의 결과에 모든 사람의 이해가 달려 있기 때문에 관심 없다면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선택하든 하지 않든 모든 사람은 위대한 지적 투쟁에 끌려 들어오게 된다."

3. 칼 포퍼(1902-1994) 열린 사회의 중요성을 갈파한 인물
우리 인간은 항상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어떤 의견도 비판받아야 한다. 이렇게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자각적 인식, 즉 '우리 모두는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사회적, 정치적, 제도적으로
승인하는 사회가 바로 '열린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비판과 토론과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오류를 줄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 길은 '열린 사회'의 길이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라.
정치적 수단을 사용하여 행복을 이룩하려고 하지 말라. 구체적인 비참함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직접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가난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4. 발터 오이켄(1891-1950) 질서자유주의의 창안자
'집단'은 어떤 경우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경제의 정치화를 경계하라"

정부가 경쟁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서 벗어나 사안별로 개입을 하게 되면
경제정책은 이익집단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누군가에게 하나의 특권이 부여되면 그는 이 특권을 기반으로 두번째의 특권을 요구하고,
두 번째의 특권도 주어지면 그는 세 번째의 특권을 요구한다."


5.루브비히 에르하르트(1891-1977) 자유시장경제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인물
자유시장경제만이 우리에게 자유와 복리를 안겨 줄 수 있다. 자유란 하나이며
그것은 결코 나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인간적 자유는
통합된 하나의 통일체이다. 이 통일체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그중 일부분만의
자유를 따로 떼어 내어 유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철부지 생각이다.

하이에크는 에르하르트를 이렇게 평하였다.
"종전 후 독일이 그 결정적 순간에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한 자연스러운 능력을 지닐 수
있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행운이었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을 만나 보았고, 그중에는
정말 박식하고 훌륭한 분들도 많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인지해
내는 능력에 있어서는 에르하르트가 단연 최고였다. 그는 외국은 물론 독일 국내에서
알려진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일의 자유로운 사회 재건에 엄청난 역할을
해냈다."


6. 빌헬름 뢰프케(1899-1966) 공산주의의 붕괴를 예언한 인물
뢰프케는 그가 이룩한 업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윈스턴 처칠이 말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경구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극소수의 사람, 아니 단 한 사람이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었는가를 알기 위해서, 만일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만 해 본다면 그에게 자신들의 삶을 감사해야 하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그렇게 많지 않다."


-주용식 외, <위대한 생각-자유주의 사상가 12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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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웨이트 트레이닝에 관한 내용을 보내드립니다.
유산소 운동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적절히 조합하면 항상 활기찬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 1. 잘못된 상식: 좋은 체격을 갖기 위해서는 유산소 운동이 바벨(역기)이나 덤벨(아령)
로 하는 웨이트 트레이닝 보다 효과적이다.
진실: 체격을 바꾸려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1. 그냥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건물 주위를 걸어 다니는 것이 몸매를 가다듬기
위해서는 그래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바벨이나 덤벨로 운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서 신진대사율(우리의 육체가 체지방을 소모시키는
비율)을 현저히 높일 수 있다. 근육이 불어나면 신체는 그 새로운 근육을 지탱하기 위해
에너지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체지방을 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웨이트
트레이닝이 유산소 운동보다 휠씬 더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제의 핵심 즉,
육체의 에너지 사용률을 다루기 때문이다.

2. 유산소 운동만 한다면 아무리 음식 섭취량을 줄인다 하더라도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물론 체중을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산소 운동만으로는 전체적인
모습을 변화시킬 수 없다. 만약 당신이 큰 배의 모습으로 운동을 시작했다면, 십중팔구
작은 배의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물론 원하는 것이 그 정도였다면 다행이지만,
내가 말하는 변신은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니다.

3.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 체지방이 소모될 뿐만 아니라 몸매가 바뀐다. 어깨는 더욱
넓어지고 허리는 더욱 가늘어진다. 팔에 근육이 형성되며, 복근에 가늘게 윤곽이 잡히고,
두 다리에 힘이 실린다. 힘이 세지고 자신도 생기며 강력해지는 것이다.

#2. 잘못된 상식: 웨이트 트레이닝은 젊은 운동선수들에게나 적합하다.
진실: 나이에 관계없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1. 우리가 운동을 하지 않으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근육질을 잃게 된다. 이런 과정은
25세 정도부터 찾아오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자기 몸에서 지방의 양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균적으로 미국 남자의 몸에 쌓인 지방은 30대 초반부터
60대 중반까지 약 18%에서 36%로 두 배 정도 늘어난다. 같은 기간에 미국 여성의 경우,
체내 지방이 평균 33% 내지 44% 정도 불어난다.

2. 그렇다. 우리는 늙어감에 따라 살이 찐다. 살이 찌면 근육이 줄어들고, 근육이 줄어들면
힘이 없어진다. 힘을 잃어면 어쩔 수 없이 쇠약해지고 여러 가지 신체장애가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불가피한 현상이 아니다. 최근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웨이트 트레이닝이 모든 사람들-특히 황혼기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서-의 생활의 질을
높여주는 데 많은 기여를 한다고 한다. 토프츠의 한 대학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60세부터 72세에 이르는 남자들에게 주 3일간 웨이트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실시한
결과, 근육의 유연성과 힘이 평균 200% 증가했다고 한다.

#3. 잘못된 상식: 근육은 운동하는 동안 자란다.
진실: 근육은 휴식과 피로회복 중에 자란다.


1. 바라는 경이로운 변화는 운동하고 있을 때가 아닌 운동 후 쉬고 있을 때 일어난다.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운동을 하는 동안 우리 몸에 실제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2. 웨이트 트레이닝과 같은 근력운동의 원리는 운동을 통해 근육섬유에 부담을 주어 이를
약간 손상시킨 후, 근육 재생력을 동원해 이에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반응에
필요한 에너지는 체내에 저장된 지방에서 얻는다.
쉽게 근육세포를 하나의 건물로, 그리고 운동을 미동의 지진이라고 생각해 보자. 지진으로
인해 건물에 구조적인 파손이 생기면 보수팀이 달려와 파손된 부분을 수리한다. 그러면
수리된 부분은 예전보다 더 튼튼해질 것이다.
-Bill Phillips, <Body fo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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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더드 오일로 유명한 존 데이빗슨 록펠러(1839-1937)는 4명의 딸과 아들
존 데이빗슨 2세(1874-1960)을 두었다. 존 D. 록펠러는 슬하에
애비, 존 데이빗슨 3세, 넬슨 올드리치, 로렌스 스펠먼, 윈스롭, 그리고 데이빗을 두었다.

1998년 8월 24일, <포브스>지의 기사에 의하면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는 존 D. 록펠러
1세였다. 당시 그의 재산은 미국 경제 전체의 1.53%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은 1.15%를
차지했던 밴더빌트였으며, 현재 생존 인물 가운데 세계 최고의 부자는 빌 게이츠로 0.56%
로 역대 순위 6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포브스>가 매년 전 세계 부자들의 재산 총액을 바탕으로 발표하는 자료에 의하면
록펠러가의 사람들은 데이빗(25억 달러, 205위), 로런스(15억달러, 377위), 윈스롭 폴
(12억달러, 472위) 세 명이 올라 있었다.

1. 록펠러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의 종교적인 신성함마저 띠고 있었다. 그의 종교는
사업이었다.
그는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에서 주일성경 학교 교사 일을 시작했는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이것이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

그가 첫 직장에서 보인 헌신적인 태도에 고용주는
놀라고 또 기뻐했다. 그 소년이 매일 밤 자기 방에서 하루의 일을 되새겨 보고 자신에게
훈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고용주는 더 큰 감동을 받았으리라. "기회가 왔을 때
조심해야 해. 자만심에 빠지면 실패하기 쉽지. 서둘러서 잘 되는 일은 없어.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가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거야."

2. 록펠러는 자신의 약혼자와의 생활조차도 자시을 클리블랜드의 앞서가는 사업가로
만들어 준 철저함과 집요함으로 대했다.
그 때 그는 회계장부 A를 다 쓰고, 이제는
회계장부 B를 쓰고 있었다. 이제는 전처럼 소액기부모임과 그 밖의 소소한 자선에 대해
센트 단위까지 어김없이 기록하던 모습 대신, 이제는 금액이 달러 단위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는 약혼녀와 교제하며 쓴 비용을 '잡비' 명목으로 기재하고 있다.

몇 주 동안 꽃다발을 사는 데 50센트씩, 약혼녀 및 시종과 함께 록키 강까지 주말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고급 마차를 전세 낸 값이 1달러 75센트, 결혼반지 가격이 15달러
75센트였다. 1864년 9월 8일, 그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장부에 적고 있다.
"오후 두 시 정각에 L.C. 스펠먼 양과 결혼. 주례는 월코트 목사님, 보조는 페이지
목사님. 예식은 그녀의 부모 집에서 거행."

3.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며, 원칙에서 어긋나지 않게 살아온 록펠러의 생활방식은
곧 사업에서 많은 이윤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교활한 업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클리브랜드에서도 그야말로 가장 빈틈없는 석유 딜러 중 하나라는 명성이 퍼져 나갔다.
그의 꽤나 까다로운 성격은 한 푼이라도 더 받는 거래를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최상의 거래 도구로 사용했고, 그가 자기 자신에게 허용한 유일한
오락은 오로지 거래의 성공뿐이었다.
스탠더드 오일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던
아이다 타벨은 훗날 록펠러의 지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존 록펠러가 기뻐하는 걸 본 유일한 경우는 오일 크릭으로부터 시장 가격보다 많이
깎은 값으로 석유를 확보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뿐입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환성을
지르며 의자에서 뛰어 일어나 춤을 추고, 나를 껴안고, 모자를 집어던지고 했죠.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군요."

4. 다른 강도 귀족(Robber Baron)들이 미인이며 주지육림이며 유럽의 예술품 등에 돈을
물쓰듯 했던 것에 비하면 록펠러는 점잖고 원칙적인 생활을 했다. 그는 인생을
즐기는 것보다 스탠더드 오일을 창립하는 일에 재능과 열정을 쏟아 부었다.
돌이켜
보면 이 거대한 트러스트의 창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교모한 계획의 산물처럼 보였으며,
록펠러는 이로써 재계의 나폴레옹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물론 그의 비범한 성실함도
상당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스탠더드 오일의 신화는 대체로 그가 적시에 적소에
있었던 점, 즉 언제나 "잔을 제 위치에 두는" 재주가 있었음에 기인한다.

나중에 그는 좀 더 자극적인 창업 스토리를 원하는 전기 작가에게 이렇게 실토하고 있다.
"우리가 나중에 얼마나 커질지는 우리 중 누구도 짐작도 못했소."

5. 훗날 백만장가가 되어 스탠더드 오일에서 은퇴, 플로리다의 미개척 해안지대를 미국판
리비에라로 개발하는 데 만년을 보내게 될 플래글러는 사업에서나 사생활에서나 록펠러의
몇 안 되는 친구가 되었다. ...

플래글러는 록펠러가 끌어들인 대담하고 때로는 무모한 경영자로서 첫 번째였다.
그는 록펠러의 아버지와 비슷했으며, 사업에 과감하게 부딪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록펠러 자신은 그런 사업 방식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고 싶어 했다. 록펠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을 다루는 능력이란 설탕이나 카피 같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읻.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런 상품을 나만큼 비싼 값으로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6. 그는 사소한 일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고, 그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가 스탠더드
오일의 중대한 문제들보다도 그런 사소한 데 더 마음을 쓴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록펠러라는 사람의 성격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면,
모든 것이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추호의 빈틈도 없게 하려는
섬세함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훗날 록펠러 2세는 노년에 접어들어서, 그가 어린 시절이던 1888년에 가족끼지 프랑스로
휴가를 갔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아버지 록펠러 1세는 여행 안내인이
불성실하다고 판단하자 그를 가차 없이 해고하고 자기가 직접 가족을 이끌고 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프랑스어로 된 영수증을 뚫어져라 살피시며 항목 하나하나마다 체크하시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합니다. ... 그 대부분을 읽으실 수도 없었는데도,
어쩌면 그런 자잘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게 좋지 않게 보일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아버지 인생의 원칙이셨던 거죠." 작은 것을 아끼는 태도와 큰
것에 대담히 투자하는 태도 사이에는 별다른 모습이 없었다. 사실 두 가지 모두 록펠러
에게는 단 하나의 목적, 즉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완벽하고 절대적인 통제력을 갖는
것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 출처: 피터 콜리어/ 데이빗 호로위츠, <록펠러가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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