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더드 오일로 유명한 존 데이빗슨 록펠러(1839-1937)는 4명의 딸과 아들
존 데이빗슨 2세(1874-1960)을 두었다. 존 D. 록펠러는 슬하에
애비, 존 데이빗슨 3세, 넬슨 올드리치, 로렌스 스펠먼, 윈스롭, 그리고 데이빗을 두었다.

1998년 8월 24일, <포브스>지의 기사에 의하면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는 존 D. 록펠러
1세였다. 당시 그의 재산은 미국 경제 전체의 1.53%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은 1.15%를
차지했던 밴더빌트였으며, 현재 생존 인물 가운데 세계 최고의 부자는 빌 게이츠로 0.56%
로 역대 순위 6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포브스>가 매년 전 세계 부자들의 재산 총액을 바탕으로 발표하는 자료에 의하면
록펠러가의 사람들은 데이빗(25억 달러, 205위), 로런스(15억달러, 377위), 윈스롭 폴
(12억달러, 472위) 세 명이 올라 있었다.

1. 록펠러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의 종교적인 신성함마저 띠고 있었다. 그의 종교는
사업이었다.
그는 이리 스트리트 침례교회에서 주일성경 학교 교사 일을 시작했는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이것이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

그가 첫 직장에서 보인 헌신적인 태도에 고용주는
놀라고 또 기뻐했다. 그 소년이 매일 밤 자기 방에서 하루의 일을 되새겨 보고 자신에게
훈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고용주는 더 큰 감동을 받았으리라. "기회가 왔을 때
조심해야 해. 자만심에 빠지면 실패하기 쉽지. 서둘러서 잘 되는 일은 없어.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가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거야."

2. 록펠러는 자신의 약혼자와의 생활조차도 자시을 클리블랜드의 앞서가는 사업가로
만들어 준 철저함과 집요함으로 대했다.
그 때 그는 회계장부 A를 다 쓰고, 이제는
회계장부 B를 쓰고 있었다. 이제는 전처럼 소액기부모임과 그 밖의 소소한 자선에 대해
센트 단위까지 어김없이 기록하던 모습 대신, 이제는 금액이 달러 단위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는 약혼녀와 교제하며 쓴 비용을 '잡비' 명목으로 기재하고 있다.

몇 주 동안 꽃다발을 사는 데 50센트씩, 약혼녀 및 시종과 함께 록키 강까지 주말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고급 마차를 전세 낸 값이 1달러 75센트, 결혼반지 가격이 15달러
75센트였다. 1864년 9월 8일, 그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장부에 적고 있다.
"오후 두 시 정각에 L.C. 스펠먼 양과 결혼. 주례는 월코트 목사님, 보조는 페이지
목사님. 예식은 그녀의 부모 집에서 거행."

3.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며, 원칙에서 어긋나지 않게 살아온 록펠러의 생활방식은
곧 사업에서 많은 이윤을 낳는 요인이 되었다.
교활한 업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클리브랜드에서도 그야말로 가장 빈틈없는 석유 딜러 중 하나라는 명성이 퍼져 나갔다.
그의 꽤나 까다로운 성격은 한 푼이라도 더 받는 거래를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최상의 거래 도구로 사용했고, 그가 자기 자신에게 허용한 유일한
오락은 오로지 거래의 성공뿐이었다.
스탠더드 오일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던
아이다 타벨은 훗날 록펠러의 지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존 록펠러가 기뻐하는 걸 본 유일한 경우는 오일 크릭으로부터 시장 가격보다 많이
깎은 값으로 석유를 확보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뿐입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환성을
지르며 의자에서 뛰어 일어나 춤을 추고, 나를 껴안고, 모자를 집어던지고 했죠.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군요."

4. 다른 강도 귀족(Robber Baron)들이 미인이며 주지육림이며 유럽의 예술품 등에 돈을
물쓰듯 했던 것에 비하면 록펠러는 점잖고 원칙적인 생활을 했다. 그는 인생을
즐기는 것보다 스탠더드 오일을 창립하는 일에 재능과 열정을 쏟아 부었다.
돌이켜
보면 이 거대한 트러스트의 창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교모한 계획의 산물처럼 보였으며,
록펠러는 이로써 재계의 나폴레옹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물론 그의 비범한 성실함도
상당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스탠더드 오일의 신화는 대체로 그가 적시에 적소에
있었던 점, 즉 언제나 "잔을 제 위치에 두는" 재주가 있었음에 기인한다.

나중에 그는 좀 더 자극적인 창업 스토리를 원하는 전기 작가에게 이렇게 실토하고 있다.
"우리가 나중에 얼마나 커질지는 우리 중 누구도 짐작도 못했소."

5. 훗날 백만장가가 되어 스탠더드 오일에서 은퇴, 플로리다의 미개척 해안지대를 미국판
리비에라로 개발하는 데 만년을 보내게 될 플래글러는 사업에서나 사생활에서나 록펠러의
몇 안 되는 친구가 되었다. ...

플래글러는 록펠러가 끌어들인 대담하고 때로는 무모한 경영자로서 첫 번째였다.
그는 록펠러의 아버지와 비슷했으며, 사업에 과감하게 부딪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록펠러 자신은 그런 사업 방식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고 싶어 했다. 록펠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을 다루는 능력이란 설탕이나 카피 같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읻.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런 상품을 나만큼 비싼 값으로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6. 그는 사소한 일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고, 그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가 스탠더드
오일의 중대한 문제들보다도 그런 사소한 데 더 마음을 쓴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록펠러라는 사람의 성격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면,
모든 것이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추호의 빈틈도 없게 하려는
섬세함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훗날 록펠러 2세는 노년에 접어들어서, 그가 어린 시절이던 1888년에 가족끼지 프랑스로
휴가를 갔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아버지 록펠러 1세는 여행 안내인이
불성실하다고 판단하자 그를 가차 없이 해고하고 자기가 직접 가족을 이끌고 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프랑스어로 된 영수증을 뚫어져라 살피시며 항목 하나하나마다 체크하시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합니다. ... 그 대부분을 읽으실 수도 없었는데도,
어쩌면 그런 자잘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게 좋지 않게 보일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아버지 인생의 원칙이셨던 거죠." 작은 것을 아끼는 태도와 큰
것에 대담히 투자하는 태도 사이에는 별다른 모습이 없었다. 사실 두 가지 모두 록펠러
에게는 단 하나의 목적, 즉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완벽하고 절대적인 통제력을 갖는
것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 출처: 피터 콜리어/ 데이빗 호로위츠, <록펠러가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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