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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털 같은 나날
류진운 지음, 김영철 옮김 / 소나무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닭털같은 나날' 이란 제목을 보는 순간, 엉뚱하게도 "새털같이 많은 날들, 하루 쉬었다가면 어떠하리..." 한숨같은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랐다..나름대로 새털같이 많은 우리 소시민들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했는데, 뜻은 달랐지만 나의 짐작이 얼추 맞았다. '닭털같은 나날'의 원제 ‘一地鷄毛’는 닭을 잡은 뒤에 닭피와 닭털이 난무하는 비참한 현실을 가리키는 동시에 허섭쓰레기 같은 일상을 지칭한다고 한다. 요즘은 워낙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거나, 유학을 다녀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또는, 책을 통해서 중국 사회의 부패와 부조리에 대해 다들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혁명이후의 중국이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보다 사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닭턹같은 나날은'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저 중국 사회의 이야기라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볼 수 만은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거의, 혹은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조리와 상당히 닮은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틈엔가 어른이 되고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 사이, 한없이 소심해지고 눈치만 빨라진 우리들의 가련한 이야기인 것이다. 찔끔^^;;
이 책은 세편의 소설로 이루어졌다. 대학을 나온 맞벌이 부부 임씨네의 지극히 소시민적인 이야기 '닭털같은 나날'과 조직안에서 관리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세를 지키고 키워나가는지를 다룬 '관리들 만세' 마지막으로,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작가의 고향이기도 했던 하남성 사람들이 겪은 1942년의 대기근을 다룬 '1942년을 다시 돌아보다' 이 소설은 헐리우드에서 영화로도 만들어 질 것이라도 한다.
"도리어 참을 수 없는 것은 '두부가 상하는 것'같은 일상의 작은 일들이다"라고 말하는 표제작 '닭털같은 나날'의 주인공 임씨는 소위 말하는 빽도 없고, 잘난 것도 없고, 사회생활에 밥벌이에 그닥 수완도 없는 너무나 우리와 꼭 같은 소시민이다. 그런 그도 우리처럼 때론 뭔가 해보려한다. 아내의 직장을 옮겨주기 위해 뇌물도 써보고 반대로 수도검침원에게 뇌물을 받아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처절한 몸부림일 뿐 "사소한 일들 속에서 모순되고 초조한 심정으로 혼란스럽게 갈등하는 심리적 소모감에 괴로워하는 임씨"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며, 자신을 갈등케하는 상황에 대해 덜 상처받을 수 있는 나름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만들며 지난날의 꿈과 두부를 상하게 하지 않을 냉장고를 들여놓는 것과 맞바꾸며 만족할 뿐이다.
두번째 소설 '관리들의 만세'에는 조직의 변화앞에 벼랑끝으로 내몰린 8명의 관리들 '원국장과 7명의 부국장' 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좀더 인간적인 사람도 있고 좀더 양심적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개인의 개성과 인성은 사라지고 그저 조직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보존해야하는 사명앞에선 똑같이 저질스럽고 음흉해지기 까지한다. 그러나 필사적인 노력도 좀더 빠르고 영악한 자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뛰는 자위에 나는 자 있다고 했던가... "더우면서 바람이 없으면 폭우가 쏟아진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자전거를 타고 갈 때 날씨가 이렇다면, 힘껏 달려 집으로 돌아가 폭우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당신이 피하지 못한다면 물에 빠진 닭 꼴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지막 작품 '1942년을 다시 돌아보다' 에선 하남성의 대기근에 대해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심지어 제 자식까지 다 먹어치울 만큼 커다란 재앙앞에서도 당시 하남성의 총 책임자인 장개석은 그들의 인민을 구하지 않는다. 역사는 늘 화려하고 장엄한, 넓은 홀에서만 이루어졌으므로 개가 사람을 먹든, 사람이 제 자식을 먹든 그것은 통치자의 안위보다는 못한 것이다. " 이런 것이 사건의 관성으로 사건이 발생한 다음,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생각하면, 언제나 관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대다수의 인민들은 자신의 인권을 유린한 통치자나 그 집단에 대해서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회한어린 추억 한자락을 늘어 놓는 것으로 만족한다. 가련한 민중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 남아야 했기에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불현듯, 지금도 쓰나미와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겪고 있는 동남아시아 인들의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과연 그들의 통치자들은 그들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하고 있을까? 구호물자를 빼돌려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관리는 얼마나 될런지....
'닭털같은 나날'에 실려 있는 세 편의 소설은 모두 민중의 삶을 다루고 있다. '민중' 그들은, 힘있는 자들에 의해 농락당하고 인권마저 유린당하기 일쑤다. 또 어리석게도 제 스스로 상처를 내기도 한다. 스스로 깨어나 당당하게,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지르는 세력을 향해 도전해야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과연 현실에서 얼마나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어쩜, 속마음은 부패한 관리들처럼 좀 더 힘있는 자들에게 알랑거리고 그들의 입맛을 알아서 채워주며 그 댓가로 닭털같은 나날을 살고 있는 임씨처럼 인공지능센서가 부착된 냉장고를 사들이고 싶은 건 아닌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별 4개'면 충분할 것 같았다. 쉽게 읽히면서도 대변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중국사회의 소시민의 삶을 잘 보여준 좋은 책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별 다섯'이 되기에는 뭔가가 부족하단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일주일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과 끊임없이 대비가 되며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두부를 사러가는 임씨, 짐짓 여유있는 척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져버리는 원국장, 대기근이란 말보다 자신이 당한 사소한일들이 더 머릿속에 남아있는 노인들, 바로 그들이 주는 메시지 때문에 난 오늘 '닭털같은 나날'에 별 다섯개를 준다.
왠지 '민중'이란 말을 들먹일 때마다, 늘 애틋함과 연민이 느껴지고, 함께 연대를 이루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뭔가 한 일도 없는데...). 오늘도 소신과 양심을 갖고 투쟁하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며 힘을 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