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영혼이 이 나라에서 태어날 때 그것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묶어 두는 그물이 쳐 있어. 넌 내게 국적이니, 언어니, 종교를 말하고 있어. 나는 그러한 그물을 뚫고 날아가도록 노력할 거야."

"......나는 내가 이제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을 섬길 수는 없어. 그것이 비록 나의 가정이건, 나의 조국이건, 나의 교회건 말이야. 그리고 나는 될 수 있는 한 자유롭게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인생 또는 예술의 어떤 양식 속에서 나 자신을 표현하도록 노력하겠어. 또한 나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나 자신에게 허용된 유일한 무기들-- 침묵, 유랑, 그리고 간지(奸智)를 사용토록 할 거야."

"......예술가는 창조의 하느님처럼, 그의 작품의 안에 또는 뒤에 또는 그 너머 또는 그 위에 남아, 세련된 나머지 그 존재를 감추고, 태연스레 자신의 손톱을 다듬고 있는 거야."

"그것은 마치 모허의 절벽에서 깊은 바닷속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거야. 많은 사람들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지만 결코 떠오르지 못해요. 단지 숙달된 잠수부만이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탐험하고 다시 표면에 나타날 수 있지."

"어머니는 새로 장만한 내 중고품 옷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집과 친구를 떠나 나대로 객지에 가 살면, 사람의 마음이 무엇이며 또 그것이 느끼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기를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아멘. 그렇게 되기를. 환영하도다, 오 인생이여! 나는 경험의 실현에 백만 번이고 부딪히기 위해 떠나며 나의 영혼의 대장간 속에서 민족의 아직 창조되지 않은 양심을 벼리기 위해 떠나가노라."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김종건 옮김, 범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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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무척 상투적인 헌사이지만, 때로 그 말뜻 그대로 적절한 명칭인 경우도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1904년(그의 나이 스물 두 살 때) 파리로의 망명을 위해 조국 아일랜드를 떠나면서 자기 친구에게 10년 뒤에 두드러진 작품을 완성하고 말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더블린, 1904/ 트리에스트, 1914"
조이스는 자신의 맹세를 지킨 것이다.

오늘 종일 그의 '10년'을 생각하다

내가 부끄럽고 미안해할 것은 운좋았던(투입에 비해 산출이 더 많았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 삶에 대한 치열함이나 진정성에 견주어 일상이 평온하고 순조로웠다는 의미에서.... 그런데 그게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나의 지난 시간들이며, 언제나 질투해야 할 것은 다른 그 누구의 삶이 아니라 내가 아직 살지 못한 시간들일 거라는 생각......

날이 완전히 저물고 난 뒤에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달빛과 가로등 불빛 아래 숨쉬고 있는 벚꽃, 그 위에서 조용히 소리를 내고 있는 별들.....
저들이 제 호흡으로 숨쉬고, 제 궤도를 따라 돌고 있는 것처럼,
나도 내 언어로 내가 이곳에서 살고 있음을, 이렇게 살다 스러져갔음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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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읽으면 말이 많아지고, 카프카를 읽으면 말이 없어진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자신의 모습, 자신의 본래의 모습. 셋의 일치가 최상이겠으나 그건 어렵다. 하나를 버리라면 2번을 버려야 한다."


"흔히 백조의 우아한 미끄러짐 밑에 있는 필사적인(?) 발놀림을 말하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백조를 우습게 여기는 것임을 알고나 있을까? 그러나 어쨌든 세상은 미끄러짐만 본다.
손목을 놀리지 않고 눈으로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들은 그것을 질책하면 그렇지 않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더 파고 들어가면 열이면 아홉은 몸을 쓰고 있지 않음이 밝혀진다. 만나 보지 않고도 어떻게 그걸 알아 낼 수 있느냐고? 글을 보면 안다. 필사적인 발놀림이 아닌 물의 흐름에 따라 미끄러지고 있을 뿐인 글을 보면.
그런 글을, 좋은 말로는 '겉멋든 글'이라고 하고 나쁜 말로는 '개수작'이라고 한다.


-- 강유원 blog 'armarius.net'에서 옮겨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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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전에 고등학교 때 한참 정치에 꿈이 부풀어 있을 때, 국회의원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대학 갓 들어가 예술이니 사상이니 미쳐 있을 때, 유명 화가의 전시회에서 심오한 질문을 해댔다. 화가는 한참 쳐다보더니 쌩까버렸다. 다시는 글 안 쓴다고 군대에 가서는 한참 뜨고 있던 여류시인에게 오밤중에 전화를 했다. 그녀가 정중히 전화를 끊었을 때, 그때도 참 부끄러웠다. 그러나 두고두고 창피한 것은 회사 들어가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 이성복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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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모르게 쉴새없이 입안에서 맴도는 돌림노래처럼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단 한 줄의 글도, 아니 단 한 마디의 말도 끌어 내지 못하고 며칠을, 몇 달을, 숱한 나날들을 그저 흘려 보낸다.
'무엇을'과 '어떻게'가 모두 오리무중이다.
내 속에서 무언가가 고이고 차서 솟아 오를 때까지, 저절로 스며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짐짓 느긋해지려 해도 그건 위로가 안 된다. 그렇게 위로해서도 안 될 일이다.

이성복의 시집을 넘겨보다, 어느 페이지에선가 '쌩까다'란 말을 만난다. 그이가 이런 말을 구사할 줄은 몰랐다. 시인도 나이가 들면서 어깨에 힘을 많이 뺀 모양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신의 부끄러움과 상처를 얘기할 수 있다는 것, 그게 단지 세월의 힘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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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서문에서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 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내게도 할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면, 할 이야기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는 했다. 나는 내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노발대발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의외였다. 그에게 나는 다정스럽게, 거의 애정을 기울여, 내가 참말로 무엇을 뉘우치는 일이란 한번도 없었다고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나는 항상 나에게 일어날 일, 오늘의 일 또는 내일의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판결문이 열 일곱 시가 아니라 스무 시에 낭독되었다는 사실, 그 판결문이 전혀 다를 수도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프랑스 국민(혹은 독일 국민, 중국 국민)의 이름으로라는 지극히 모호한 관념에 의거하여 언도되었다는 사실, 그러한 모든 것은 그같은 결정에서 그 진지성을 많이 깎아 내리는 것이라고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 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 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 카뮈, <이방인>(김화영 옮김,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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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정서적으로, 감정이입해서 하는 책읽기는 자의적인 이해와 해석을 하기 쉬운, 즉 誤讀의 함정에 빠지는 한 길이겠지만, 오늘은 <이방인>이 새롭게, 예언적이고 암시적인 문장으로 읽힌다. 왜일까....... 그 이유를... 나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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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적

K씨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매일 아침 나의 이웃 사람은 축음기로 음악을 틀지. 무엇 때문에 음악을 트냐고? 체조를 하기 위해서라네. 무엇 때문에 체조를 하느냐고? 힘이 필요하기 떄문이라네. 힘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냐고? 도시에 있는 그의 적들에게 이겨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지. 그가 무엇 때문에 적을 이겨야 하느냐고? 그는 먹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K씨는 그의 이웃 사람이 체조를 하기 위해 음악을 틀고, 힘이 세어지기 위해 체조를 하고, 그의 적들을 죽이기 위해 힘이 세어지려고 하고, 먹기 위해 그의 적들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물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먹는 거지?"

 

상어가 사람이라면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상어가 작은 물고기들에게 더 잘 해 줄까요?"
K씨에게 그의 주인집 여자의 딸인 꼬마가 물었다.
"물론이지"하고 그는 대답했다.
"상어가 사람이라면, 작은 물고기들을 위해 식물은 물론이고 동물까지 포함된 각종 먹이를 집어넣은 거대한 통을 바다 속에 만들도록 하겠지. 상어들은 그 통의 물이 항상 신선하도록 할 것이고 어쨌든 각종 위생 조치를 취하겠지. 가령 조그만 물고기 한 마리가 비늘을 다칠 경우, 때가 되기 전에 그 상어로부터 죽어 나가지 않도록, 즉시 붕대로 싸매 주겠지.
물고기들이 우울해지지 않도록 가끔 수중 축제가 벌어지겠지. 왜냐하면 우울한 물고기보다는 유쾌한 물고기가 더 맛이 좋거든.
그 커다란 통 속에는 물론 학교도 있겠지. 이 학교에서 물고기들은 상어의 아가리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법을 배울 거야.
......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은 물고기들의 도덕적 수련일 거야. 그들에게는 물고기 한 마리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놓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과, 그들이 모두 상어들의 말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특히 상어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할 때는 그 말을 믿어야 한다는 걸 배우겠지.
물고기들은 또한 복종을 익힐 때만 이러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걸 배우게 될 거야. 물고기들은 모든 저속하고 유물론적이고 이기적이고 마르크스적인 경향에 대해 조심해야 하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그런 경향을 드러내면 즉시 상어들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배울 거야.
상어가 사람이라면, 그들은 새로운 물고기 통과 새로운 물고기들을 정복하기 위해 물론 서로 전쟁을 하겠지.
그 전쟁들을 그들은 자기들 소유의 물고기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할 거야. 그들은 물고기들에게 그들과 다른 상어들의 물고기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가르칠 거야.
물고기들은 알다시피 말이 없지만, 그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서로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은 발표할 거야.
...... 상어가 사람이라면 또한 종교도 존재할 거야. 그들은 물고기들이 상어의 뱃속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살기 시작할 것이라고 가르칠 거야.
또한 상어가 사람이라면, 모든 물고기들이 지금처럼 서로 똑같은 일은 없을 거야.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감투를 쓰게 될 것이고, 다른 물고기들의 윗자리에 앉게 되겠지. 약간 더 큰 물고기들은 심지어 더 작은 놈들을 먹어 치울 수도 있을 거야.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다음에 더 큰 먹이를 더 자주 얻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더 크고 직함을 가진 물고기들은 물고기들 사이의 질서를 돌볼 것이고 교사와 장교, 물고기 통의 건축 기사 따위가 될 거야.
요컨대 상어가 인간일 경우, 바닷속에는 비로소 문화가 존재하게 될 거야."


브레히트 단편선, <상어가 사람이라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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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가 깊은 상징과 秘意를 가진 이야기로 다가서는 세상은 불행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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