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챈들러의 소설을 읽고 감탄한 것은, 그 작품이 호소해 오는 리얼리티였습니다. 그는, 작가에게 살아가는 데 대한 확고한 자세가 있고, 사물을 파악하는 확실한 시점이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허구를 묘사해도 리얼리티는 반드시 스며 나오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문체'를 모방하기는 쉽지만 '시점'을 모방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챈들러의 방법론 중에 'seek and find'라는 테마가 있다. 그것은, 찾아냈을 때는 찾아내려 했던 것이 이미 변질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것이 미스테리 형태로 싸여 있어서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테마는 나의 작품 세계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챈들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 중에서
[하루키는 스스로, <양을 둘러싼 모험>을 어떤 사람들은 'Big Sleep'이라고 부른다고 말하며, 이 작품을 쓸 때 의도적으로 챈들러의 문체를 빌려 왔다고 고백했다.]
-- 레이먼드 챈들러, <빅 슬립>과 <하이 윈도>(박현주 옮김, 북하우스)의 해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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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만나게 된 두 사람의 '레이먼드'가 있다
한 사람은 레이먼드 카버, 다른 한 사람은 레이먼드 챈들러
(하루키는 잘 알다시피 카버의 작품 전부를 일본어로 번역한 바 있고, 챈들러에 관해서는 위에 인용한 말처럼 그의 '하드보일드한 문체'와 '어떤 것에 대한 추적과 그 결과 밝혀 낸 어떤 것의 변질'이란 구도를 빌려 왔을 만큼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주부터 레이먼드 챈들러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다
챈들러가 만들어 낸 멋진 인물 '필립 말로'에게.......
특히 그의 쓸데없이 멋부리지 않는 냉소적이고 간결한, 그래서 한층 매력적인 화법에.......
사립 탐정인 그는 자기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전 서른 세 살이고, 대학을 다녔었고 필요하다면 아직 영국식 영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제 일에 대해서는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한때는 수사관으로 지방검사인 와일드 씨 밑에서 일했었습니다.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경찰 마누라를 싫어하거든요."
"나도 마음에는 안 듭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일이 뭐겠습니까? 나는 사건을 맡고 있어요. 난 먹고 살기 위해서 팔아야 하는 건 팝니다. 하느님이 내게 주신 약간의 용기와 지성, 그리고 의뢰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괴로움을 감수하는 열성이죠."
필립 말로의 매력이란 저항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이후 거의 모든 미국 사립 탐정들은 '유사- 말로'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심지어 '챈들러레스크Chandleresq'란 용어가 있을 정도라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프카에스크Kafkaesq'란 용어를 떠올리게 된다]
챈들러 소설의 묘미는 역시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의 구축과 이야기의 빈틈없는 구성에 있는 것이겠지만, 내게는 그것과 함께 적절하고 독특한 비유와 뛰어난 묘사라는 특징을 가진 그의 문체에 있었다
- 뜨겁고 딱딱한 석탄빛 눈, 사이좋게 지내려면 꽤나 힘이 들 것 같은 남자의 전형적인 표정
- 천천히, 일자리를 얻지 못한 쇼걸이 마지막 남은 고급 스타킹을 사용하듯 조심스럽게
- 자신의 손을 닦는 장의사처럼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집중력으로
- 시무룩한 시의회 의원만큼이나 기분이 상한 상태
- 나쁜 습관을 기르기에는 아주 좋은 이웃 같은
- 이집트 여신의 자세처럼 몸을 딱딱하게 세우고 턱은 수평으로 들고
- 잠도 푹 자고 별로 빚진 돈도 없는 남자와 같은 목소리
- 교장실에 온 불량 소녀처럼
- 온갖 비바람에도 잘 단련된 승마 기수 같은 강인함
- 수술실에서나 볼 수 있는 미소
- 작은 고드름이 부러질 때와 비슷한 메마른 딸깍 소리
- 그는 검은 눈을 아래위로 천천히 굴리더니 손톱을 불빛에 대고 하나씩 흘긋 본 다음 세심하게 손톱을 관찰했다. 할리우드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온 대로.
- 눈이 어찌나 날카롭게 빛나던지 칼이 스쳐 지나간 자리를 볼 수 있듯이 눈길이 스쳐 지난 자리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몸속의 피가 집을 빌리기 위해 둘러보는 세입자처럼 다시 돌기 시작했다.
- 그의 심장은 짧고 불확실한 중얼거림과 같았다. 그의 사고는 타버린 재처럼 회색이었다.
-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스냅 사진에 자세를 취할 때 볼 수 있는 딱딱하고 반쯤 멍한 표정으로
- 산전수전을 너무 많이 겪어서 그걸 피하기위해 다소 지나치게 영리해진 것 같은 얼굴. 그리고 그 영리한 표정 뒤로는 여전히 산타 클로스의 존재를 믿는 작은 소녀의 순진한 표정도 숨어 있었다.
이런 문장들을 읽고 있다 보면, 저절로 그 인물들의 표정과 성격, 그들이 몸 담고 있는 공간의 공기가 어떤 것인지 '영화 보듯이' 구체적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그러므로, 챈들러에 관한 이런 평가들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냈다. 그 이후로 미국을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 폴 오스터
"챈들러를 '추리작가'란 틀 안에 가두는 것은 그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는, 좋은 소설이 무엇인지, 좋은 묘사란 무엇인지, 매력적인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고, 흡인력 있는 스토리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아는 몇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한다. 그에 대한 이런 평가가 못 마땅하다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펴서 한 대목의 대화나, 한 문단 정도의 묘사를 읽어 보라. 이미 책을 폈다면 한두 페이지를 읽는 것만으로는 책을 덮을 수 없겠지만."
-- 임지호 (출판기획가) / 레이먼드 챈들러, <하이 윈도> 뒷표지에서
챈들러는 자신의 문학론에 관해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나의 지론은, 사람들이 비록 자기가 액션에 관심을 가진다고 믿는다고 해도 사실은 액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또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대화와 묘사를 통한 감정 창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