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그렇게 끝나 버렸지만
그 끝은 그것이 그렇게 끝난 것이라는 시작일 뿐이다
모르기 시작한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들에 대해 살아나는 것이다
이 말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만 말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말 속에는 숨은 무거움과 숨은 가벼움이 있다
-- '가혹한 분말'
사물들은 조용히 어둠을 맞는다
우리는 "아마 그럴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물은 "다만 그럴 뿐"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아무것도 우리를 귀찮게 하는 것이 없다,
귀찮다
있어 왔던 생각
있어 왔던 말
있어 왔던 믿음
있어 왔던 우리는 다시 하고, 느끼고, 믿고,
귀찮다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니,
귀찮다
-- '귀찮다'
여행자는 '바닷가'를 거닐며 '바다'에 왔노라고 높이 소리 지른다.
...... 그러나 과거에는 아무도 바닷가를 거닐지 않았지만
해는 어둠 속에서 바다, 바다가 다시 떠오른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 '기쁨과 슬픔'
우리가 잠시 합일하는 까닭은
죽음과 삶이 둘이 아니기 때문
우리가 하나가 될수 없는 건
완전히 죽지도 완전히 살지도 못하기에.
시체가 충고한다:
전부 살지 못한다!
전부 죽지 못한다!
-- '다른 계절'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순간이 온다
없는 순간이 온다
내 옆에 사람들이 누워 있다
가버리는 순간이 온다
내 옆에 소리가 없다
내가 들은 것은 반쯤은 죽은 소리,
반쯤은 살아서 가버렸다
.................
내가 아는 것은 짜임새 정도,
격(格)이 다시 태어났다
-- '대화'
우리는 그림을 그렸다
지구상의 모든 사물
모두에게 보여지는 유일한 것을 우리는
아직 그려내지 못한다
우리는 그림을 그렸다
단 한 가지 사물
어디에나 있는 모두의 것을 우리는
아직 그려내지 못한다
-- '벽화'
김록 시집 <광기의 다이아몬드> (열림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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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호수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시는 '이것이 바로 호수이다'라고 보여주는 것"이라는 비유를 든 사람이 누구였던가
김록, 이 낯선 시인이 보여주는 호수의 광경은 굉장하다!
그가 펼쳐 보여주는 호수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몸에,아니 머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런 생각,깨달음, 밝은 눈은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드는 걸까
"잘 말함은 잘 삶의 한 요소이다"라는 명제는 논리상 그 순서가 맞는 것일까
문득, 아마 '호수'라는 말 때문에 이어진 연상이겠지만, 이 시들과 별 상관 없는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호수로 가는 세 갈래 길>이란 소설이 떠오른다
한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만한 소설을 한 편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다
김록의 첫 시집 제목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싶다
"뭐야, 나를 자극하자는 건가?
'자네가 가진 광기의 에메랄드는
거지의 동전만도 못해'라는 말로?"
-- 마야코프스키, '바지를 입은 구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