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셔 보라구." 라비크는 조앙에게 말했다.
그녀는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웨이터는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라비크를 쳐다보았다.
"전 이런 것은 처음이에요"하고는 그녀는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이건 마시는 게 아니라..... 그냥 숨만 들이쉬면 되는군요."
"그렇습죠, 마담." 웨이터는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알고 계시군요."
"라비크." 조앙이 계속했다. "당신은 위험한 짓을 하고 계세요. 이런 칼바도스를 마시고 난 후에는 다른 것은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어질 것 같아요."
"천만에! 다른 것도 마실 수 있지."
"그렇지만 언제나 이것을 생각할 거예요."
"좋지 뭘 그래. 그럼 당신은 낭만주의자가 될 거요. 칼바도스적 낭만주의자가."
"그럼 다른 것은 맛이 없어질 거 아니에요?"
"그와 반대지. 다른 것까지도 제 맛 이상의 맛이 나게 되지. 말하자면 다른 칼바도스를 동경하는 칼바도스가 된단 말이야. 그리하여 칼바도스는 절대로 일용품이 아닌 게 되거든."
조앙은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리석은 소리 마세요. 당신도 알고 있으면서."
"물론 어리석은 소리지. 그러나 우리들은 그 어리석은 것으로 살아가고 있거든. 사실이라는 말라빠진 빵조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이 사랑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관계가 있고말고. 그건 사랑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역할을 하거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은 단 한 번 연애를 할 것이며, 다음 것은 모조리 싫다고 할 것이 아니겠어? 그런데 자기가 버린 사람에 대한 동경의 찌꺼기가 새로 나타나는 인간의 머리에 둘러씌우는 후광이 되는 거야. 말하자면 전에 무엇인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새로운 사람에게 일종의 낭만적인 빛을 더하게 되는 것이란 말이야. 이것은 경건하고도 낡아빠진 속임수이지만."
에리히 레마르크, <개선문>( 홍경호 옮김, 범우사), 199 -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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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이 대목은 술을 매개로 한 가장 아름다운 대사 중 하나이다
<개선문>은 어찌 보면 칼바도스란 술에 보내는 송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소설이 시작되면서부터 끝날 때까지, 그리고 주요 대목마다 인물들은 칼바도스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거나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말하는 대신에 술을 마신다
언젠가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일찌감치 소설가가 되기를 포기했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처음 <개선문>을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삼중당 문고판'을 통해서였다(이 대목에서 문득 장정일의 '삼중당 문고'라는 시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까......)
그 무렵은 내가 감히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도 아니었으므로, 글쓰기를 포기하고 말고 할 건 아니었고, 다만 내게도 <개선문>의 음울하고 나직하게 가라앉은 그 분위기와 라비크와 조앙 마두라는 개성적인 두 주인공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이만큼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개선문>을 읽었다, 천천히, 칼바도스의 맛을 음미하듯, 아껴 가며......
어제 드디어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오래 가슴에 품어 온 연인을 떠나 보내듯이 허전하면서도 무언가로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나는 라비크, 이 남자에게 완전히 감정이입되면서 매료당했다
이제 와서 내 인생의 이상형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그는 정말 나의 '이상형'이라고 할 만했다
겉보기로는 냉소적이고 적당히 퇴폐적이고 관계에 대해 차갑고 무책임한 듯하지만, 가슴속에는 '진짜'와 '완전함'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있는 사람, 그런 진실과 완전한 관계가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스스로 먼저 제 가슴에 상처를 내고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
라비크와 조앙 마두
이토록 잊을 수 없이 강렬한 인물을 만들어 낸 것만으로, 이 소설의 다른 결함들은(그런 게 있다면) 깨끗이 묻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비크 식으로 말하자면 "한번 이런 인물들과 조우하고 나면 다른 것까지도 제 맛 이상을 내게 되는" 셈인 것이다, 그런 '기막힌 순간'을 한번 맛보고 나면 소설은 더 이상 한낱 소설이 아닌, 다른 소설을 동경하게 되는 칼바도스적 소설이 되는 것이다
헌데, 이번에 <개선문>을 다시 읽으며 내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나는 오랫동안 <개선문>을 떠올릴 때마다, 라비크와 조앙 마두라는 인물의 매혹적인 아우라를 아련히 기억하면서, 이런 삽화를 겹쳐 떠올리곤 했었는데.... 그 기억의 한 갈피가 완전히 착오였다는 걸 이번에 확인받은 것이다
일 년 전쯤 쓴 작품에 이런 구절이 있다
"혼자 있을 때면 하릴없이 그저 국어 사전의 첫 장부터 차례대로 넘겨보며 낱말 풀이를 읽어 나가는 취미를 가진 사람처럼, 누구였더라, 레마르크의 <개선문>에 그런 인물이 나왔던 것 같은데, 어찌 된 까닭인지 그 소설의 상세한 대목들은 희미해져 버렸어도 그 사전 읽기 취미와 '조앙 마두'라는 여자의 이름만은 지금까지 선명하게 내게 남아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사전의 책장을 넘기며 자신과 대면하는, 아니 자신을 잠시 벗어나는 습관을 가진 사람처럼, 나는 곧잘 시계 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곤 한다. 시계 소리 저편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내게 말을 걸어오는 누군가의 깊은 목소리를 기다리며......"
헌데 아무리 책장을 넘겨봐도 라비크는 호텔 방에서 혼자 있을 때 사전 따위를 읽어 나가는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인물은 누구란 말인가......
안개가 잘 끼는 낯선 도시(파리로 기억하는데)에 이방인으로 와 있는 한 남자가 허름한 호텔방에서 밤마다 혼자 '사전 읽기'로 시간을 죽여 가는 풍경...... 그런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이 <개선문>이 아니라면....... 난 저 문장들을 다시 고쳐 써야 한다, 그것도 뒷맛이 씁쓸한 일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나의 잘못된 기억, 그렇게 각인된 오류의 실체가 궁금하고 궁금하다
누가 나의 잘못된 기억의 한 갈피를 바로잡아 줄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