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없는 것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Don Juan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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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09-03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가져갈게요.

에레혼 2004-09-0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님의 방에 놀러 갈게요.
 
파이트 클럽 메피스토(Mephisto) 1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파이트 클럽>

(척 팔라닉 원작, 최필원 옮김, 책세상)

(데이비드 핀처 감독, 브래드 피트, 에드워드 노튼 출연))

 


                   우주가 마음대로 되는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산산이 부숴 버렸을 것을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우주를
                        새로이 만들어 보았을 것을

                        오머 하이얌의 <루바이야트> 중에서
 

  
 

 

 

 

 

 

 

 

 

 


소설 <파이트 클럽>을 뒤적이는 동안도 너는 때때로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온라인 쇼핑몰을 기웃거리며 새로 발견한 상품들에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지난주에 택배로 도착한 물건이 모니터 상에서 보던 것과 달라 실망한 기억을 채 지우지도 못했는데, 아직 구입을 미루고 있는 상품들에 대한 미련으로 짬이 날 때마다 '즐겨찾기'에 들어있는 쇼핑 사이트에 들르곤 한다. 너는 네가 작성한 '즐겨찾기'가 군더더기 없이 단순 명쾌한 네 자신의 '존재 증명서'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새로운 주민등록증. 네 영혼은 그곳에서 즐겨 머무르고, 네 시간은 그곳에서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다!
  저녁 때 9시 뉴스와 드라마 사이 채널을 돌리다가 홈쇼핑 채널에 대책 없이 눈길이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효리의 "텐 미니츠" 리듬에 맞춰서 탱크 톱과 핫팬츠 차림의 깡마른 여자들이 런닝 머신 위를 경쾌하게 달리고 있다. 그 여자들은 행복과 환희의 미소를 공식적인 표정으로 선택하고 있다. 그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너도 하염없이 그 트레드밀 위를 달려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 그렇게 함께 달리다 보면 저 여자들의 미소가 너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네 머릿속을 뿌옇게 채워 간다. 화면 속의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도 없이 일 초 일 초 줄어드는 시간을 알려준다. 저 시계가 제로가 되기 전에 서둘러 저 행복의 대열에 끼어 들어야 할 것 같은 초조감이 든다. 저것 봐, 서두르라구! 보너스 상품과 경품 추첨의 행운까지 함께 날아가 버리기 전에.
  내일이면 거대 기업의 반열에 진입할 홈쇼핑 업체와 전국을 거미줄처럼 뒤덮고 있는 온라인 쇼핑몰과 택배 업체와 공동 구매와 특별 사은 행사와 카드 결제와 쇼핑 중독과 불면증 환자들의 세상이여, 그 미래는 영원 불멸 아니면 완전 파멸일 터!
  너는 지친 잠 속에서도 그 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있다. 꿈속에서 너는 꿈꾼다. 그만 이 헛된 욕망의 트레드밀 위에서 내려가고 싶다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같은 리듬과 속도로 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모든 것이 달라진 새로운 세상을...... 세상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산산이 부숴 버리고 싶다고.      


 
자동차 회사의 리콜 심사관인 나(에드워드 노튼)의 유일한 즐거움은 스웨덴산 고급 가구 회사 카탈로그에 소개된 가구를 모으고, 유명 상표의 물건들을 구입하는 것. 이케아 소파와 소니 텔레비전, IBM 컴퓨터, 스타벅스 커피에 아르마니 넥타이가 가득한 출장 가방……. 그러나, 나는 일상의 무료함과 공허함 속에서 늘 새로운 탈출을 꿈꾼다. 나는 출장 때마다 비행기가 추락하기를 바라고, 암으로 죽어 가는 이들이 부럽고, 세상은 불만스럽기만 하다.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은 야행성이다. 그는 남들 다 자는 밤에 영사기사 일을 한다. 필름 한 편이 다 돌아가면 정확한 시간에 다음 필름으로 교체한다. 그는 가족 영화 상영 때 포르노 필름을 한 커트씩 끼워 넣는다. 유명 배우가 더빙한 만화영화에 타일러의 흔적이 순간 순간 번뜩이는 것이다. 타일러는 호텔의 연회 웨이터로도 일한다. 그는 요식 산업의 테러리스트였다. 디저트에 방귀를 뀌고 야채엔 재채기를 하고 버섯 수프엔 오줌을 갈긴다.

  타일러가 조직한 ‘파이트 클럽’에는 규칙이 있다. 1조: 클럽에 관해 발설하지 않는다. 2조: 파이트 클럽에 대해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3조: 상대가 뻗거나 비명을 지르면 싸움을 멈춘다. 4조: 일 대 일로만 붙는다. 5조: 한 회에 한 번만 싸운다. 6조: 상의와 신을 벗는다. 7조: 필요하면 싸움을 계속한다. 8조: 여기 처음 온 사람은 반드시 싸운다.

  파이트 클럽 회원들이 조금씩 변화한다. 예전엔 열 받으면 집 청소를 하고 가구를 닦았다. 전 같으면 보험금을 듬뿍 타서 새 콘도를 보러 다녔겠지만 이젠 다르다. 늘 다음 모임만 생각한다. 이젠 피 맛이 역겹지 않다. 싸우고 싶은 욕망, 타일러는 그 욕망을 드러냈을 뿐이다. 비명소리를 덮는 둔탁한 파열음 피를 뿜으며 내뱉는 신음. 클럽엔 생명력이 넘쳤다. 승패는 상관없었다. 말도 필요 없었다. 오순절 교회의 방언처럼 터지는 괴성, 한바탕 붙고 나면 모든 게 담담해졌다. 구원받은 그 느낌, 파이트 클럽은 타일러가 세상에 준 선물이었다.

  우린 그 누구보다 강하고 똑똑하다. 헌데 그 능력이 말살되고 있다. 주유소, 식당, 사무실에서 배운 놈들에게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 우린 광고 속의 고급 차와 옷을 사려고 억지로 일을 한다. 우린 갈 곳 없는 역사의 고아다. 2차 대전도, 세계 대공황도 못 겪었지만, 이젠 우리의 삶이 영적인 공황을 겪고 있다. TV는 환상을 심어 준다. 백만장자와 스타의 헛된 환상을… 그 꿈이 깨어질 때 우린 열을 받는다. 자, 이제 숙제를 하나 내주겠다. 생판 모르는 자에게 시비를 걸어라. 싸움을 걸어라. 이제 3분 남았다. 곧 폭발할 것이다. 여긴 대 참사를 감상할 로얄석, ‘초토 작전’ 파괴위원회는 12개 건물을 폭약으로 도배했다. 2분 후면 연쇄 폭발로 몇 동네가 쑥대밭이 될 것이다. 이 총과 폭탄과 혁명이 1분 후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우린 평범한 존재다. 고로 우린 세상의 쓰레기다! 넌 변화를 원했지만 혼자선 할 수 없었어. 그래서 상상해낸 게 나, 타일러야. 난 네게 없는 걸 다 갖췄어. 외모, 정력, 능력, 게다가 자유로움까지! 타일러는 없어. 누구나 매일 상상 속에서 변화를 꿈꾸지만 너처럼 실천하진 못해. 넌 때론 날 지켜보기도 하고 때론 네 자신이 되지. 넌 조금씩 변해가고 있어. ‘타일러 더든’으로!

  (영화 <파이트 클럽>의 대사 인용)
 


  마돈나와 마이클 잭슨, 롤링 스톤즈와 스팅 등 여러 팝 스타의 뮤직 비디오와 CF에서 실력을 닦으며 성장해 온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역설적이게도 영화 <파이트 클럽>에서 자본과 기술 문명과 상업주의에 영혼을 저당 잡힌 현대인의 소외와 절망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도발적이고 현란하면서 음울한 조롱의 어법을 지닌 '데이비드 핀처' 표의 영상으로.
  “인간은 사냥을 하도록 만들어졌지만 지금 쇼핑을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어. 죽일 것도 없고, 싸울 것도 없고, 극복해야 할 것도 없는 우리는 거세된 세상에서 태어난 거야.”
  죽일 것도 없고, 싸울 것도 없고, 극복해야 할 것도 없고, 탐구해야 할 것도 없는 이런 거세된 세상에서 태어나는 것이 오늘의 '보통 사람'이다. 수많은 가능성은커녕 단 한 가지의 가능성도 주어지지 않은 인물, 정말 어떻게 자기 인생을 바꾸어야 할지 선택의 여지나 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런 인물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현대인의 비극은 바로 그가 사는 세상이 별로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다 구현되었고 그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대한 관심과 희망은 고맙지만 그대는 그저 인터넷이나 접속해 주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이때 이런 무기력한 내 앞에 유령처럼 나타난 타일러는 말한다.
   "컴퓨터 시대? 신용 카드 사회? 모든 개인의 채무 기록이 폭발하면 인류는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자기 계발은 자위 행위에 불과해. 오직 폭력이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이며,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자유를 얻을 수 있어.”
  타일러라는 인물은 물질주의 사회로부터의 '일탈'을 소원하는 자아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인공이 타일러를 때리는 장면은 허상으로 가득 찬 자신의 정체성에 반기를 들고 그 틀을 깨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로 해석된다. 때리고 맞으면서 "폭력과 파괴를 통한 정체성 회복 "을 갈망하던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왜곡시키고 허상으로 채워놓은 물질 지상주의 사회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타일러가 만들어 파는 '비누'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품'이다. 지방 흡입 시술소에서 버려진 사람의 지방으로 만들어진 고급 비누(!)가 불티나게 백화점에서 팔려나간다. 비누는 단지 그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양잿물과 비슷해서 무엇인가를 파괴하고 씻어내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폭력에 연관시켜 보면 영화 속에서 '비누'가 갖는 의미는 더욱 더 커진다. 결국 적당한 폭력은 비누와 같고, 과다한 폭력은 잿물과 같다. 파이트 클럽은 새로운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폭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쎄븐>에 이은 데이비드 핀처의 진정한 걸작 <파이트 클럽>은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심오한 묵시록의 세계이다.  데이비드 핀처는 이 영화가“남자다움에 대한 우리의 혼란과 복잡함에 대한 공격, 그리고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와 소비 문화에 거세당한 한 남자의 자기 분열적인 욕망과 초월에 관한 이야기. 입 속에 총을 쑤셔넣고 살아난 그 남자는 자기의 분열 과정을 함께 해 온 연인과 같이 마천루가 즐비한 야경을 바라본다. 후기 자본주의의 상징인 신용카드사와 금융회사의 건물들이 마치 9.11의 무역센터처럼 하나둘 허물어져 내리는 그 황홀한 광경을. 그것은 모든 것이 파괴되는 순간이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핀처 감독은 이 영화의 마지막을 자신 있게 '해피 엔딩'이라고 말하고 있다.

  <파이트 클럽>은 이야기의 독특함과 짜임새 있는 구성뿐 아니라 개성 살린 연기, 감각적인 영상, 현란한 카메라 워킹과 편집, 디테일한 음향 효과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진짜 '영화' 그 자체라 할 만하다. 특히 두 주연 배우의 연기는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겨 주는데, 에드워드 노튼의 얼떨떨한 표정과 착 가라앉은 나레이션은 '나'의 분열과 혼란을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고,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브래드 피트의 연기는 절정에 다다른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브래드 피트는 <가을의 전설> 류의 매끈한 역할보다는 '망가지는 역할'을 할 때 그 매력이 도드라지는 배우라는 사실을 재삼 확인시켜 준 영화이기도 하다.

  1996년에 발표한 소설 <파이트 클럽>을 통해 인상적인 '도플갱어'를 창조해 낸 작가 척 팔라닉은 컨테이너 열차의 디젤 엔진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파이트 클럽>은 첫 번째 소설 <인비저블 몬스터>가 너무 파격적이고 논쟁적이란 이유로 출간을 거부당하자 출판업자들에게 보복할 생각으로 씌어진 작품이라는데, 이 소설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고도 널리 알리게 된 셈이다. 그 뒤 몇 편의 소설을 통해 시종일관 긴박감으로 몸서리치게 하는 어투와 광기, 엉큼하고 신랄한 풍자와 잔인하고 냉소적인 시선은 척 팔라닉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는 영화 <파이트 클럽>을 통해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 브래드 피트의 섹시한 입술이 부러워 실제로 입술의 볼륨을 높여주는 기구를 구입할 정도로 괴짜라고 한다.

  광고를 통해 성장했으면서 소비 문화에 길들여진 현대인을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 세계에서 손꼽히는 스타 배우 커플이자 부자인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타일러 더든' 역, 자신의 원작 영화에 출연한 배우의 섹시한 입술을 부러워해 입술 볼륨을 키워주는 기구를 사들이는 작가, 그리고 <파이트 클럽>과 만나는 동안에도 홈쇼핑 채널과 온라인 쇼핑몰을 기웃거리며 멋진 상품들에 쉽게 매혹 당하는 너...... 여전히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의 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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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09-03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이트 클럽>, 정말 좋은 영화이지요. 저는 소설보다 영화가 한 수 위라는 느낌이었어요. 오히려 영화가 원작의 이미지와 메시지를 더 잘 담아내고 있다고 할까요. 강렬한 영상과 울림이, 브래드 피트의 그 비아냥거리는 표정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근데, 시아님, 이 야밤에 산책 중이신가요? 알라딘의 숲길을......

urblue 2004-09-03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저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소설을 볼까 하다 척 팔라닉의 다른 작품 <서바이벌>을 골라들었는데, 좀 실~망 했답니다.
책이 아니라 DVD를 구입해야 겠습니다.

2004-09-07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09-0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실은 아침에 이 답글을 봤지만,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몰라 좀 묵혀 두었습니다.
욕망... 거대 자본의 음모... 멈출 수 없는 쇼핑... 존재의 증명 또는 위안
저도 늘 그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며, 현기증을 느끼고 있답니다.
이 욕망이 진정한 내 것인지, 학습되거나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인지도 의심할 여력도 없이,
머릿속이 붕붕거리면서도 멈추질 못합니다.
실은 이 서재를 만들고 나서도, 처음의 순진한 기대와는 다르게,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욕망에 또 쫓기고 있는 자신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습니다......

2004-09-1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못 봤어요..보고 싶네요. 그리고 저 두 번째 사진..영화 속 장면 일 테지요..강렬합니다.

에레혼 2004-09-1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여기도 들르셨군요
보고 싶다는 그 욕망이 무색하지 않을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브래드 피트, 이 영화에서 '진짜 괜찮은 배우'라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요
가을 밤에 보기에는 너무 가슴을 싸하게 만들려나......

프레이야 2004-09-16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인사드려요. 참나님 서재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리뷰 정말 멋집니다.
은밀한 생, 도 그렇구요. 좀 가져갈게요.^^
 

"그녀는 무엇으로 가득차 있었나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모르겠소. 쉽게 떠오르지 않소. 아마도 그녀 자신으로?"
"하지만 그녀는 누구죠?"
"모르겠소."

....................

"그녀는 모든 것에 대해 닫혀 있었으며, 또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기도 했지요. 두 가지 다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소. 그녀의 가슴 속에는 아무것도 머물러 있지 않았으며, 그녀는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았지요. 그녀는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는 대문 없는 집과 같은 사람이었소."

-- 마르그리트 뒤라스, <영국 연인>(번역판 제목:고독한 끌레르), 93-95쪽, 이혜정 옮김, 문예산책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 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7-8쪽,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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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사흘간의 행로.......

우리는 애초부터 '말을 하는 존재'였던가

나의 '말'을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
어떤 포즈로, 치장으로, 멋부림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그리하여 '밀쳐내고 있다'는 느낌

그런데, 그게...... 단지 오해일 뿐일까


그럼에도 나는 왜 또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
혼자의 중얼거림
나를 사라지게 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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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0-23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질은 어떤 한정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내며, 원자적 사건들은 확실성 있게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 보이는 편이다.
......... 원자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러한 확률로 표현된다. 우리는 원자적 사건을 결코 확실성 있게 예언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 같은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확률 모형들'은 사물의 확률이 아니라 상호 연관의 확률을 나타낸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를 포함한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 83-84쪽, 범양사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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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이상하게 정신이 말똥말똥 맑은 상태에서(근래에 드물게 찾아온 상태...) 이 구절을 읽고 있을 때 강렬하고 인상적인 스파크가 일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올려다본 하늘에서 허공을 가로지르며 별똥별이 떨어지듯,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섬광을 일으키며 무언가가 선연히 지나가고 있었다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려는 경향'을,
확실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물질이, 원자가, 원자적 사건들이, 나라는 존재가!

그리고 그 물질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어떤 그물의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꼭 나여야만 했던 것도 아니며,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통과해 온 그 그물이 아니라 다른 그물 속에서였다면......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나는 나 아닌 그 무엇으로 바꾸어질 수도 있다
나와 비슷해 보이나 전혀 다른 입자들로 바꾸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입자들은 나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다른 입자들과 연결되며, 따라서 나는 그 입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셈이다
나라는 입자는 지금 어떤 형태로 '존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걸까
지금 내 안에서는 어떤 입자적 사건들이 '발생하려는 경향'을 꿈틀거리고 있는 걸까

이런 '현대 물리학의 발견'은,
이 미친듯한 여름밤, 자꾸만 견고해지고 자폐적인 성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나라는 그 부동형의 입자에 묶여서 헐떡거리는 나를 훌훌 풀어 주었다

속으로 은근히 음미하고 있는 내 '잘난멋'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니며, 역으로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이나 관계에서 못마땅해하는 것도 다 나의 파장의 영향 아래, 상호 연관 관계 속에 있는 것이므로 나 혼자 그 그물망 밖에서 관조하며 툴툴거릴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책장을 더 넘겨 보니 이 책의 뒷부분에는 <화엄경>의 이런 구절을 옮겨 놓고 있다

"인드라 하늘에는 진주 그물이 있고, 그 그물들은 잘 정돈되어 있어 만일 사람이 어떤 하나의 진주를 보면 다른 모든 것들이 그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 내의 각각의 대상물들은 단지 그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대상물들을 동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각각의 대상은 서로 다른 모든 것이기도 하다. '모든 티끌의 입자 속에도 무수한 부처들이 현존한다.' "

 

 

 

 

 

 

 

 

 

 

 

 

 

 

 

 

 

 

 

 

 

 

 


윌리엄 블레이크 역시 이런 지혜를 간파했던 모양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그리고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하여,
너의 손바닥에 무한을
그리고 하나의 시간에 영원을 간직하라."


내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싫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그립기도 하다
지나왔으나 진정으로 다 살지 못했던 그물들을 돌아보는 대신에
지금 막 통과하고 있는 이 시간의 망, 관계의 망을 온몸으로 잘 지나가자고
자신에게 얘기한다
그 말은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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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이 가서 혼자서 앉아 있을 수 있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방이나 아니면 공간이, 아무 곳에라도, 있었으면 하고 꿈꾸었다.

방은 평범하고 별 특징이 없었으며, 수전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런 방이었다. 그녀는 가스 난로에 1실링을 넣고는, 음침한 창문에 등을 기대고 더러운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수전은 자신으로부터 압박감이 물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전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고독을 좀더 자주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도 그녀를 알지 못하고 아무도 그녀를 걱정해주지 않는, 절대적인 고독 말이다.

그녀는 이 방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글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한 다음,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서, 팔을 뻗고, 미소지으며, 자신의 익명성을 소중히 여기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 그녀는 창턱에 기대어, 거리를 내려다보았고, 거리를 지나가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일식--세계 여성 단편 소설선>>, 한국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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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결혼 이후, 지난 12년 동안 단 한 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고, 자기 자신의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이제 다시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느낀다.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부턴가 오전에 집을 나와 교외의 쇠락한 작은 여관의 19호실을 '자기만의 방'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 방에서 그녀는 '혼자 있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남편과 네 아이가 있는, 아무 문제 없이 화기애애한 가정 속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돌아간다.
그녀는 그 혼자만의 방, 혼자만이 존재하는 시간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에게 주당 5파운드를 달라고 한다. 남편은 이유를 묻지 않고, 마치 아내에게 돈을 지불하듯이, 일요일 밤마다 5파운드를 준다.
그러나, 남편은 그 '돈의 용도'에 대해 그저 무관심한 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 그녀의 '19호실'은 더 이상 '익명의 공간', '혼자만의 방'으로 남아 있지 못하게 돼 버렸다.

"19호실은 똑같았다. 수전은 예리하고, 섬세하게, 조사하는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그녀는 곰팡이 냄새, 그리고 땀 냄새, 섹스 냄새로 가득한 딱딱한 침대에 누웠다.
수전은 녹색 공단 커버에 등을 대고 침대에 누웠지만, 다리가 추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는 서랍장 맨 밑에서 접힌 채로 놓여 있는 담요 한 장을 찾아내었고, 조심스럽게 다리를 덮었다. 어두운 강 속으로 천천히 떠밀려가면서, 방안으로, 폐 속으로, 머리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희미하고 부드러운 가스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그곳에 누워 있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 비평서인 <자기만의 방>을 완벽하게 문학적으로 성취해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어쩔 수 없이 버지니아 울프와 실비아 플라스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앞으로 백 년 정도 살게 되고 우리들 각자가 연간 오백 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첫방에서 약간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본다면, 그리고, 하늘이건 나무이건, 그 밖의 무엇이건 간에 사물 자체로서 보게 된다면."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오진숙 옮김, 솔) 중에서


꼭 한 해 반 전에 나 역시 생애 최초로 '혼자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
그저 사방의 벽과 천장으로 닫혀 있는, 그러나 고독과 홀로 있음의 자유와 가능성으로 무한히 열려 있는 그 방에 처음 들어서던 순간의 감격스러움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 방의 공기마저 내가 이제까지 머물던 세계의 그것과는 다른, 아주 환상적인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 방에서 쓸 커피 잔 하나, 휴지통 하나를 사면서도 신접살림을 준비하는 새색시처럼 마음이 연한 장미꽃 빛깔로 발갛게 달아오르곤 했었다. 아, 나만의 방, 나만의 방, 나만의 우주인 것이다!
그 방의 문을 내 열쇠로 처음 열던 날, 나는 어떤 선언처럼, 서점으로 가서 한 권의 책을 샀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요 며칠, 도리스 레싱을 읽으며, 아, 이건 바로 내 이야기이며, 내가 썼어야 했으며, 내가 너무나도 잘 쓸 수 있었던 얘기라는 걸 절절히 느꼈다. 허나 어쩌랴. 이미 레싱이 '그녀의 19호실'을, 나만의 방과 너무도 닮은 그 방을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내 버린 것을.

다시 나만의 방을, 천천히, 세심하게, 예리하게 살펴본다.
버지니아 울프나 도리스 레싱이 느끼고 보았지만 미처 말하지 못한 그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므로....... 휴지통이나 화장실 안이라도 뒤져 보는 수밖에.
"글을 쓰는 여성은 그 누구든지 간에 생존자이다"라는 틸리 올슨의 말을 격언으로 삼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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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2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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