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이 뭔가요?"
"최근에 스트레스를 좀 심하게 받았다든가, 많이 피곤했다든가, 한마디로 몸의 균형이 깨졌던 탓이지요."
의사는 심상하게 대답했다.
늘 듣게 되는 병인(病因). 스트레스, 균형이 무너진 상태, 피곤함....... 그렇다면 나는 1년 365일 내내 특정한 병증이 줄기차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걸 드러내 보이려는 고질적인 습성과 포즈 때문일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무얼 입증하려는 걸까.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가만히 두고 보면 꽤 매력적인 부분이 많다는 것, '유용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아름답기는 한 사람'이란 걸 노골적이지 않게, 일정한 격조를 유지하면서 입증해 보이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내가 너무 오랫동안 벗지 못한 탓에 마치 내 피부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는 낡고 정든 겉옷이자 아늑한 보호막이다.
의사는 덧붙여 설명했다.
"누구나 다 이런 정도의 염증은 갖고 있어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만 지금처럼 균형이 깨졌을 때 염증을 바로 치료해 주지 않으면 그 다음엔 곰팡이균이 번식하게 되지요. 세균의 번식은 신체의 균형을 잡으려는 항상성 기능의 일종이에요."
어쩔 수 없는 어색함과 위축감과 불안감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에게 의사는 마치 간편한 점심 메뉴를 추천하듯 '1일 투약 요법'을 권했다.
"하루에 1회, 한꺼번에 네 알의 약을 먹음으로써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어요. 다만 약효가 센 탓에 좀 어지럽고 부담이 느껴지지요. 하지만, 간편하고 짧은 시간에 치료가 되기 때문에 요즘은 웬만하면 다들 1회 요법을 선택해요."
"혹시 부담을 느낀다면 며칠에 나눠 투약하는 방법도 있어요. 부담은 적은 대신 좀 지루하지요. 어떤 걸 선택하시겠어요?"
나 역시 대세를 좇아 한 방에 끝내는 쪽을 선택했다. 염증 증세를 오래,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조금 전 1회 요법의 투약을 실시했다. 한꺼번에 네 알. 흰색의 알약 세 개와 분홍색 한 알. 그 성분이 무엇인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약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몸에 흡수되고 있다.
몸의 동작과 생각의 속도가 행진곡의 리듬으로 점차 느려지고 있으며, 나 자신과의 부드러운 거리와 결락감이 느껴진다. 물 속에 파랗게, 혹은 검게 풀어지고 있는 잉크처럼 퍼져 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내 밖의 나. 이 나른하고 느슨하고 몽롱한 상태가 은근히 매혹적이다.
이럴 때야말로 나는 내 몸에 굳은살처럼 박혀 있는 장식을, 허영을, 포즈를 벗어 던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마음이 들뜨고 기쁘다. 잠시나마 순하고 투명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침에 깨어나 이 순간의 치기와 자유로운 놓아버림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Ashram, Spirit Of The Rising 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