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차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
노랫소리에 맞춰 계집아이들은 폴짝폴짝 뛰며 고무줄을 넘었다. 오래 손에 쥐고 있으면 손바닥에 노릿한 고무 냄새가 배어드는 까만 고무줄. 땅바닥에 놓고 좌우로 재빠르게 흔들기도 하고, 1단, 2단... 외치며 고무줄을 발목에서 무릎께로, 다음은 허리께로, 가슴까지 차차 올리면서 각자의 유연성과 리듬 감각을 다투기도 했다.
고무줄 놀이에 감성적인 노래나 천진난만한 내용의 동요만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원숭이 똥구멍은 빠알개"로 시작해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으로 끝나는 노래에 이어 댓구를 이루듯이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을 외치기도 하고, 종종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같은 뜬금 없이 비극적인 노래도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곤 했던 것이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그 골목에는 본디 누구네 것인지 모를 나무로 짜인 널따란 평상이 하나 펼쳐져 있었다. 짝이 맞지 않는 경우에 아이들은 골목 어귀의 전봇대나 평상의 다리에 고무줄의 한쪽을 매어놓고 폴짝거렸는데, 그때 전봇대나 평상은 훌륭하게 고무줄놀이의 한 멤버가 돼주었던 셈이다.
동네 골목길에 놓여 있던 그 평상은 막 도시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던 어지럽고 어려운 시절에 전통적인 농경 사회의 촌락 어귀에 서 있던 느티나무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나무가 삭아 가기 시작하면 그 위에 알록달록한 비닐 장판을 깔아 놓아 방수 기능을 부여하기도 했던 평상. 우리는 곧잘 그 평상 위에서 군것질거리를 먹기도 했고, 낮잠 한숨을 자기도 했다. 그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건들거리며 전날 밤에 본 연속극 이야기를 재잘거리거나 다른 아이 흉을 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 골목과 평상에서 형성됐던 얇고도 깊은 공감의 순간들, 그리고 예민한 아이들의 가슴에 쉽게 상처와 충격으로 번져 가던 숱한 소문과 쑥덕거림들...... 아니, 어쩌면 이건 나의 추억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에 왜곡되거나 이리저리 콜라쥬된 한 시절의 조각 풍경인지도 모를 일.
그 골목의 한 모퉁이를 차지했던 집의 마당에는 구박하면서 한 식구로 정들어 가던 똥개 마냥 볼품없으면서 정겨운 작은 화단이 있었다. 대개 그 시절의 화단에는 노랗고 발그란 빛깔에 얇고 길다란 종 모양의 분꽃이나 붉은 닭 벼슬 같은 느낌을 줬던 맨드라미나 참하고 여린 계집아이 같은 봉숭아, 나팔꽃과 칸나 따위가 계절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을 같이 했다.
골목 풍경을 찍은 김기찬의 사진들에 자꾸 마음이 이끌렸다. 그 이끌리는 마음의 밑자락에 나의 이런 사적인, 그러나 순전히 나의 것만은 아닌 풍경 몇 조각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헌데 박완서의 질문법을 잠시 끌어오자면, 그 골목의 평상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그 골목 안 마당의 분꽃과 봉숭아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