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제 (외) 범우 비평판 한국 문학선 24
강경애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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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애(姜敬愛)는 보통 동반자 작가로 불리는 사람이다. 동반자 작가라 하면 첫머리에 떠오르는 이들은 이효석(李孝石)과 유진오(兪鎭午)이다. 1920년대 후반 이들은 계급적 인식을 내 비친다. 이효석은 1928년에 <도시와 유령>을, 유진오는 1931년에 <여직공>을 발표한다. 허나 이후 이들의 행보는 동반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크게 노선을 탈바꿈한다. 이효석은 30년대에<돈(豚)>(1933), <들>(1936), <산>(1936), <메밀꽃 필 무렵>(1936) 등을 발표한다. 제목에서도 보이듯이 이들 작품은 사회를 떠나 자연 속에서 행복을 찾는 고립된 인간을 주요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특히 <돈>에서는 성애(性愛)의 탐닉을 소재로 삼고 있다. 유진오는 1938년에 <창랑정기(滄浪亭記)>를 발표하는데 창랑정에 얽힌 이야기를 회고하고 있다. 유진오의 이후 행보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동반자 작가로서의 강경애는 이들과 썩 다르다. 강경애는 줄곧 가난, 소시민, 민중, 계급 등에 관심을 쏟는다. 그녀는 대표작인 <인간 문제>와 더불어 많은 단편들을 통해 한국 민중의 모순적 삶을 핍진하게 탐구하며 그려내고 있다.

  <원고료 이백원>(1935)은 자전적인 작품이다. 가정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부부 싸움을 소재로 삼고 있다.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수신자는 K라는 화자의 여동생이다. K는 이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려 한다. 화자는 그녀에게 최근에 자신이 겪은 바를 중심으로 조언을 건넨다. 화자는 소설가인데, 요사이 D일보(동아일보인 듯)에 장편을 연재하고 있다. 덕분에 이백원의 적지 않은 원고료를 받았다. 가난하게 자란 그녀에게 이만한 큰 돈은 자신을 흥분시키게 충분했다. 목도리, 구두, 금니를 비롯해 그동안 마련하고 싶던 물건들을 행복히 머리에 정리해갈 쯤 남편은 그 돈을 자신의 동지들에게 썼으면 하는 바람을 내 비춘다. 자신의 바람을 알아주지 못하는 남편으로 인해 그녀는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남편은 급기야 손찌검을 한다. 아내는 여러 정황을 차분히 생각한 후 남편에게 용서를 빌고 두 사람은 화해한다.

  난 남편의 모습이 꽤나 적나라하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을 보자. “허허 난 그런 일류 문인의 사내 된 자격은 못 가졌다.” 자격지심, 심하게 말하면 아내에게 열등감을 가지는 남편의 모습이다. 남편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경제적으론 무능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념과 의리에 지배되는 모습이다.

  “머리를 지지고 볶고, 상판에 밀가루 칠을 하구 금시계에 금강석 반지에 털외투를 입고 입으로만 아! 무산자여 하고 부르짖는 그런 문인이 되고 싶단 말이지. 당장 나가라!” 추측하건대 아내의 마음을 움직인 건 바로 이 한 마디가 아닐까 한다. 무산자를 위한 문학을 하리라 했지만, 돈 앞에선 자신의 필요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일깨우는 남편의 호통이다.

  아내는 남편의 말에 순종한다. 두 사람은 부부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념적 동지였다. 아내의 순종을 전통적 미덕이라고만 이해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녀는 남편을 뜻을 같이하는 동료로 여겼기에 남편의 말을 따르는 것이다.

  아쉬움은 손찌검과 같은 폭력적인 모습이다. 동지인데 손찌검은 당치 않다. 이유는 당시-지금도 이러한 일들이 있어 슬프지만-손찌검이 가능하다는 아내와 이념적 동지의 중간 지점에 우리의 화자가 위태하게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경애(1906-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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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워싱턴-평양 - 워싱턴 비망록 1
정연주 지음 / 비봉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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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 정운찬에 대한 얘기가 몇 번 나온다.  

 

  대학 동기이며 도움 받은 이야기가 많다.  

 

  '정이 참 많은 친구'(75면)라고도 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정연주는 쫓겨났고 정운찬은 모심을 받았다.  

 

  자신을 쫓아낸 인물을 모시고 있는 정운찬을 정연주는 어떻게 생각할까? 

 

  여전히 정이 참 많은 친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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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행성 밖에서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 1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공경희 옮김 / 홍성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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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가 좋은 소설가는 아니다.  

 

  이 소설은 평소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그는 메시지를 잘 던지는데 소설적 허구를 동반하면 밀도가 확 떨어진다.  

 

  그도 이를 알았는지 모르겠다.  

 

  톨킨은 반대다.  

 

  그는 메시지에 무감하다.  

 

  하여 그의 소설이 좋은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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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5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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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은 별 다른 일을 말하지 않는다. 평평범범한 하루일 뿐이다. 구보(仇甫)는 오늘도 오정이 다 되어서야 집을 나선다. 광교를 지나 종로의 화신백화점을 들린다. 전차를 타고 대학병원, 동대문, 경성 운동장을 지나 훈련원, 약초정을 거쳐 본전통으로 들어와 조선은행에 이른다. 그 곳에서 다시 걸어 낙랑 다방, 남대문 역, 다시 낙랑 다방, 제비 다방, 대창옥, 또다시 낙랑 다방을 거쳐 낙원정에 이르고 새벽 두 시에 이르러서야 집으로 향한다.

  결국 의식의 흐름류의 모더니즘 소설이 근대에 있어 끊임없이 창작되고 소리소문없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가 지내는 일상이 구보의 하루처럼 너무도 쓸쓸하며 싱겁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의식의 흐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어서 옵쇼. 설렁탕 두 그릇만 주우. 구보가 노트를 내어놓고, 자기의 실례에 가까운

심방(尋訪)에 대한 변해(辨解)를 하였을 때, 여자는, 순간에, 얼굴이 붉어졌었다. 모르

는 남자에게 정중한 인사를 받은 까닭만이 아닐 게다. 어제 어디 갔었니? 요시야 노

부코. 구보는 문득 그런 것들을 생각해 내고, 여자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벗은 숟가락 든 손을 멈추고, 빠안히 구보를 바라보았다. 여름 저

녁에 먹은 한 그릇의 설렁탕은 그렇게도 더웠다.


  벗과 함께 설렁탕 가게에 들어선 구보는 어느새 상념에 젖는다. 도쿄유학 시절 마음에 두었던 여자와의 일화를 생각한다. 대뜸 요시야 노부코(吉屋信子)라는 이름도 떠올린다. 그러다 다시 설렁탕을 입에 넣는다. 요시야 노부코는 바로 앞 장인 ‘여자를’에서 한 차례 등장하는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함께 언급되는 걸 보고 작가이려니 했다. 그런데 언급하는 이 부분에서 다시 등장하는 걸 보고 궁금증이 생겨 일본문학사를 뒤져보았다. 그녀는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소설가이다. 보통 신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써냈고, 일본에서는 여성문학 연구에서 꽤 다뤄진다고 한다. 요시야 노부코가 도쿄의 여자와 외양이 혹은 성격이 닮아서였는지 모르겠다. 독자인 우리는 여기에 대해 알 방도가 전혀 없다. 이처럼 의식의 흐름은 독자의 이해와 공감보다는 소설 속 인물들의 자유로운 연상이 더 중요시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나는 한국적 현실을 발견한다. 의식의 흐름이란 이름 자체도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이루어진 서구의 문학 조류이다. "구보는 그저 <율리시즈>를 논하고 있는 벗을 깨닫고, 불쑥, 그야 제임스 조이스의 새로운 시험에는 경의를 표하여야 마땅할 게지. 그러나, 그것이 새롭다는, 오직 그 점만 가지고 과중 평가를 할 까닭이야 없지." 구보는 조이스의 문학적 실험에 대해 제 나름의 비판을 편다. 

   <율리시즈(Ulysses)>의 블룸은 광고외판원이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9세기의 맑스가 만일 20세기에 태어났다면 <자본론(Das Kapital)>이 아닌 <광고론>을 썼을 것이라고. 반면 우리의 구보는 룸펜일 뿐이다. 구보가 근대에 대해 나름의 반성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일랜드와 우리의 차이, 광고외판원과 룸펜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은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문학청년을 그린다. 이 때문인지 이 소설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근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곧잘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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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7
윤흥길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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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 외할머니의 불길한 꿈 얘기로 시작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것은 결말의 구렁이 사건과도 맞물리며 소설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분위기만이 아니다. 문제되는 사건의 해결도 상징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다음에서 서술할 화자 문제와 맞물려 작품 전체의 문제의식을 살필 수 있는 꽤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소설은 회상의 차원에서 진행된다. “무엇 때문에 내가 망설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받아서 좋을 것인가, 아니면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될 것인가를 결정짓지 못해서였을까. 혹은 그런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나이의 시골애답게 모르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 때문에 그랬을까.” 화자는 분명 소년이나 이 소년을 바라보는 한 시선이 있다. 바로 어른이 된 소년이다. 소년은 당시의 사건을 즉물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하나, 어른인 화자는 차분히 사건들을 정리한다. 독자는 이 두 시선 속에서 여러 사건을 대하게 된다.

  문제는 어른이 된 화자이다. 그가 소설 내내 사건들에 별다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건 그가 소년 시절의 즉물적이며 감각적인 상징의 세계를 옹호한다는 말일 것이다. 성장한 지금에 와서도 6.25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 때 당시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무서웠으며, 알 수 없었다. 그가 여적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두렵기 때문이다. 화자 자신이 비켜 설 공간이란 없다.

  6.25란 전쟁이자 아이들 말로 하면 편가르기일텐데 소설의 화자는 그 어느 편도 먹지 않고 있다. 이것이 독자로 하여금 신뢰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화해로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환상성 혹은 상징성은 독자의 신뢰를 저버리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만큼 역사적 사건이 무섭다는 말이기도 할 것일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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