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문학)은 그 자체보다도 동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살아 존재하는 '글쓰기'의 존엄함"이다.
황석영의 리얼리즘은 바로 치열함인 것 같다.
그것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중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목적이 올바르다면 방황은 필요하다.
마치 골드문트(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법운이 확연히 깨달았던 건 바로 인애(人愛)다.
깨달은 순간 하나의 방황은 끝나고 새 방황이 시작된다.
그게 인생이라 작가는 말한다.
곱추(<배운 사람>)의 마지막 한 마디는 마치 지식인들을 통째로 비웃는 것 같다.
사물과 현상을 올곧게 보기보다는 뒤틀어 보는 것이 마치 자랑인양 생각하는 사람들.
소설 속 곱추 앞이라면 누구라도 부끄럼을 느끼지 않겠는가?
고난의 역사를 되새긴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있기에 보다 나은 역사를 꿈 꿀 수 있는 것이다.
부끄럽고 고통스런 역사는 모두 잊고 지우자는 뉴라이트 역사가들이 함석헌 선생의 정신 앞에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본의 논리에 의해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공동체의 모습.
하지만 그 안엔 아직 민중들의 웃음과 꿈이 있다.
그 웃음과 꿈을 기록하고 신뢰하는 게 작가들의 의무이리라.
박태원은 물론이고 그의 외손자인 봉준호 감독도 그 의무를 다하고 있다.
박태원(1909-1986)